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73화
서지수가 내게 작게 물었다.
"저 사람, 믿어도 되는 거야?"
"뭔가 수상해 보이긴 하지?"
솔직히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모양새이기는 하다.
이름은 두더지맨인데 솔직히 너구리맨이라고 해야 할 거 같다.
너구리 형상의 동물 의상을 입고 있었다.
말이 좋아 동물 의상이지 무슨 거적때기를 걸친 거 같기도 하고.
근데 또 앞발(?)은 두더지처럼 변해 있었다.
"너구리와 두더지의 혼종인 거 같은데, 믿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나는 두더지맨의 실력은 믿는다.
한국 길잡이계를 이끄는 쌍두마차 중 한 명이 될 테니까.
"저 수상한 사람 아닙니다."
양손을 흔들었다.
도톰한 앞발을 흔들어대는데 발톱이 꽤 날카롭게 자라 있었다.
원래 두더지가 앞발에 저렇게 날카로운 발톱이 있나?
아무튼 우리 팀원들이 수상하다, 어쨌다, 믿어도 되냐, 의문을 제기해 주는 덕분에 내 방송은 순조로이 잘 진행되어갔다.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의견이 모여야 다채로운 연출이 가능해지니까.
차진솔이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지금 그런 거 신경 쓸 때야? 우리, 뒤처지게 생겼어."
그 말에, 서지수의 눈빛이 흔들렸다.
서지아가 내게 말했다.
"오빠는. 믿어요?"
"저 사람의 실력은 믿어도 될 것 같은데."
"그럼 나도 믿을게."
겉으로 표현은 거의 안 해도, 서지아 또한 한세린 팀에게 패배하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애들 승부욕이 장난이 아니네.
뿌듯하다, 뿌듯해.
"정현이 넌 어떻게 생각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입니다. 보통의 방식으로…… 패배할 거라면…… 기이한 방식을…… 써야겠죠."
"찬성입니다, 한 마디로 하면 될 걸 답답하게도 한다."
"고쳐…… 보겠습니다."
그런데 목재현은 영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형, 우리 목표는 형 아이템을 제대로 사용해 보는 거였잖아요."
"그랬지?"
"예정에도 없이, 갑자기 합류한 길잡이랑 함께 플레이한다는 건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잖아요."
서지수가 목재현의 머리에 꿀밤을 놓았다.
"야, 던전은 원래 급작스러운 곳이야."
"누, 누나도 저 사람 수상하다면서요?"
"다시 보니 꽤 귀여워."
귀엽다는 말에 두더지맨이 시선을 옮기며 검지손가락으로 볼을 긁었다.
아, 잊고 있었는데 쟤는 귀엽다는 말에 약하다.
어디 하나 나사가 풀린 것 같은 놈이다.
"팀원들의 의견이 하나로 모여졌군요."
"혀, 형, 저는 아직……!"
말은 저렇게 해도 목재현은 기쁠 거다.
나는 요즘 눈치가 많이 늘었다고 자부한다.
중계자의 시야로 확인 안 해봐도 된다.
분명히 목재현도 좋아하겠지.
그저 모두가 예를 외칠 때 아니오를 말해줄 사람이 한 명쯤 필요하니까, 그래서 저런 스탠스일 거다.
"좋습니다. 두더지맨. 함께 가죠."
"혀, 형……!"
우리는 완벽한 만장일치로 두더지맨과 합류를 결정했다.
* * *
두더지맨은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
"두더지맨 나가신다, 두지."
플레이에 진입하니 자꾸 두지두지 거린다.
예전에도 이해 안 됐는데 다시 봐도 이해 안 된다.
저게 무슨 컨셉질인지는 모르겠다.
"뿌린다, 두지!"
두더지맨은 부패한 미이라의 틈바구니를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니면서 특정 미이라들의 몸에 파란색 칠을 뿜었다.
나는 중계를 이어갔다.
"두더지맨이 스프레이 같은 걸로 숫자를 쓰고 있습니다. 파란색 스프레이로 1부터 7까지 표시를 했군요."
