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85화
나는 짧게 설명했다.
"많은 요소들은 둘째 치고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몸의 감각이었죠. 룰 브레이커가 딱 이런 방식으로 저한테 저항했었거든요."
머리로 익힌 건 금방 까먹는다.
근데 몸으로 익힌 건 잘 안 잊어버린다.
다른 사람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나는 유독 그런 편이다.
"룰 브레이커의 저항 방식과 아주 똑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룰 브레이커는 서울시 제4 시나리오와 관련된 아이템이었다.
여러 가지 정황을 대검 라칸 또한 해당 시나리오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적용 업적을 바꿨습니다."
나는 시청자들을 위해 캡처화면을 하나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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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클리어(잔해더미에서 피어난 희망)]
희망없이 무너진 곳에서 하얀 꽃을 피웠다.
이제는 꿈을 꿀 수 있으리.
업적 효과 : '서울시 제4 시나리오'와 관련이 있는 모든 아이템들의 굴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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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성 없는 업적이라 약간 실망했었는데, 이렇게 또 쓰일 줄은 몰랐네요. 운이 좋았습니다."
나는 '대검 라칸'을 들어 올렸다.
내 예상이 맞았다.
이놈은 '서울시 제4 시나리오'와 관련이 있는 아이템이었고, 한 번에 굴복시킬 수 있었다.
"가볍습니다."
크기는 엄청나게 거대하지만 중력마법이 걸려 있어서 상당히 가벼웠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내 단도랑 무게가 비슷한 수준이었다.
"체감하는 무게는 단도랑 비슷한데 파괴력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군요."
어디론가 뛰어갔던 뮬리누스가 갑자기 나타나 내 팔에 포션을 콸콸 쏟아부었다.
화상에 아주 좋은 거라나 뭐라나.
확실히 효과는 뛰어난 것 같았다.
화상이 금방 치유되고 새살이 돋아났다.
아, 이러면 시각적 효과가 떨어지는데.
"왜 하나도 안 고맙단 느낌이지?"
"아냐 고마워."
"하나도 안 고마운 얼굴인데?"
팔이 좀 너덜너덜하고 그래야 방송각이 살 거 같은데 좀 아쉽게 됐다.
"고맙다니까. 뮬리누스. 내가 이 검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
"사용할 수 있겠냐? 설명 안 읽었어?"
나는 곧바로 참고자료를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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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계열 직업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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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가 이걸 사용할 수 있게 조작을 좀 해도 되겠어?"
대장장이들은 자기가 완성한 무구를 누군가가 마음대로 손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얘가 허락하든 말든 내가 알아서 할 거긴 하지만 그래도 물어는 봤다.
뮬리누스와의 호감도를 유지하기 위한 밑작업이었다.
얘는 덩치는 산만 한데 약간 쫌생이 스타일이니까.
"조작을 한다고? 네가?"
"어."
"상관없어. 어차피 내 작품도 아니고."
이건 그냥 시스템이 시켜서 만든 '가짜'니까.
그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본인의 장인정신이 들어가지 않은 작품이라 애정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저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 여기서 바로 해보겠습니다."
나는 '룰 브레이커'를 꺼내 들었다.
룰 브레이커로 대검 라칸을 힘차게 내리쳤다.
까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룰 브레이커의 능력이 적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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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계열 직업 전용) (룰 브레이커의 주인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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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아쉽게도 벌써 금요일이네요. 주말은 푹 쉬었다가 본격적인 사용은 월요일에 해보겠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방송을 종료했다.
이제 토요일이다.
* * *
나는 양평으로 향했다.
"이 어디쯤이었는데."
오늘따라 한세린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이미 수십 차례 들어가 본 던전인데 찾기가 쉽지 않았다.
마치 길치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평소보다 시간이 좀 오래 걸렸습니다. 입구를 찾는 데 좀 걸렸네요."
방송은 끈 상태지만 방송을 하는 것처럼 플레이에 임했다.
나는 스트리머니까.
검술가가 허공에 검을 휘두르며 연습을 하는 것처럼, 스트리머도 늘 준비된 상태로 연습을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솔직히 재미있기도 하고.
"들어가 보겠습니다. 솔로잉이라니. 벌써부터 두근두근한데요."
[던전, '대검 라칸의 무덤'에 입장합니다.]
이미 여러 차례 들어와 본 것이지만 팀원들과 함께할 때와 혼자 들어올 때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응? 그런데 누가 있네요?"
안전지대에 누가 들어가 있었다.
이미 '대검 라칸'은 소환된 상태.
나도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안전지대에 진입했다.
