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112화
희대의 빌런 신유리는 강력한 화포를 다루는 일격필살의 플레이어였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변화는 그녀의 화포가 'LV2' 단계로 진입했을 때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신유리는 레벨 100이 넘어서야 LV2에 진입했었다던데?'
현재 내 레벨은 92.
신유리는 '네미시스 함포'라는 직업과 상성이 엄청난 사람이다.
그야말로 네미시스 함포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런데 내가 더 빠른 시기에 레벨2에 이르렀다.
'이게 되네?'
* * *
2, 3레벨 차이만 해도 재능의 격차가 크다고 말한다.
그런데 무려 8레벨 차이가 났다.
내 몸이 신유리 이상으로 네미시스 함포와의 상성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제어하기가 조금 힘든 느낌입니다."
더욱 요란하고 거대하게 변한 대포.
오른손에 엄청난 마력이 집중되면서 컨트롤이 힘들었다.
지금은 억지로 눌러놓고 있으나 마구잡이로 폭발할 것만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사이,
망부석이 말했다.
"네미시스의 분노."
예전, 개미들과 싸울 때 보았던 신유리의 능력이 다시 한번 발현되었다.
현재 망부석의 레벨은 69.
69에 불과한 레벨이지만 파괴력 하나만큼은 100레벨급 이상인 것 같다.
망부석의 거포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수천 마리 개미들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망부석의 활약에 감탄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나도 잘 해야 할 텐데.'
기껏 레벨2의 화포를 생성했는데 이게 내 마음대로 조종이 안 되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건 마치 내 신체적 피지컬이 재능에 잡아먹히고 있는 꼴이었다.
"잠시 집중하겠습니다."
내가 다룰 수 없는 능력은 다루지 않느니만도 못하다.
지금 시점에서 공유받은 '네미시스의 분노'를 사용했다가는 개미들과 싸우고 있는 아군들마저 피해를 입게 될 것이 분명했다.
'팔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네.'
외상은 없었다.
팔 내부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안에서부터 피가 꾸물꾸물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두 근처는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마치 팔이 썩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이걸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내 레벨이 더 높아야 돼.'
적어도 신유리가 이걸 발현시켰던 레벨 100 언저리까지는 높아져야 이 능력을 제대로 다룰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응?'
근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레벨2에 진입한 화포가 또다시 위잉- 위잉- 기계 소리를 내며 더욱 거대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점차 그 크기가 커져 갔다.
'미친.'
난 이게 뭔지 알고 있다.
과거의 신유리가 다루었던 화포의 최종병기 버전.
단순히 오른팔이 화포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거대한 화포로 변하게 된다.
움직이는 공성병기.
스킬 자체에 이명이 붙은 특이 케이스.
바빌론 캐논(Babylon Cannon)이라 불리던 그 능력이 틀림없었다.
'그것보다 크기는 작은 거 같은데.'
참고로 이 능력은 신유리가 레벨 150 이상에서 다루던 능력이었다.
화포의 LV3 단계로서, 그녀는 이걸 최종병기라 불렀다.
'경기남부가 불바다가 됐었지.'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신유리를 일컬어 걸어 다니는 전술핵이라 부르기도 했었다.
내가 이걸 제대로 사용할 수만 있다면 저 개미 떼들을 몰살시키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근데 안 돼.'
개미 떼들뿐만 아니라 이곳의 사람들도 모두 죽일 거다.
어쩌면 이 말도 안 되는 파괴력에 휩쓸려 나도 죽을지도 모른다.
이건 지금의 내가 절대 다룰 수 없는 힘이다.
'이 방법은 그냥 포기해야 하나.'
내 피지컬이 재능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근데…….'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신유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바라봤다.
"스승님, 괜찮으세요?"
대답은 할 수 없었다.
말을 하기에는 여유가 부족했다.
나는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 놓치면 안 될 것만 같은 이 느낌.
이것은 깨달음 직전에 다가오는 그 고양감이 틀림없었다.
눈을 감았다.
신유리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제가 지켜드릴게요, 반드시."
무방비로 노출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나는 최대한 정신을 내 오른손에 집중했다.
LV2 단계에서는 내 오른팔이 이 이능에 잡아먹혔지만, 지금은 내 온몸이 이 이능에게 물어뜯기도 있는 것 같았다.