슥- 보아하니 다른 애들은 저게 뭐하는 건지 잘 모르는 듯했다.
"아마도 사냥 순서를 쓴 거 같은데요."
나는 알고 있는 공략이다.
강남 신세계 백화점의 미이라들을 모조리 섬멸하면 각 층의 '열쇠'를 획득할 수 있다.
느리지만 확실한 방법이다.
그렇지만 특별한 미이라들을 어떤 순서에 맞춰서 사냥하면 모든 개체를 사냥하지 않아도 '열쇠'가 생성된다.
"우리는 그럼 저 순서에 맞춰서 사냥을 한번 시작해 보죠."
내 말을 들은 애들이 알아서 흩어졌다.
내가 일일이 다 짚어주지 않아도 어느 정도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좀 아쉽네.'
예전에 군주 역할을 톡톡히 해낼 때 진짜 즐거웠었는데.
아무래도 더 강한 놈이 나타나야 그걸 할 수 있을 거 같다.
지금은 애들에게 그냥 맡겨놓기로 했다.
"이제 한 마리 남았군요."
나는 애들에게 감탄했다.
솔직히 나는 애들이 몇 번은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파주에서 진짜 열심히 합을 맞췄나 보다.
그것도 아니면 질 수 없다는 사명감에 초인적인 힘을 뿜어내는 거 같기도 하고.
"일곱 마리째 사냥에 성공했습니다."
그사이, 두더지맨이 거적때기를 휘날리며 어딘가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두다다다다."
"의태어를 육성으로 내뱉는 게 보편적인 모양새는 아니군요."
어딘가로 사라졌던 두더지맨은 오른손에 열쇠를 들고서 이쪽으로 뛰어왔다.
"열쇠를 찾았다, 두지!"
아.
그리고 열쇠를 찾게 되면 완벽한 어그로가 끌리게 된다.
이 층에 존재하는 모든 미이라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뛰어오게 된다.
"모두, 에스컬레이터로 뛰어라! 두지! 그리고 열쇠는 제일 강한 사람에게 맡길게, 두지!"
내가 손을 내밀려고 했는데 두더지맨은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서 김정현에게 열쇠를 내밀었다.
'어?'
나를 지나가?
김정현을 줘?
"뭐해! 뛰어, 두지!"
두더지맨이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빨리 뛰어야 한다, 두지. 흥분한 미이라들은 일반 미이라들보다 훨씬 빠르다, 두지."
"잡아당기지 마. 화면 초점 흔들린다."
"방송 중요한 거 안다, 두지. 그렇지만 목숨이 먼저다, 두지."
얘는 내 경고를 무시하고 자꾸 나를 잡아당겼다.
'하아.'
무슨 좀비 떼처럼 나를 향해 달려오는 미이라들을 촬영했다면 훨씬 좋은 엘튜브각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얘 때문에 망했다.
적이었다면 저 손목을 잘랐겠지만 그래도 아군이라 그럴 수는 없었다.
이따가 차분히 설명해 줘야겠다.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습니다. 미이라들은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군요. 3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상당히 길고, 시간이 꽤 오래 소요될 거 같습니다. 재정비 시간이 필요할 거 같으니 잠시 방송 쉬었다 가겠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야, 두더지맨. 나 좀 보자."
얘 기준에서 지금은 플레이 타임이 아닌가 보다.
말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후후, 고맙다는 인사는 넣어둬도 됩니다. 저는 스트리머를 보호하는 것도 길잡이의 임무 중 하나라고 생각하거든요."
얘는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2층을 클리어하는 데까지 도합 2시간 49분 33초 소요되었습니다. 어디 보자…… 패스파인더 팀은 2시간 22분 4초 걸렸고요. 본래 1시간가량 차이가 벌어져 있었는데 이제 30분 안쪽으로 줄였…… 응? 왜 그러시죠?"
감히 내 방송을 망쳐?
이건 선 넘었지.
* * *
한국맵 마이너 갤러리.
줄여서 한마갤에 접속자가 밀려들었다.
