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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92화 (92/437)

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92화

내가 회귀하기 직전까지도 세상에는 풀리지 않은 비밀들이 굉장히 많았었다.

개중에는 '가면을 쓴 현자'와 관련된 것도 있었다.

내가 예전에 얻었던 '파라오의 금빛 가면'과 상당히 유사하게 생긴 가면을 쓴 마법사가 한 명 있었다.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다만, 지구의 플레이어들이 상대하기 버거웠던 재앙들을 제거해 준 마법사라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가면을 쓴 현자'는 전 세계에서 딱 7번 모습을 드러냈었는데, 나는 직접 이자와 만난 적이 있었다.

'슈베어 구스타프. 신유리와의 싸움에서…… 우릴 구해줬었지.'

신유리는 한국 역사상 최강의 빌런 중 하나로 손꼽히는 여자였다.

그 여자는 빌런 연합인 '반신 연합'을 이끌고 있었고, 우리와 전투를 치렀었다.

'우리는 신유리의 힘을 과소평가했었고 전멸당할 뻔했어.'

그때 우리를 도와준 자가 바로 가면을 쓴 현자였다.

지금은 가면을 쓰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보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가면을 쓴 현자'가 틀림없었다.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었군.'

얼굴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일그러져 있었다.

그래서 가면을 쓰고 다녔던 모양이었다.

가면을 쓴 현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값은 치렀다."

목소리가 듣기 좋은 편은 아니었다.

허스키하다 못해 쇳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생기가 쭉쭉 빨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내가 따냈던 열매는 현자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언제 가져간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돌아가도록."

"어떻게?"

열매가 있어야 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다.

현자의 눈이 나를 향했다.

나는 저 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깨달았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라고 되묻는 눈빛이었다.

어쨌든 얘는 내 목숨 하나를 취하면서 열매에 대한 값을 받아냈으니 자기 할 일은 다 했다는 스탠스였다.

내가 여기서 갇혀 죽든 굶어 죽든 그건 자기 알 바 아니라는 소리겠지.

너무 합리적이고 당연한 얘기여서 나는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 내가 쓸데없는 질문을 했군."

그보다는 훨씬 생산적인 것을 물었다.

"내가 저 출구를 나가기 위해서 열매가 필요해. 정당한 값을 치러서 열매를 구하고 싶은데."

"값은 네가 제시하도록."

길의 방향은 잘 잡은 것 같았다.

훔치면 안 되고 얘와 잘 협상해야 한다.

[퀘스트, '???과의 거래' 가 활성화되었습니다.]

──────────

[???과의 거래]

'???'이 납득할 수 있는 거래 조건을 제시하여야 합니다.

단, 기회는 한 번뿐이며 적절하지 못한 조건을 제시할 시, '???'에게 살해당할 수 있습니다.

──────────

현자에게 살해당할 수 있다는 건 내게 있어서 딱히 신경 쓰이는 부분은 아니었다.

어차피 열매를 제대로 얻을 수 없으면 사망하는 거였으니까.

'내가 가진 것들 중에 얘를 만족시킬 만한 건 거의 없어.'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렇지 않은가.

내가 얘 레벨을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못해도 250레벨은 넘을 거다.

나 같은 저레벨이 가진 것들 중에 얘 성에 차는 게 있을 리가 없다.

내가 가진 아이템 중 가장 좋은 아이템이라 할 수 있는 베라클라프의 목걸이, 수호자의 반지, 대검 라칸 등도 얘 눈에는 잡템이겠지.

'진짜 필요를 채워주지는 못해.'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했다.

'얘가 나왔던 시점부터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현자는 그리 오래 기다려주지 않았다.

"조건을 제시하여라."

"그래."

나는 인벤토리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냈다.

──────────

[파라오의 금빛 가면]

──────────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거밖에 없었다.

회귀 전에도 얘는 이 가면과 비슷한 가면을 쓰고 다녔다.

"그게 무엇이지?"

뭐라고 답해야 있어 보이지?

나는 이내 답을 생각해 냈다.

"영원을 꿈꾸던 자의 가면."

실용성을 채워주지 못한다면 간지를 채워주면 된다.

어?

내 손에 들려 있던 파라오의 금빛 가면이 또 사라졌다.

어디 갔나 싶어서 봤더니 어느새 현자가 가면을 쓰고 있었다.

현자는 자신의 손으로 가면을 한 번 슥- 훑었다.

'와, 저게 된다고?'

상대적으로 굉장히 조잡해 보였던 '파라오의 금빛 가면'은 내가 익히 알고 있던 디테일하고 정교한 황금 가면으로 변해 있었다.

말하자면 잡템이 신화템으로 변모한 거 같다.

"값은 지불되었다."

내 하나의 목숨값보다 이 가면의 가치가 더 크다는 사실이 약간 씁쓸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얘 마음에 들기는 했나 보다.

"네게 허락된 열매는 단 하나뿐. 명심하도록."