스킬, '네미시스의 분노' 자체가 내 몸 전체를 잠식하는 이 감각.
'이 폭력적인 힘을 다룰 수 있는, 그것도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눈을 감고 내 내면을 관조하자 내 안의 우주가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 우주는 단단한 껍질로 보호받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제왕의 격'임을 느낄 수 있었다.
제왕의 격이, 내 정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하고 유연하게 붙잡아주고 있었다.
나는 어두운 우주 속에 밝게 빛나는 조각에 손을 뻗었다.
이 조각은 분명 신비, '행운 그 자체'였다.
신비는 내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이리저리 도망 다녔다.
나는 그 조각을 잡기 위해 어딘가로 빠르게 달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꽤 오랜 시간 환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만 알겠다.
'여긴…….'
내 내면세계 속, 어딘가에 발걸음을 멈춘 나는 그제야 눈을 떴다.
'방법을 알겠다.'
내 몸만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내 힘으로 컨트롤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다른 힘을 끌어와 커버하면 된다.
이제 알겠다.
"저에게는 뛰어난 방어신비가 존재합니다."
과거 신유리가 어떻게 이 강대하고 폭압적인 힘을 다룰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신유리 또한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 LV3 단계의 바빌론 캐논을 다루지는 못했을 거다.
"이 폭력적인 힘은, 상성이 뛰어난 방어신비와의 결합을 통해 완성됩니다."
신유리의 방어신비인 아이언 돔.
그리고 공격 스킬인 네미시스의 분노.
이 두 능력은 하나의 권능으로 합쳐져 움직이는 공성병기 바빌론 캐논을 구현했었다.
신유리가 했다면 나도 할 수 있다.
[신비, 환상검희를 사용합니다.]
아이언돔-네미시스의 분노.
두 결합으로 바빌론 캐논이 생성되었듯.
환상검희-네미시스의 분노.
두 결합으로 새로운 무언가가 발현되기 시작했다.
"반투명, 유령 형상이었던 환상검희의 물질화가 진행되고 있네요."
유령 같았던 환상검희의 모습이 사람처럼 변했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베일이 사라지고, 풍성한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를 가진 그녀의 등 뒤로, 여섯 장의 백색 날개가 돋아났다.
그녀의 날개는 여기저기 찢겨져 있었다.
마치 타락천사처럼.
하얀 천으로 몸을 두르고 있었는데, 몸 곳곳에 검붉은 상처와 흉터가 도드라져 있었다.
"두 눈에서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피부에 검자줏빛 혈관이 확장되고 있네요."
그리고 환상검희가 들고 있던 검이 자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환상검희가 입을 열었다.
"복수의 칼날을 손에 쥐어라."
나는 환상검희의 모습을 클로즈업해서 잡았다.
음량을 높여 무슨 말을 중얼거리는지 정확히 읽어냈다.
"알게 하라. 어리석은 자들의 말로가 무엇인지."
환상검희는 손에 들고 있는 자줏빛 검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 검에서 진득하고 불길한 살기가 느껴졌다.
"말살의 대상은 무엇인가, 나의 주인이여."
나와 눈이 마주쳤다.
제왕의 격으로 보호받고 있는 내 정신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 같았다.
진득한 살의로 뒤범벅된 저 눈길을 받아내는 건 무척이나 설레는 일이었다.
"환상검희는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 방어신비를 운용해 보죠."
환상검희가 날개를 펼치고 날기 시작했다.
그 광경이 아름답기는 했으나 약간 아쉬운 감이 있었다.
BGM이라도 깔아줘야 할 거 같은데, 지금 그럴 여유는 없었고 오디오가 비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스트리머로서 제일 멋진 말을 생각해 냈다.
위대한 힘이 깃들었던 오른손을 내뻗으며 말했다.
"휘둘러라, 복수의 칼날을. 알게 하라, 어리석음의 말로를. 증명하라, 말살의 의지를."
하.
이러면 안 되는데.
병신 같은 거 나도 아는데.
내 안에서 도저히 참을 수 참을 수 없는 무언가가 들끓어 올랐다.
"도려내라, 적의 심장을."
……좋아.
솔직히 멋있었어.
어벤저스 사단을 이끄는 에건 폴은 노련한 스트리머답게 방송을 진행했다.
팔적목 개미군단과 맞서 싸우던 그는 순간 위기감을 느꼈다.
