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45화
요즘 자꾸 드는 생각이 있다.
어차피 스트리머라는 직업은 직업의 한계가 존재한다.
스트리머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 비전투 계열 플레이어다.
축구 선수가 아무리 축구를 잘해도 양궁까지 잘할 수는 없는 법이다.
시간이 흐르면 결국 전투계열 플레이어들만큼 적극적인 플레이를 즐기기는 어려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저레벨 구간들을 최대한 즐겁게 즐겨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건 인정해야 할 거 같다.
'나도 참 사람 아니다.'
* * *
* * *
* * *
나는 플레이의 재미를 포기하기 힘든 사람이다.
원래 다 그렇지 않나?
게임 그만하고 공부해야 하는데 다들 게임 하잖아?
술 그만 먹고 건강식 챙겨야 되는 거 아는데 다들 술 먹잖아?
담배 몸에 나쁜 거 아는데 잘 못 끊잖아?
내가 유독 이상한 건 아닌 거 같다.
'아직 겨우 오픈 베타 서비스 중이니까, 좀 즐겨도 될 거 같다.'
서버 전체로 보면 이제 갓 시작단계의 볼 것 없는 서버에서 아무리 잘해봐야 어차피 애송이라 별로 관심도 못 받는다.
'그래, 나 같은 애송이한테 누가 관심을 가진다고.'
아무리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유명 구단의 선수나 알지, 인도네시아나 몰디브의 유소년 축구단 유망주는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금은 1등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합리화 아니고 사실일 거다 아마도.
내 삶이 본격적으로 피폐해지기 시작했던 것은 레벨 200을 넘어가면서부터였다.
'어차피 나는 비전투계열 스트리머잖아?'
해봐야 레벨 100 이하 구간에서나 힘 좀 쓸 수 있지 그 이상은 어렵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구간을 그냥 이렇게 흘려보내는 건 좀 아쉽다
만능잡캐라는, 초반에는 아주 유용하고 번쩍이는, 유망주 특성을 갖고 있는데 말이다.
'일단 방송 콘텐츠의 질이나 수준은 현재를 유지하는 게 좋겠고.'
내가 지금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하면, 내 방송의 컨셉이 그렇게 잡힌다.
스트리머가 무쌍 찍는 채널.
그런데 이건 오래가기 힘들다.
저레벨 구간에서 은퇴할 수 있다면 너무나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생각해야 한다.
나는 이제 사람이 되었고 뒷일을 생각할 줄 아는 지성을 갖추었으니까.
'지금도 나쁘지 않으니까 유지만 하고, 내가 너무 직접적으로 플레이하는 모습은 노출하지 말아야겠다.'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그냥 방송 끄고 진행하면 될 일이었다.
'그래. 딱 레벨 100까지만!'
초보 구간에서만 가능한 거니까.
모두에게는 때라는 게 있다.
머리띠에 교복 입고 롯데월드 가는 것도 어릴 때나 즐거운 거지, 나이 먹고 그러면 좀 그렇다.
나중에 고레벨 돼서는 이 시기를 즐길 수 없다.
'아. 살 거 같다.'
마음을 결정하고 나자 청량감이 밀려들었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초보 구간에서만 예전처럼 플레이해 보기로 했다.
"좋네요. 수락하죠."
"응?"
카트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 아직 무슨 내용인지 얘기도 안 했는데?"
"괜찮습니다. 얘기를 들어보죠."
퀘스트는 원래 일단 수락부터 하고 보는 게 정석이다.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아무것도 못 한다.
나는 그렇게 성장했고, 결국 한국의 검왕이 됐다.
간만에 피가 끓었다.
'겁도 없이 카트리나의 보석상점을 털어?'
카트리나가 잠시 상점을 비운 사이 귀중한 목걸이 한 쌍을 훔쳐 갔다고 했다.
CCTV에 얼굴도 잡혔고, 카트리나가 나름의 정보망을 풀어 용의자도 특정했다.
"그럼 직접 잡으시죠?"
"오픈 베타 구간이라서 말이야. 나는 지구의 원주민들에게 직접적인 물리력을 행사하기 어렵거든. 상인협회 눈치도 봐야 하고 말이야. 게다가 괜히 일 떠들썩하게 만들면 내 물건 지키지 못했다는 신용도만 떨어질 거야. 여러모로 곤란해."
카트리나의 목걸이를 훔친 도둑에게는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카트리나가 직접 움직였으면 아마 몸통과 머리가 분리되었을 테니까.
참고로 카트리나는 돈이 아주 많고, 타 서버에 그리폰스 용병단을 운영하고 있다.
걔네한테 걸렸으면 진짜 뼈도 못 추렸을 거다.
'그립네.'
그리폰스 용병단의 용병단장이 창을 잘 썼는데.