정신을 차려보니 또 내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움직임 자체를 아예 읽을 수조차 없었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진짜 세구나.'

괜스레 가슴이 쿵쾅거렸다.

언젠가, 정말로 강해진다면 이 현자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만 해도 굉장히 설레고 행복해졌다.

마치 옛날의 내가 로또 1등 당첨을 상상하며 행복했던 것처럼.

'일단, 열매를 하나 채취해 볼까?'

* * *

나는 밧줄을 하나 더 구매했다.

뱅뱅이 활을 사용하여,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나뭇가지 위에 올라섰다.

'잠깐.'

근데 이 열매들이 다 똑같은 건가?

그럴 리 없었다.

하다못해 같은 나무에서 열린 사과도 맛이 다르다.

'어차피 하나밖에 못 가져가는 거면 엄선해서 가져가야 하는데.'

현자가 나한테 시간제한을 준 것도 아니니 천천히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단순히 모양으로 예쁜 것을 구별해서 가져가는 건 의미 없을 거 같고.

'행운 그 자체를 사용할 수 있으면 좋을 거 같기는 한데.'

이놈의 신비는 도대체 언제쯤 다시 사용할…… 어? 할 수 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어느새 '행운 그 자체'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게 사용 가능해진 이상, 머리로 이것저것 따지고 생각해 봐야 의미 없었다.

[신비, '행운 그 자체'를 사용하였습니다.]

현자가 사라지고 나니 마음에 여유가 조금 생겼다.

"신비를 사용했습니다."

동시에 약간 반성했다.

내가 진짜 급박한 상황과 맞닥뜨리자 방송하는 것처럼 플레이를 진행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데 온 신경이 쏠려버렸다.

'이래서야 진정한 스트리머라고 할 수 없지.'

진짜 프로라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균등한 퀄리티의 방송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현자가 등장하면서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잊고 말았다.

그나마 연습이어서 다행이지, 실전이었으면 접시에 코 박고 죽었어야 했다.

나는 다시금 초심(?)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

"수많은 열매 가운데 유독 번쩍거리는 것이 보이네요."

나는 무엇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뱅뱅이 활과 밧줄을 이용하여 타잔처럼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놈인 거 같습…… 어?"

손을 뻗어서 열매를 채취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저만치 멀리, 번쩍이는 열매가 보였다.

"저 빛이 사라지기 전에 잡아야 할 텐데요."

나는 중계상점에서 스프레이를 하나 구매했다.

가까이 다가가 스프레이를 뿌려 열매에 표시했고, 이후는 노가다의 연속이었다.

"또 도망쳤습니다. 무지하게 빠른 놈입니다."

나는 히죽 웃었다.

열매 주제에 뭐가 이렇게 빨라?

나는 열매를 계속해서 쫓아다녔다.

'헉!'

조심해서 움직인다고 움직였는데, 하마터면 다른 열매를 건드릴 뻔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상당한 체력과 정교한 정신력이 요구되는 작업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는 굉장히 긴장하고 있는 상태다.

혹시 실수로 열매 두 개를 건드린다면 나는 죽을 테니까.

현자가 나한테 허락한 열매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저 열매를 못 얻는 것도 끔찍한 결과지.'

플레이하다 죽는 거야 뭐 워낙에 흔한 일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목표했던 저걸 못 얻는 건 죽음보다 더 끔찍하다.

"반드시 얻어내고 말겠습니다."

나는 또 히죽 웃고 말았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이 정도의 긴장감이란 말인가!

'원래 플레이란 이런 거지.'

최근에는 이 정도 긴장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조금만 실수해도 목이 날아갈 것만 같은 이 짜릿한 감각.

'나, 살아 있네.'

삶을 실감하게 해주는 이 원초적인 감각이 내 잠들어 있던 모든 세포를 깨워주는 것만 같았다.

'또 도망쳤어?'

열매가 너무 빠르다.

그래서 즐거웠다.

이 시간을 더 즐길 수 있을 테니까.

"잡고 말겠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대충 10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잡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결국 나는 열매를 품에 꽉 안을 수 있었다.

혹시 또 도망갈까 싶어 얼른 인벤토리에 넣고, 곧바로 출구를 향해 몸을 던졌다.

[열매를 확인하였습니다.]

[수호수 던전에서 탈출합니다.]

보통은 '클리어'라는 표현을 쓰는데 여기서는 탈출이라는 단어를 썼다.

애초에 클리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이렇다 할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다.

내 인벤토리 내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저 열매가 곧 보상인 것 같았다.

"어느새 벌써 저녁이 되어 있네요."

나는 다시금 인벤토리를 살펴보았다.

느낌이 기묘하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그냥 내버려 두면 인벤토리가 폭발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인벤토리가 폭발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런데 가만히 두면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열매를 땅에 심어야 할 거 같군요!"

어떤 조건을 갖춰줘야 하는지.

뭘 해줘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지만 과거에 수호수가 자라났던 곳이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고 있다.