'두더지맨?'
아, 알겠다.
한세린한테 엄청 자극받은 모양이다.
대외적으로 이곳은 '한세린의 비밀스러운 안내' 덕분에 클리어할 수 있었던 곳이니까.
'한세린이 할 수 있으면 나도 할 수 있어야 해, 뭐 그런 건가?'
길잡이의 힘으로 클리어할 수 있는 곳이라 밝혔으니 얘도 그걸 해내고자 여길 찾아온 것 같았다.
그때, 두더지맨이 말했다.
"불운한 플레이어여.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다, 두지."
"두더지맨?"
"그렇다, 두지."
"여긴 왜 온 거죠?"
"내 숙적이 여길 길잡이의 힘으로 클리어했다고 한다, 두지.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두지."
다중인생으로 신분을 조작했고, 대외적으로 우리 둘은 처음 보는 사이다.
그런데 얘가 반말하길래 나도 그냥 반말하기로 했다.
"그래서 여길 혼자 왔다고?"
"그렇다, 두지."
확실히 미친놈이다.
아무리 그래도 여길 혼자 들어오다니.
"그러다 죽으면 어쩌려고?"
"때로는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있기 마련이다, 두지."
아, 뭔지 너무 잘 알지.
그렇지만 본업이 스트리머인 나는 인터뷰를 하듯 물었다.
"그게 뭐냐?"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두지."
"그것도 살아 있어야 의미 있는 거 아니냐?"
"그렇지 않다, 두지. 패스파인더가 이룩한 것을 나는 이룩하지 못하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나는 숨 쉴 가치도 없는 쓰레기다, 두지.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두지."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우리 애들도 저렇게 필사적이고 결연한 마음을 가지면 더 강해질 수 있을 텐데.
"감동적이군."
"나를 이해하나, 두지?"
"물론이다."
"아주 뛰어난 자질의 플레이어군. 직업이 뭐지? 스트리머인가, 두지?"
하마터면 맞다고 대답할 뻔했다.
"아니. 검술가다."
나는 대검 라칸을 꺼내 들었다.
"그, 그, 그, 그 검은?"
"그래. 저놈과 같은 거지."
나는 두더지맨에게 작게 말해주었다.
"팀 단위 클리어보다 듀얼 플레이 클리어가 훨씬 더 가치 있겠지?"
"두, 두지?"
"단둘이서, 여기 한 번 깨보자."
깊은 감명을 받은 만큼, 얘한테 선물을 주기로 했다.
나는 안전지대 밖으로 나가 '대검 라칸'과 싸우기 시작했다.
* * *
차진혁은 알고 있었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필패.'
힘 대 힘으로 싸우면 진다.
레벨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기본적인 피지컬이 너무 뒤처졌다.
그러나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건 단순한 피지컬이 아니었다.
"무기의 성능은 같습니다."
같은 무기를 더 뛰어난 육체의 상대가 사용한다.
"그러나 패턴이 단순한 편에 속하고 공격이 단조로운 편이죠."
대검과 대검이 부딪쳤다.
깡-!
고막을 울리는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저놈의 본체는 바로 검입니다."
'육체'를 공략하는 건 의미 없다.
검을 공격하는 것이 훨씬 유의미한 결과를 이끌어낸다.
깡-!
깡-!
검과 검이 계속해서 부딪쳤다.
그때마다 차진혁의 몸이 뒤로 밀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차진혁의 열세였다.
"똑같은 자동차가 부딪쳐도 어떤 자동차는 반파되고 어떤 자동차는 멀쩡하거든요. 그건 부딪치는 각도의 차이 때문입니다."
차진혁은 단순히 공격을 받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검날로 검면을 때리고 있었다.
[스킬, '보다 예리하게'를 사용합니다.]
"파괴력과 속도가 저보다 월등하므로 강력한 검술 계열 스킬을 사용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럴 때 빛을 발하는 건 기본기 싸움이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검날을 날카롭게 만들어 놈의 검면을 공략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패턴은 이미 익혔다.
놈의 공격에 맞으면 죽겠지만, 안 맞으면 된다.
차진혁은 혼자서 상당히 오랜 시간 대검 라칸과 맞서 싸웠다.
대검에 쩌적- 금이 가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와장창 깨져 버렸다.
['대검 라칸'을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레벨 61을 달성하였습니다.]
차진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게 진짜 되네?'
될 거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진짜로 해내자 가슴이 떨렸다.
레벨 격차가 거의 20 가까이 나는 보스몬스터를 솔로잉으로 사냥했다.
그의 온몸에 전율이 넘쳐흘렀다.
