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86화
경기도 양평군을 관리하는 GM들은 상당히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워라밸 추종자인 키하엘이 무척이나 부러워하는 지역의 GM이 바로 양평군 GM이었다.
한국맵의 핵심 지역이라 할 수 있는 경기도에 속해 있어서 인원은 비교적 많은데, 양평군에서는 이렇다 할 이벤트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양평군에는 도합 네 명의 GM이 있었는데 1번 GM은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는 쿠들리였다.
쿠들리는 양인족(羊人族)으로서, 머리에 양의 뿔이 돋아나 있고 새하얀 양털이 자라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는 최근 몸단장을 게을리하는 바람에 온몸이 털로 덮여 있는 상태였다.
"여기는 천국이로구만."
실무에서는 손 뗐다.
그냥 평화롭게 하루하루 간식이나 먹으면서 보내면 된다.
원래 일은 아래 애들이 하는 거 아니겠는가.
이렇게 시간만 죽치다 보면 빵빵한 연금과 함께 풍족한 노후 생활을 즐길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서대문구 GM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으음, 나는 잘 모르네, 4번 GM이랑 얘기해 봐."
귀찮을 거 같으면 나는 잘 모른다가 최고였다.
그런데 오늘은 그게 통하지 않았다.
"뭐? 양평군에 서울시급 시나리오랑 관련된 것이 숨겨져 있었어?"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픈베타 서버인 지구에서 한국맵은 상당히 중요한 맵이다.
SSF가 최초로 상용화된 서버이기도 했고.
"잠깐만 있어 봐. 확인을 해볼 테니."
그는 시력이 꽤 나쁜 편이어서 한참 동안이나 안경을 찾아야 했다.
오랜만에 일을 하려니 인터페이스가 손에 익지 않아 한참을 허둥댔다.
"그래, 기록이 남아 있네. 그래. 분명히 '수호자의 반지'를 획득했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보상 중에 최고의 것을 얻은 모양인데…… 이게 왜 서울시급 시나리오랑 관련이 있나?"
키하엘은 더 이상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곧바로 세르찬에게 보고를 올렸다.
"수호자의 반지를 획득했다고 합니다. 1시간 뒤, 그걸 공개할 예정 같네요."
"신분 확실히 파악하고, 접촉할 준비해. 한국 국정원의 마리아 쪽에도 정보 공유하고."
서울시의 GM들은 바빠졌다.
운 나쁘게(?) '제4 시나리오'와 깊은 관련이 있는 서대문구 GM들이 제일 그랬다.
그리고 키하엘이 두더지맨을 찾았다.
두더지맨은 정체불명의 플레이어 '들끓었던 전우애'와 함께였다.
"이봐. 너희가 얻은 게 수호자의 반지지?"
* * *
나는 의외였다.
대검 라칸의 무덤에 히든 던전이 숨겨져 있었고, 그걸 클리어했다는 건 물론 내 스스로도 상당히 고무적이고 기쁜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게 키하엘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심지어 오늘은 토요일인데?'
저 워라밸 중독자 키하엘이 주말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키하엘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자. 간단하게 설명해 줄게. 그 아이템은 지구 서버의 누군가를 위해 안배되어 있던 거야. 시스템적으로."
내가 획득한 아이템은 '수호자의 반지'였다.
나는 이 반지에 대해 잘 알았다.
이 반지는 회귀 전 우리 팀의 탱커였던 최강벽이 사용하던 아이템이었으니까.
"서울시에는 제4 시나리오라는 게 있어. 어떤 미친놈이 방송으로 공개하기는 했는데 알고 있어?"
두더지맨이 대답했다.
"아, 압니다! 김철수 님 방송으로 봤어요."
"그래. 그거."
얘는 내가 김철수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그 시나리오는 지구인을 위한 시나리오가 아냐. 지구 서버를 침략할 침략자를 위한 시나리오였거든."
제4 시나리오는 결국 '공공의 적'을 만들어내는 시나리오다.
지구인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더욱 결속하며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의 발판을 만들어주는 시나리오.
키하엘은 늘 말하고 다녔다.
어떤 미친놈이 홀라당 해먹었다고.
"반대로 너희가 클리어한 건, 지구 서버를 지켜낼 영웅들이 클리어했어야 했거든. 원래 설정이 그랬어."
제4 시나리오에는 두 가지 줄기가 존재했다.
1. 침략자(공격자)를 위한 안배.
