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115화
은사가 내 목을 향해 날아드는 그 순간.
나는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가끔 있다.
전투에 몰입하여 정신없이 싸우다 보면 나와 내 주변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기현상.
완전히 다른 시공간에 진입하여, 현실과의 감각이 괴리되는 영역에 진입한다.
훗날 고레벨 플레이어들이 초월영역이라 부르는 영역.
초월영역에 진입한 나는 몹시 큰 아쉬움을 느꼈다.
'엘튜브 각인데.'
기가 막힌 제목이 떠올랐다.
* * *
[SSS급 개미여왕이 힘을 숨김.]
이 제목으로 영상 올리면 구독자가 천 명은 늘어날 거 같은데.
요즘 제목 짓는 센스가 점점 탁월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쉽게도 나는 지금 김철수가 아니라 김평범이므로 이런 영상을 올릴 수는 없겠지.
순간,
개미여왕의 은사가 내 목에 닿았다.
그와 동시에 나는 올 클리어 업적 효과를 해제했다.
'이거면 무조건 즉사지.'
서걱!
정말로 목이 잘려 나가는 살벌한 느낌.
이 느낌만 받아도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어서 무너지는 애들도 많을 정도다.
그래서 물레벨이 되면 안 된다는 거다.
[즉사에 해당하는 공격입니다.]
['반사+1' 효과가 적용됩니다.]
목이 잘려 나가는 느낌은 내 간담을 서늘하게 했지만 어쨌든 베라클라프의 목걸이는 제 역할을 잘 해줬다.
'개미여왕한테는 어차피 안 통해.'
이미 실패했던 공격방법이다.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잠깐의 틈이면 된다.'
개미여왕은 기본적으로 겁이 많다.
겁이 많은 놈들은 신중하기 마련이고, 작은 변화나 공격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때도 그랬어.'
개미여왕과 처음 싸울 때, 나는 베라클라프 목걸이 효과를 톡톡히 봤었다.
정확히 세보지는 않았는데 최소 다섯 번 이상 공격을 반사해 냈었다.
그때마다 개미여왕이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걸 봤다.
나한테 그거면 충분했다.
'기회는 어차피 한 번뿐.'
[스킬, '시간배율 촬영'을 사용합니다.]
아주 잠깐 생긴 틈을 '시간배율 촬영'으로 조금 더 크게 벌렸다.
'몸이 가벼워.'
순식간에 개미여왕과의 거리를 좁혔다.
[스킬, '신검합일'을 사용합니다.]
다시 한번 초월영역에 진입했다.
내 모든 감각이 개미여왕에게 집중되고, 이 영역이 개미여왕으로 가득 찼다.
원래의 크기보다 수십 배는 더 커다랗게 보이는 느낌.
그리고 검과 하나 되어가는 이 감각.
이것은 경험해 보지 않은 자들에게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황홀경이었다.
"에잇, 모르겠다! 준다! 힘을! 이얍!"
내 오른손에 다시금 올클리어 각인이 돋아났다.
즉사를 위해 잠시 해제했던 올클리어 효과가 다시 적용되었다.
그리고 알림이 들려왔다.
[어린 황금 수호수가 권능을 발현합니다.]
[황금 수호수의 권능, '최선의 방어란 무엇인가'가 발현되었습니다.]
내 몸에 강대한 마력이 밀려들었다.
황금 수호수가 내게 강력한 힘을 빌려주는 듯했다.
초월영역에 진입한 내 감각이 더욱 확장되며 내 주변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개미여왕의 체향.
나를 향하는 살기.
바람의 방향.
내가 내딛는 땅의 강도.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일련의 정보가 되어 내게 전달되었다.
'최선의 방어란 공격이지.'
말하자면 이건 수호수의 버프였다.
이 마력에는 묘한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황금 수호수를 감싸고 있던 안개가 순식간에 팽창하며 연희동 일대를 뒤덮었다.