'이 맛이지.'
황홀감이 그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쾌락이 넘실거리는 강물에 몸을 맡긴 느낌이었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두더지맨은 눈물을 흘렸다.
"감동적이다, 두지!"
두더지맨이 차진혁의 몸을 끌어안고 기뻐했다.
비록 그 스스로는 활약하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잉이라는 기적을 눈앞에서 봤다.
그것이 두더지맨에게 커다란 영감을 가져다주었다.
[솔로잉으로 인정되었습니다.]
[히든 피스, '다시 한번 맞이한 대검의 죽음'을 달성하였습니다.]
쿵!
대검 라칸이 조종하고 있던 육체가 쓰러졌다.
이내 모든 구멍에서 불길이 높이 치솟아 올랐다.
'여기 히든 피스가 있었어?'
솔로잉을 성공하면 히든 피스가 생성되는 것 같았다.
높이 치솟은 불길이 이리저리 휘어지는가 싶더니 쓰러진 육체를 집어삼키고서 활활 타올랐다.
점차 재가 되어 사라져가는 듯했다.
두더지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놓칠 수 없다, 두지!"
두더지맨이 타오르고 있는 시체 쪽으로 뛰어갔다.
"나는 장갑을 끼겠다, 두지!"
불에 저항할 수 있는 장갑을 낀 그는 라칸의 육체를 마구 헤집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작은 마력 구슬 같은 것 몇 개를 꺼내더니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여긴가?"
구슬을 구멍에 집어넣었다.
불길이 치솟던 그곳에서 오색찬란한 빛깔의 빛줄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완성이다, 두지!"
아까 불기둥이 솟구쳤던 것처럼, 7개의 빛줄기가 치솟아 올랐다.
이내 불길과 같은 모양새로 이리저리 휘어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산산조각이 난 대검을 덮었다.
대검의 조각들이 두둥실 떠올랐다.
오색찬란한 빛에 닿은 조각들이 모래처럼 바스러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작은 게이트가 하나 생성되었다.
[히든 던전, '대검을 묻은 자'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두더지맨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나는! 패스파인더가 찾지 못한 걸 찾아냈다, 두지."
차진혁 또한 매우 감동받은 눈으로 두더지맨을 바라보았다.
두더지맨의 움직임은 필사적이었다.
바로 앞에 와닿은 히든피스를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가, 차진혁을 경탄하게 만들었다.
플레이에 진심인 저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두더지맨이 차진혁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히든 던전이다, 두지. 함께 하겠나, 두지?"
"물론."
두 사람은 모종의 전우애 같은 것을 느꼈다.
차진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두더지맨과 함께 히든 던전에 진입했다.
[히든 던전, '대검을 묻은 자'에 입장합니다.]
같은 시각.
패스파인더 한세린은 수많은 매체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네. 물론이죠. 저는 두더지맨이 시도조차 하지 못한 대검 라칸의 무덤을 클리어했습니다. 길잡이의 힘으로 말이죠. 두더지맨과 제 현격한 격차를 증명한 셈입니다. 음, 글쎄요. 당분간 두더지맨이 저보다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기는 힘들 거라 생각합니다. 만약 라칸의 무덤에 제가 찾지 못한 히든 피스나 이중 던전 같은 게 존재하는 게 아니라면요."
한세린은 기분 좋게 웃었다.
"아, 하나 더 있네요. 두더지맨이 저희 팀보다 훨씬 적은 수의 인원으로 그곳을 클리어하는 것을 증명한다면, 그가 저보다 뛰어난 길잡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이거야말로 정말 가능성이 없는 일이다.
우리 팀에 차진혁 있거든요. 후후.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예, 물론이죠. 두더지맨을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전혀 전혀 전혀 신경 안 쓰는 편입니다. 두더지맨은 절 신경 쓸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몇 시간 뒤.
두더지맨의 SNS에 반박글이 올라왔다.
-대검 라칸의 무덤에는 히든 피스가 존재한다. 나는 그걸 클리어하고 온 길이다, 두지.
그것도 무려 듀얼 플레이로. 단둘이서 그곳을 클리어하고 나왔다. 네가 말한 모든 걸 내가 다 이루었다. 랭킹보드를 확인해 보기를 바란다, 두지.
캡처 사진도 올라와 있었다.
길잡이 계열 랭킹 1위는 다시 두더지맨이었다.
-여기서 뭘 얻었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엄청난 걸 획득했다, 두지. 1시간 뒤 공개하겠다, 두지.
사람들이 보상에 대해 궁금해하는 가운데, 오히려 난리가 난 건 GM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