2. 그리고 침략자를 막아낼 영웅(수비자)을 위한 안배.
그런데 본래 침략자를 위한 안배를 차진혁이 먹어버렸다.
결국 관리자들은 야근을 밥 먹듯이 해가며 설정을 조금 손볼 수밖에 없었다.
"두 개의 설정을 열심히 손봤어. 반대로 말이야."
타 서버 플레이어가 먹었어야 할 것을 차진혁이 먹었으니, 반대로 '영웅'이 먹었어야 할 것을 타 서버 플레이어가 먹는 것으로 세부내용을 조정한 것이었다.
"근데 그걸 또 지구의 플레이어가 먹어버린 암담한 사실이지."
이대로면 시나리오 자체가 망가지게 생겼다.
키하엘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얻은 거야?'
김철수라고 해도 이걸 얻기는 힘들 텐데.
그가 파악하기로 김철수는 지금 제 방에서 빈둥거리며 누워 있다.
'그놈도 워라밸을 몹시 중시하는 놈이니까.'
김철수 하나로도 머리 아픈데 갑자기 무슨 '들끓었던 전우애' 같은 미친놈이 튀어나온단 말인가.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지만 수습은 해야 했다.
"그러니까 제안하지. 너희가 얻은 수호자의 반지를 팔아주면 좋겠는데."
들끓었던 전우애(차진혁)가 대답했다.
"싫어."
"뭐?"
"그렇게 무게 잡으면서 말하면 누가 팔 줄 알고."
"안 팔아. 돌아가."
"내가 하는 게 제안으로 보여?"
"방금 네 입으로 제안이라며."
키하엘은 주변을 살폈다.
"방금까지는 그랬지."
주변에 목격자는 없었다.
'죽여서라도 회수한다.'
그러려고 했는데 성가신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찾았다! 두더지맨! 우리 구면이죠! 반가워요! 어휴, 겨우 찾아냈네."
민하TV의 강미나였다.
그녀는 실시간 방송 중이었다.
"거봐요, 우리 민둥이들, 내가 찾는다고 했죠?, 헤헷, 후원 감사합니다. 네에, 감사합니다. 어떤 걸 얻었는지 확인해 볼게요!"
키하엘은 차진혁을 죽일 수 없었다.
* * *
"흐흐흐."
나도 모르게 웃었다.
식탁 건너편에 앉은 엄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좋은 일들이 자꾸 생기네요."
내 말에 엄마도 활짝 웃었다.
내게 기쁜 일이 있다니, 엄마도 무척 즐거운 모양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방으로 돌아와서 의자에 앉았는데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온다.
"말하자면 창과 방패라는 거지?"
침략자를 위한 창.
영웅을 위한 방패.
그 두 개를 내가 다 먹어버렸다는 소리다.
'키하엘 덕분에 제4 시나리오에 대해서 완벽하게 파악했네.'
서울시 제4 시나리오 '경외받는 자.'
내가 예전 우클라 서버에서 경험했던 그 시나리오와 똑같았다.
'그러니까 그때는 내 포지션이 침략자였었던 거지?'
그때 제대로 된 클리어를 하지 못했고 완벽한 침략자로 거듭나지는 못했던 기억이 난다.
'결과적으로는 패배해서 쫓겨났었지.'
결국, 우리는 우클라 서버를 점령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우클라의 영웅, 제논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서버 침략자가 나타나고 그들을 막는 영웅이 등장하고.
참고로 지구에서도 이와 비슷한 시나리오가 전개됐었다.
우리도 침략자와 맞서 싸웠었던 기억이 난다.
'이 수호자의 반지는 최강벽이 획득했었던 거고.'
당시 침략자는 '경외받는 자' 시나리오를 수행하고 있었던 거고, 우리는 그에 맞서 싸우는 방어군 입장이었었다.
그때 일약 영웅으로 떠오른 사람이 바로 벽왕, 최강벽이었다.
'그렇게 되는 거구나.'
"그러니까 내가…… 최강벽이 먹었어야 할 아이템을 먹어버린 거네?"
나는 히죽 웃었다.
최강벽한테 미안한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러길래 잘 좀 하지."
뛰어난 플레이를 선보인 사람이 좋은 아이템을 먹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내가 최강벽보다 뛰어난 플레이를 했으니까, 수호자의 반지를 획득한 건 지극히 당연한 이치였다.
"걔도 빨리 강해지면 좋겠네."
공격자였던 나와 수비자였던 최강벽의 경쟁.