[신성목, 바쿠르드나이마의 의지가 당신을 돕습니다.]
이 일대를 뒤덮었던 안개가 짙어졌고, 순식간에 습도가 높아졌다.
'나무 향?'
수풀이 우거진 숲속에 들어가면 느낄 수 있는 청량한 냄새.
마치 소나무 숲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중계자의 시야가 주변 상황을 읽어냈다.
──────────
[피톤치드의 세계]
신성목, '바쿠르드나이마'는 오랜 세월 팔적목 개미에게 유린당했다.
신성목은 개미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막대한 양의 피톤치드를 만들었다.
아아, 신성한 나무여.
오래된 고통을 적에게 돌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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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안개 사이로 강미나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피톤치드 냄새네요! 민하 상식! 피톤치드란 식물이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박테리아, 곰팡이, 해충을 퇴치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생산해 내는 살생 효능을 가진 휘발성 유기 화합물을 통칭하는 말이랍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 '피톤치드의 세계'가 개미여왕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약화시켰다는 것을.
물보다 밀도가 훨씬 높은 이 짙은 안개가 개미여왕의 기동력을 묶었다.
'지금.'
[특성 스킬, '빠른 미래를 보라'를 사용합니다.]
[직업 스킬 개방을, 일시적으로 30레벨만큼 앞당깁니다.]
현재 레벨 92.
신화급 카드의 뒷면 효과로 +20으로 인하여 임시 112 판정.
거기에 '빠른 미래를 보라'로 +30 판정.
현재 레벨 142.
여전히 개미여왕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레벨이었으나 상관없었다.
[스킬, '동귀어진'을 사용합니다.]
검술가 계열, 레벨 140에 획득하는 스킬.
내 목숨을 바쳐서 파괴력을 극대화시키는데, 레벨 200 이하에서 최강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스킬이다.
신검합일과 함께 사용하면 그 능력이 극대화되는데, 참고로 신검합일과 동귀어진을 함께 구사할 수 있는 컨트롤 능력이 되는 사람은 한국에 10명이 채 안 됐다.
'오랜만이네, 이 감각!'
동귀어진을 사용한다는 건 내 목숨도 내놓는다는 뜻이다.
보통은 부활설정이 걸린 곳이나 PVP존 등에서 사용하는 스킬이다.
사용하고 나면 정신적 타격이 너무 크기에 사람들이 선호하는 스킬은 아니었으나 나는 동귀어진을 애용하는 플레이어 중 한 명이었다.
'꽂는다.'
순간,
초월영역이 깨졌다.
모든 감각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내 어깨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꽂아 넣었어.'
시간이 정상 흐름을 되찾았다.
개미여왕의 가슴팍에 라칸이 제대로 꽂혔다.
[특성, '여벌 목숨'이 적용됩니다.]
우웨에엑!
동귀어진의 여파로 나도 모르게 토악질을 했다.
'지금 숨통을 끊어야 한다.'
전투는 단 한 번의 선택으로도, 단 한 번의 칼질로도 끝날 수 있다.
개미여왕의 몸 위에 서서 라칸을 여러 번 내리찍었다.
'보호막은 완전히 뚫렸어.'
푹!
개미여왕은 크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개미여왕의 날카로운 손날이 내 몸을 스쳤다.
'따갑네.'
내 몸 여기저기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치명상이라고 할 건 없었다.
그에 반해 개미여왕의 상태는 영 좋지 못했다.
'피톤치드의 효과가 굉장한데.'
피톤치드는 마치 독처럼 개미여왕의 상처를 점점 더 썩어들어가게 만들고 있었다.
'나한테는 해독 효과를 주고.'
피톤치드가 개미여왕의 독을 해독시켜주었다.
"정말이네?"
수호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구나. 그렇구나."
목소리가 조금 이상해진 것 같아서 뒤를 힐끗 보니 수호수의 이파리가 자줏빛으로 살짝 물들어 있었다.