'이 말도 안 되는 파괴력은…… 한국의 망부석?'
망부석의 능력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능력이 지나치게 화려하고 강력하여 시청자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확 쏠렸다.
'우리 애들로 콘텐츠 진행해야 하는데.'
어벤저스사단 또한 잘 싸우고 있었다.
충분히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한방 파괴력은 망부석에 미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그는 프로였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지금 시청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즉각 캐치하여 망부석의 '네미시스의 분노'를 정확하게 촬영하고 보여주었다.
레일건과 같은 그녀의 공격에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팔적목 일개미들을 화면에 담았다.
멋진 광경을 보여준 뒤 자연스레 방송을 이어갔다.
"전 세계의 플레이어들이 힘을 합쳐, 인류의 재앙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이곳은 자유의 최전선, 한국입니다."
단순히 신유리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합심하여 재해와 맞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연출했다.
인류 공동의 적과 싸우기 위하여 인류의 영웅들이 화합하고 희생하는 모습은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
전 세계 곳곳에서 영웅들을 위해 촛불을 들고서, 그들을 위한 노래를 불렀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와 각국의 국기를 흔들며 인류의 승전을 기원했다.
'좋았어. 구도는 이렇게 잡아야지.'
누군가 한 명의 독단적인 활약이 아니라, 뜻을 모아 함께하는 이들 모두의 활약상을 담아야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당연히 어벤저스 사단이 있어야 했다.
그는 그렇게 연출할 생각이었다.
'응?'
그런데 불길한 형상의 천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건 폴은 방송을 위해 몇 명의 직원들을 고용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스케치북에 글씨를 써서 알려주었다.
[김철수 능력, 방어신비 환상검희.]
"저 능력은 한국의 유명 스트리머, 김철수의 방어신비 환상검희로군요."
[신화급 카드사용.]
[망부석 능력을 복사하여 융합]
"신화급 카드를 사용하여 망부석의 능력을 복사 후 융합한 능력입……."
노련하게 방송을 이어가던 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얼른 정신을 차린 그가 말을 이었다.
"검이 수, 수십 가닥의 채찍으로 변하여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영웅들의 신성한 희생이 이번 콘텐츠의 주가 되어야 하는데.
어벤저스 사단이 주축이 되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었다.
"자주색 폭우가 내리는 거 같군요."
기획 의도와는 상관없었다.
압도적으로 장엄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환상검희의 무위를 화면에 담는 것뿐이었다.
"마치 검우가 내리는 것 같습니다. 빗방울이 살아서 꿈틀거리며 개미들을 도륙하고 있습니다."
분명 검이었다.
시작은 검이었으나, 끝은 폭발이었다.
"이걸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벤저스 사단의 리더 에건 폴은 짙은 패배감에 휩싸였다.
그도 이런 건 처음 봤다.
"요약하자면, 절삭 폭발형, 대단위 광역계…… 방어 신비 정도일까요?"
환상검희의 검은 채찍처럼 늘어나 비처럼 쏟아졌다.
비에 닿는 모든 곳이 광역폭발을 일으켰고 개미들의 몸통을 수십 개로 분해했다.
순식간에 수천, 수만 마리의 개미들이 도륙당했다.
그러한 가운데, 개미들이 양옆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도망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도망이 아니었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다."
개미들이 흩어진 가운데 개미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미여왕은 보편적인 인간들의 눈으로는 거의 잡히지도 않을 만큼 가공할 속도로 날아가 환상검희의 목을 움켜쥐었다.
순간, 환상검희의 모습이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환상검희를 컨트롤하던 차진혁이 일부러 신비 사용을 종료한 것이었는데, 개미여왕이 차진혁이 은신한 건물 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해친 자여."
개미여왕은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차진혁이 은신한 곳을 향해 날아갔다.
여왕의 목소리가 플레이어 전원에게 전달되었다.
"서서히 잠식하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해주마. 약속하지."
건물 옥상에 올라섰다.
차진혁이 은신하고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결코 편안하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개미여왕의 손끝에는 눈에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은 은사가 흩날리고 있었다.
옥상 구조물 뒤에 숨어있던 차진혁은 몸을 일으켜 개미여왕 쪽으로 걸어 나왔다.
"엘튜브 각이네요."
대격변 이후, 인류의 첫 재앙으로 기록될 개미여왕 앞.
차진혁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