이 '모순 경쟁'은 끝나지 않는 논쟁거리였다.
아무리 봐도 내가 이겼는데, 어떤 놈들은 최강벽이 이겼다고 했다.
이번 생에는 내가 확실히 이길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흐흐흐."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설레기 시작했다.
* * *
키하엘은 별다른 수확 없이 돌아왔다.
"하아. 지구 서버 시나리오가 왜 이렇게 꼬이냐?"
김철수 하나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거기에 '들끓었던 전우애'라는 놈까지 튀어나왔다.
"여수검객, asd~ 어쩌고, 들끓었던 전우애까지."
오픈베타 서버에서는 보여줄 수 없는 기량의 플레이어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건 GM들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수준이었다.
세르찬이 키하엘의 등을 토닥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나마 수호자의 반지가 김철수에게 넘어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하자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제4 시나리오는 시스템이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나리오 아닙니까?"
시스템이 분명 제4 시나리오를 어떤 식으로든 변경하여 진행할 거다.
그렇게 되면 중간에서 죽어나는 건 GM들이 될 거다.
수많은 변수들이 발생할 거고, 그에 따라 야근이 늘어나게 될 테니까.
세르찬이 말했다.
"신나지 않냐?"
"……이게 신납니까?"
"이런 경험은 흔치 않다고. 잘만 마무리하면 관리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게 될 거야."
……진짜 나랑 안 맞는군.
키하엘은 터덜터덜 걸어서 의자에 앉았다.
토요일이건만 오늘도 일을 하게 생겼다.
* * *
차진혁은 시간이 아까웠다.
"황금 같은 주말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지."
토요일도 이제 4시간밖에 안 남았다.
알차게 써야 했다.
일단 송하영과 한세린, 강미나를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인사해. 한세린과 강미나는 구면일 거고. 이쪽, 송하영은 처음 보지?"
이 셋의 조합이면 '서울시 제4 시나리오'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끌어모을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아무래도 이 시나리오는 나를 위해 준비된 시나리오 같으니까.'
키하엘이 들으면 심하게 욕 하긴 하겠지만, 차진혁은 그런 기분이었다.
침략자와 영웅.
두 포지션의 퀘스트들을 모조리 먹어 치우면 얼마나 재미있을지 벌써부터 두근거렸다.
"셋이 협력해서 정보를 좀 모아줘."
송하영이 물었다.
"근데 이 작업에 스트리머가 왜 필요한데?"
"조금만 삐끗해도 관리자들이 튀어나와서 훼방 놓는 중요 시나리오라서. 방송 중 아니면 죽이려 들지도 몰라."
"……."
"상당히 고된 작업이 될 수도 있어."
어렵다는 말에 셋 다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차진혁은 저 마음을 아주 잘 알았다.
'역시 어려워야 깨는 맛이 있는 거지.'
그는 세 명에게 '제4 시나리오'에 대한 조사를 부탁하고서 곧장 목동으로 향했다.
거기 강한 마물이 등장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니까.
'짜증 나네.'
목동에 강한 마물 따위는 없었다.
끽해야 레벨 40~50대 마물이 전부였다.
시간만 버린 기분이었다.
"하아."
꿀꿀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던 길, 차진솔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빠, 억울해 죽겠어.
"뭐가?"
-우리 헤이리 마을에서 쫓겨났어.
차진혁의 팀원들은 늘 그렇듯 파주 헤이리 마을에서 팀워크를 쌓으며 수련 중이었다.
예전에는 고전했었던 필드 보스몹 '검은 불곰'을 이제는 쉽게 사냥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필드가 아니라 숨겨진 던전들을 탐사하던 중이었다.
-어떤 미친놈들이 헤이리 마을을 독점하겠대. 그러면서 우리를 기습했거든?
"그래서?"
-숫자에서 너무 밀렸어. 우리는 던전 클리어 직후라서 체력적으로도 불리했고.
김정현은 목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었고, 목재현은 팔 하나가 잘렸다.
-진짜 죽을 뻔했어.
서지아와 서지수가 그들을 빼내어 필사적으로 탈출하다가 다리를 크게 다쳤다.
그걸 치료하느라 차진솔도 세 번이나 혼절했고.
"그래서?"
-응?
"졌다고?"
차진혁은 무척 기분이 나빠졌다.
전화를 끊은 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직 주말이다."
차진혁은 재빨리 파주로 향했다.
각성명, '들끓었던 전우애'가 헤이리 마을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