원래 완전히 황금색이었는데, 오묘한 자줏빛을 띠고 있다.
더 유니크해 보이고 좋은 거 같다.
'근데, 네 권역에서 누가 죽는 거 싫어하지 않았냐?'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나는 다시금 대검으로 여왕의 가슴을 내리찍었다.
푹!
[개미여왕, '아를로아 P 데미라스'를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레벨 93을 달성하였습니다.]
아.
얘를 잡았는데 1레벨업이라고?
'역시 스트리머는 스트리밍을 해야지.'
그래야 레벨업을 할 수 있다.
이건 너무 비효율적인 짓이었다.
'그리고 보상이 없네?'
이 정도 규모의 시나리오의 보스몹을 잡았는데 보상이 없다.
나는 히죽 웃었다.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편, 강미나는 무척 즐거운 듯 보였다.
"개, 개, 개미여왕 솔로잉에 성공했습니다! 기적이 벌어졌어요!"
민하TV에 수많은 시청자들이 몰려들었다.
강미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김철수의 모든 모습을 화면에 담았다.
'3레벨이나 올랐어!'
레벨업을 무려 세 번이나 했다.
전 세계 각지에서 후원이 쏟아졌다.
'동접 시청자 숫자가 무려 50만이라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시청자 상한선도 사라져 있었다.
어쨌든 동접 50만은 그녀로서도 처음 달성하는 수치였다.
이 모든 일이 꿈 같았다.
'미쳤다. 진짜 미쳤어.'
그리고 이 모든 꿈이 감동이었다.
"2022년 10월 10일. 저 오늘부터 김평범이랑 1일 해도 될까요?"
시청자수 50만.
언제 다시 이런 게 또 가능할지 알 수 없었다.
"김평범과 인터뷰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김평범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여지껏 그래왔던 것처럼, 그는 또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아쉽게도 인터뷰는 실패했네요. 대신 개미여왕의 사체를 한 번 샅샅이 살펴보겠습니다!"
전 세계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와 관련된 수많은 영상들이 제작되었고, 온라인/오프라인 공간을 막론하고 축제를 벌였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운 인류는 오늘도 전진할 것이다.
-K&K. 그리고 영웅들로부터 배운 것.
-K&K.
김철수와 김평범의 이름이 드높아졌다.
전 세계 각지 포털의 실시간 검색 1위가 김철수와 김평범이었다.
이른바 국뽕채널들의 엘튜브 조회수는 급상승 중.
[한국인 플레이어 둘이 인류의 재앙을 막아낼 수 있었던 12가지 방법.]
[외국 플레이어들이 한국 플레이어들을 동경하는 이유 TOP3]
[전 세계 탑 랭커들이 한국 플레이어들에게 경악하며 난리가 난 이유는?]
[한국 플레이가 역대급으로 찬사받는 결정적인 이유는?]
한편, 차진혁은 한마갤 반응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김철수와 김평범의 콤비가 해낸 개미여왕 사냥은 결코 운의 영역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철저한 계산과 협력을 통하여 재앙을 막아냈습니다. 첫째로…… 이고, 둘째로…… 이며, 셋째로…… 등의 수많은 변수계산과…… 하여…… 결국은 개미여왕을 사냥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개미여왕의 추정 레벨은 100대 후반. 아무리 이런저런 안배를 통해 레벨 140대가량으로 끌어올렸다고 하더라도 사냥하기 힘든 개체였습니다. 그러나 김철수와 김평범은 결국 보여주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기적, 저는 오늘 기적을 보았습니다.]
[-글 작성자: 백과사전]
네임드 유저인 백과사전의 분석글에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 와 그 짧은 몇 초에 저런 계산이 다 들어갔다고?
┗ 나는 걍 푹찍푹찍 끝인 줄?
┗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게 진짜구나. 저렇게 많은 계산이 들어갔을 줄은 몰랐음. 분석글 감사요.