나는 전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

그리고 나는 내 몸이 상당히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바로 어제, 강철 스나이퍼와 함께 달려봤기에 정확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성장했다!'

척추를 타고 짜릿한 전율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극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나뭇가지 사이를 뛰어다녔던 것이 나를 한 차원 더 성장시킨 모양이었다.

레벨이나 스킬 등의 어떤 수치로는 표시되지 않는 이 감각.

물레벨들은 절대 알 수 없는 이 미묘함.

수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이 성장은 나를 또다시 행복하게 해줬다.

여러모로 행복한 날이다.

'아오, 진정 좀 해라.'

인벤토리가 터질 것 같은 위기감이 밀려들었다.

인벤토리가 터지면 내 플레이어로서의 인생도 끝날 것만 같은 느낌이다.

내 몸 안에 시한폭탄을 들고 달리는 기분이었다.

아니다.

더 정확한 표현이 있다.

이건 급똥의 감각이다.

'제발! 빨리!'

이곳은 연희삼거리다.

왕복 4차선 정도 되는 사이즈의 도로.

예전에도 이 한복판에 누군가 수호수를 자라나게 했었다.

'터지겠다 진짜!'

1초가 1분처럼 느껴졌다.

조금 있으면 급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빨리 좀 와!'

나는 목재현을 불렀다.

아무래도 목재현이 나보다는 더 잘하겠지 싶어서다.

다행히 목재현은 차진솔을 보호하겠다며 근처에 있었다나 뭐라나.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고 있다고 했다.

'온다!'

오는 길에 전화로 설명했다.

목재현은 도착하자마자 허겁지겁 자전거에서 내렸다.

"일단 바리케이트부터 칠게요."

목재현이 수목산성을 응용하여 땅으로부터 줄기들을 뽑아냈다.

빵! 빵!

자동차들의 흐름이 엉켰다.

자동차들이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목재현. 성장했구나!'

시키지 않아도 척척 알아서 잘해내는 모습에 상당히 흐뭇해졌다.

근데 진짜 터질 거 같다.

"야, 빨리."

목재현이 나무줄기들을 이용해 땅을 팠다.

대략 3미터쯤 팠을까.

나는 그 안으로 수호수의 열매를 집어 던졌다.

수호수의 열매가 땅과 맞닿았다.

쿠구구궁-!

일대에 지진이 일어났다.

주변 상가들의 간판이 땅에 떨어질 정도의 지진이었다.

그리고 전체 알림이 들려왔다.

['황금 수호수의 씨앗'이 파종되었습니다.]

열매를 집어 던진 곳을 중심으로 하여 상서로운 황금색 빛줄기가 치솟아 올랐다.

구름에 닿을 만큼 높이 치솟아 오른 그것은 하나의 기둥과도 같았다.

'회귀 전에 이런 헤프닝은 없었는데?'

무엇인가가 달라졌다.

'이 빛줄기는 분명…….'

지구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타 서버에서 본 적 있다.

일반 수호수가 아니라 황금 수호수가 심어졌을 때 이런 빛기둥이 피어오른다고 알려져 있다.

[72:00:00]

구덩이는 어느새 저절로 덮여 있었고 대신 그 위에 숫자가 떠 있었다.

72시간 타이머였다.

[71:59:48]

72시간이 지나면 이 자리에서 황금 수호수가 자라날 것이 분명했다.

'황금 수호수는 전 서버를 통틀어서도 6개인가밖에 안 됐는데.'

지구처럼 어중간한 수준의 서버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다.

무려 3개가 최강의 서버인 아르비스에 몰려 있고, 나머지 3개가 또 다른 강대 서버에 하나씩 있던 걸로 기억한다.

황금 수호수에 관한 것은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었다.

해당 서버에서도 황금 수호수에 관한 정보를 별로 오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일반적인 수호수보다 훨씬 더 큰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대박이네.'

시간 타이머 밑으로는 조금 흐릿한 글씨가 보였다.

[파종꾼 : 김철수]

이건 나한테만 보이는 글자인 것 같았다.

'파종꾼?'

내가 심었다는 얘기인 거 같은데 이게 왜 기록까지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72시간이 지나 봐야 조금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내, 수호수 열매가 묻힌 자리에서 황금빛 가루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면서 전체 알림이 이어졌다.

[반경 1,000m 이내가 안전지대로 설정됩니다.]

수호수가 아직 자라나지도 않았는데 안전지대가 벌써 설정되었다.

일반적인 수호수가 아니라 황금 수호수라서 그런 거 같다.

씨앗 주제에 상당히 기특했다.

'안전지대의 경계가 명확히 머릿속에 그려지네.'

내 머릿속에 작은 지도가 펼쳐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파종꾼에게는 여러 가지 혜택이 주어지는 것 같았다.

'빨리 72시간이 지나면 좋겠다.'

흐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싱글벙글 웃으며 집으로 돌아와 보니 신일그룹 최익환 회장의 비서가 우리 집을 찾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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