소통이 불가한 차진혁의 방송에서, 소통을 위해 모여든 유저들이었다.
- 한세린이 길잡이 공식 랭킹 1위임. 게다가 시작도 훨씬 빨랐음. 이건 이미 졌다고 봐야 한다.
┗ 2층 클리어하고서 시간 30분 가까이 줄인 건 안보이누?
┗ 그거야 2층에는 '부패한 미이라'밖에 없으니까 가능한 거죠. 민하TV 보면 3층에는 미이라 나옵니다. 2층에서야 저렇게 빠르게 사냥해서 넘어가는 게 가능했다 치더라도, 3층에서도 저 방식이 먹힐 것 같나요? 2층에서 줄어든 격차는 다시 벌어질 게 확실합니다. 백번 양보해서 시간을 많이 줄인다고 해도,
┗ 뭐라는지 아시는 분?
┗ 보기 드문 장문충일셐ㅋㅋㅋ
┗ 글자 수 제한 걸린 거 실화냐 ㅋㅋㅋ
유저들은 한세린의 팀이 이길 것을 거의 확실시했다.
-두 팀의 클리어 방식에서 태생적 한계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아셨겠지만 지구 서버의 '강남 신세계 백화점 던전'의 모티브는 이미 수많은 서버에서 등장했었던…… 하여…… 하고…… 많은 분들이 정석 공략은 김철수 팀. 지름길 루트는 패스파인더 팀이죠. 결국 시간 싸움으로 가면 민하 팀이 이길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글 작성자: 백과사전
┗ 오오 사전느님 강림하셨다.
┗ 사실 나도 김철수팀 응원했는데 이건 진짜 어쩔 수 없는 듯?
억울한 사람도 있었다.
┗ 아니, 나보다 더 장문이잖아요. 왜 반응이 다른 거죠? 결과적으로 똑같은 얘기했잖아요.
┗ 항의마저 쌉노잼인 거 실화냐?
┗ 너는 듣보고, 저분은 사전느님이고. ㅇㅋ?
한편,
한세린은 전의를 불태웠다.
무조건 빨라야 했다.
'빠른 길을 찾아야 해.'
3층에는 부패한 미이라가 아닌 일반 미이라들이 존재했다.
부패한 미이라보다 훨씬 빨랐고, 공격 하나하나가 치명적이었다.
"싸움은 최소화해야 해요."
진행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희생도 있어야 했다.
"탱커 한 명을 희생해서 길을 뚫죠. 누가 하실래요?"
"저 죽음면역을 갖고 있어요."
"좋아요."
탱커 한 명이 나서서 희생했다.
미이라들이 탱커에게 달려들었다.
미이라들은 탱커를 산 채로 뜯어먹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제아무리 죽음 면역이 있다고는 해도 그 고통은 진짜였다.
민하TV의 강미나는 재빨리 19금을 걸었다.
'와, 진짜 잔인하네.'
너무 자극적이어서 그냥 송출했다가는 노란 딱지 붙을 것이 틀림없었다.
한세린이 강미나의 등을 툭 쳤다.
"빨리 따라와요. 미이라의 밥이 되고 싶지 않으면."
"잠깐만요. 우리를 위해 희생한 영웅인데 1초라도 더 담아야죠."
그들은 4층으로 향했다.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탄 한세린은 타이머를 확인했다.
'3시간 8분 만에 돌파.'
제아무리 두더지맨이 합류했어도, 이 속도를 쫓아오지는 못할 거라 확신했다.
'우리가 이겼다!'
* * *
"자, 잘못했습니다."
어떤 놈은 맞아야 말을 듣는다.
두더지맨이 딱 그랬다.
말로 여러 번 설명해도 안 듣다가, 몇 대 맞으니까 곧바로 고분고분해졌다.
아 진짜, 아까 연출각 놓친 거 아까워 죽겠네.
"한 번만 더 내 방송 방해하면 그때는 손모가지 날아갈 줄 알아."
"무, 물론입니다, 형님."