┗ 그저 빛. 빛평범과 빛철수이시다.
┗ 겨우 빛이라니 무엄하누. 그분들은 신이시다.
┗ 갓평범, 갓철수! 갓들을 찬양하라!
백과사전은 내가 어떻게 개미여왕을 상대할 수 있었는지를 비교적 정확하게 분석해 냈고, 내 레벨과 개미여왕의 레벨도 거의 정확하게 추론해 냈다.
확실히 능력이 있는 녀석이었다.
"근데 너무 유명해지는 거 아닌가 몰라."
예전에는 어느 섬나라의 유소년 축구 유망주였다면, 이제 명문 구단의 유망주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더 유명해지고 싶……."
하마터면 본심을 말할 뻔한 나는 고개를 저었다.
힘을 갖추지 못한 상태로 너무 유명해지면 곤란하다.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무력' 쪽의 관심은 김평범 쪽으로 돌려놓는 게 현명했다.
'나는 스트리머니까. 당분간은 안전해.'
세계조약에 따라 스트리머는 보호받는다.
스트리머라는 직업 자체가 나와 내 주변을 보호해 주는 1차적인 제도적 방어막이 되어줄 것이다.
'일단 150레벨까지만 신나게 달려보는 거다.'
레벨 140 언저리를 경험해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레벨 150까지는, 전생 이상의 성취를 일궈낼 수 있을 것이다.
전생의 나보다 현생의 내가 더 강하다는 것을 확신한다.
더 강해질 수 있다니?
그것만 생각해도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것이 마치 첫사랑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다.
'이제 그만 봐야겠다.'
세계 각국의 반응이 너무 뜨거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는데, 나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각종 커뮤니티창을 닫았다.
'조금 기다리면 더 많이 쌓여 있겠지?'
원래 맛있는 건 모아놨다가 왕창 퍼먹어야 더 맛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많은 추천을 받은 중간중간 개념글 같은 게 올라오면 더 흥미롭고 말이다.
김철수 이름이 더 많이 퍼지면 좋겠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기록일지를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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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종꾼의 기록일지(귀속)]
황금 수호수의 탄생과 성장을 자동으로 기록하는 일지.
* 2022/7/26 : 씨앗을 뿌렸다.
* 2022/7/29 : 어린 황금 수호수가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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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0 : 파종꾼과의 교감에 성공하였고, '최선의 방어란 무엇인가'를 통해 지키고자 하는 의지와 죽이고자 하는 의지가 공존할 수 있음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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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랄까.
육아일기를 쓰는 것 같은 기분이다.
수호수가 무럭무럭 잘 배우고 잘 자라나는 것 같아서 뿌듯하다.
보아하니 황금 수호수는 파종꾼의 정신과 연결이 되어 있고, 내 가치관이나 생각에 많은 영향을 받는 것 같다.
검은 글씨로 강조된 걸 보니 잘했다는 거 같다.
앞으로도 올바른 육아에 힘을 써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아 맞다.'
차진솔의 방으로 가보니 차진솔은 여전히 누워서 골골대고 있었다.
조금 불쌍한 마음이 들어 목덜미를 내주었다.
차진솔은 환각에 빠진 애처럼 팔을 휘적거리다가 내 목을 깨물고 흡혈했다.
'혈색이 좀 좋아졌네.'
몇 시간 지나면 깨어날 거 같고.
'방송 켜고 싶다.'
이거 생각보다 금단증상이 심하다.
대외적으로 나는 위독한 상태니까 방송을 켜기는 좀 어려웠다.
'이럴 때는 다 방법이 있지.'
나는 청담동으로 향했다.
내 정체를 알고 있는 두 사람과 만났다.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최갑수 영감님과 미셸장은 소파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 김평범이자 김철수이자 인류의 영웅 차진혁 군 아니신가!"
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내게 원하는 것이 있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두 분만을 위한 영상. 1인칭 시점의 초희귀 소장본을 촬영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