"차진솔 얘 좀 치료해 줘. 얼굴이 보기 좀 그래. 저 상태로 방송 나가면 좀 그렇잖아."
"아, 알겠어."
차진솔의 손길이 닿자 녀석의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 모든 일은 에스컬레이터에 타 있는 불과 30여 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오빠, 근데 방송은 왜 안 켜?"
"어차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될 거 같아서."
내가 두더지맨에게 시선을 옮겼다.
"여기 몇 층까지 있을 것 같냐?"
"제 사전조사에 따르면 5층까지 있을 거라 짐작된다, 두지."
아 뒤에 저놈의 '두지'는 거슬려 죽겠네.
하지만 나는 플레이 스타일을 존중해 주는 팀원이니까 이 정도 불편함은 감수해 주기로 했다.
'그래도 실력은 진짜야.'
얘 말대로 이곳은 5층까지 있는 던전이다.
지름길 루트로 가면 5층을 빠져나가는 즉시 클리어로 인정되고, 내가 가는 정석 루트로 가면 히든 보스를 잡아야만 클리어로 인정된다.
"방식은 똑같을 거고, 두더지맨, 네가 또 스프레이로 표시할 거지?"
"두더지맨의 두더두더뿜칠이다, 두지."
"……."
"3층 가봐야 확실히 알 수 있다, 두지."
하아.
저 컨셉질을 어디까지 용인해 줘야 하는 거지.
3층에 도착했다.
"맞다. 2층과 진행은 똑같다, 두지."
나는 아직 방송 안 켰다.
3층에는 사람도 없다.
나는 칼을 빼 들었다.
"나도 같이 싸운다."
"진짜?"
"진짜요?"
애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 근데 오해는 하지 마. 이건 진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서 나도 같이 하는 거거든?"
다들 내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한세린 팀에게 질 수 없다는 마음은 모두가 같은 모양이었다.
목재현도 웃고 있는 걸 보면 틀림없었다.
두더지맨이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미쳤구나. 두지, 스트리머가 칼질이라니. 세상이 말세다, 두지."
헤헤,
신난다.
'근데…… 내가 주말에만 이 짓을 한다고 했던가?'
생각해 보니 주말에만 이 짓을 할 필요는 없을 거 같다.
내 본업은 스트리머니까, 방송을 켰을 때에만 방송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지금 노는 것도 아니고?'
나는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이건 진짜 어쩔 수 없이 내가 직접 검을 휘두르는 거다.
그래도 명색이 우리 팀인데, 한세린 팀한테 질 수는 없잖아.
서걱!
미이라의 목을 베었다.
운 좋게 한 번에 베여 나갔다.
손맛이 짜릿했다.
"열쇠! 찾았다, 두지!"
우리는 4층으로 향했다.
4층도 난이도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비슷한 놈들이 더 많아졌을 뿐이었다.
'몇 놈만 더 베고 싶은데.'
그렇지만 몰려드는 놈들이 너무 많아서 더 이상 베지는 못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저놈들과 전부 싸워서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이 조금 치욕스러웠다.
"열쇠! 찾았다, 두지!"
5층에 도착했다.
5층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잠깐 옷 좀 갈아입을게."
혹시 몰라서, 진짜 혹시 몰라서 새 옷을 가져왔다.
방송은 좀 깔끔한 상태로 해야 할 거 같아서.
어차피 1인칭이라 큰 상관은 없겠지만 그래도 소매 끝에 피가 물들어 있으면 좀 그러니까.
5층에는 마물들이 없었다.
다시 방송을 켰다.
"3, 4층은 진행이 똑같아서 보여드릴 게 별로 없었고요. 5층에 도착한 상태입니다. 둘러보니 5층에는 마물이 없습니다. 고요한 공간이네요."
대신 저만치 앞에 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두꺼운 쇠사슬과 4개의 자물쇠로 묶여 있는 관이었는데, 안에 무언가가 있는지 세차게 들썩거리고 있었다.
"위험한 냄새가 풀풀 나는군요."
두더지맨이 털썩! 주저앉았다.
"……망했다, 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