그 창에 세 번인가 찔렸는데 무척 재미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 참고로 나는 일곱 번 찔렀다.
혹자는 내가 졌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앞구르기 하면서 봐도 내가 이긴 대련이었다.
"아무튼 부탁 좀 할게, 잘생긴 오빠."
"그러죠."
[퀘스트, '카트리나의 부탁'을 수락하였습니다.]
나는 카트리나의 상점에서 빠져나왔다.
'베르클라프 목걸이 한 쌍이라.'
이게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다.
베르클라프 목걸이는 내가 레벨 80 즈음에 우연히 얻게 되어 회귀 직전까지 착용했던 아이템이었다.
베르클라프 목걸이는 그냥 장신구다.
이것 자체로는 별다른 효과가 없는 아이템.
그런데 이 목걸이에 특별한 작업을 거친 뒤, 여섯 가지 재료 아이템을 사용하여 외눈박이 거인에게 강화를 부탁하면 훌륭한 목걸이로 재탄생한다.
'나름 사기템이었는데.'
그때의 추억들이 떠올라 기분이 좋아졌다.
생각해 보니 그때 괴롭기만 했던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름 즐거운 추억들도 많았던 거 같기는 한데…….
아, 또 이런다.
시간이 흐르니까 자꾸 과거가 미화되는 거 같은데 조심해야겠다.
아무튼 나는 그 길로 천사소녀를 호출했다.
-지금 좀 바쁜데…… 이따가 시간을 좀 정해서 만나면 안 돼요?
"던전 안이 아닌데 바쁘다고?"
통화가 된다는 건 던전 안은 아니라는 소리다.
그럼 안 바쁜 거다.
'긴고주.'
[긴고주를 발동하였습니다.]
핸드폰 너머로 으아아아악!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갈게요, 지금 가요. 제발, 그만, 그만요.
거봐.
역시 안 바빴다.
송하영이 택시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
"왜 바쁘다고 거짓말을 해?"
"거짓말 아니었어요. 진짜 바빴어요."
자꾸 자기의 억울한 사연을 말하려는 거 같길래 듣지 않기로 했다.
"억울한 사정 털어놓고 긴고주 들을래, 아니면 안 말하고 긴고주 안 들을래?"
"하나도 안 억울해요. 헤헤."
진즉에 이러면 서로 평화롭고 좋을 텐데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내가 물었다.
"혹시 얘네 알아?"
"네?"
내가 사진 몇 장을 내밀었다.
"어?"
천사소녀는 사진을 들어 올리더니 유심히 살펴봤다.
"알 거 같은데요? 이름이 뭐였더라……."
"각성명이 임꺽정이라던데."
"어, 맞아요, 임꺽정. 신림동 근처에서 활동하는 도둑인데. 이 사람은 왜요?"
"얘한테서 뭐 좀 훔쳐 와야 해서."
"훔친다고요?"
그 말에 갑자기 천사소녀가 씨익 웃었다.
훔친다는 말에 무척 설레하고 있었다.
역시 정상급 도둑이 될 녀석은 떡잎부터 미쳐 있는 것 같다.
나는 대략적인 얘기를 해주었다.
"근데 왜 굳이 훔쳐요? 빼앗아 오면 되지?"
카트리나가 처해 있는 곤란한 상황을 이성적으로 설명해 주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런 미친놈들을 다루는 법을 잘 알았다.
"훔치는 게 더 재밌잖아."
"하긴."
이럴 줄 알았다.
쉽게 납득했다.
"그럼 나한테 정식으로 의뢰하는 거예요?"
"음, 그래. 의뢰로 하자."
명령하려다가 말았다.
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니까.
무럭무럭 크도록 밥을 많이 줘야지.
"보수는 얼마 줄 건데요?"
"얼마면 돼?"
한 1억은 불러야 하려나.
"한……."
"1,000만 다이아. 그 이하는 안 돼요."
기준이 내 생각보다 너무 낮네.
최갑수 영감님이나 바람 나그네 같은 VIP들을 겪다 보니 현실감각이 좀 떨어진 건가 싶기도 하고.
"500만 다이아."
"그건 너무 적어요. 나도 나름 목숨 걸고 해야 하는데."
"700만 다이아."
"……좋아요."
700만 다이아로 확정했다.
아직 정식적인 '연합'은 형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비슷한 계열군의 직업들이 각기 모여서 세력을 형성하곤 했는데, 그게 가장 빨리 이루어지는 계열이 바로 정보/상인/도둑 계열이었다.
현재 암암리에 만들어지고 있는 도둑 계열 연합인 '흑장미 연합'의 창립멤버 중 한 명이 바로 천사소녀 송하영이었다.
"안 그래도 손 좀 보려고 했는데 잘됐네요."
신림동 근방에 '산채'라 이름 붙인 컨테이너를 제 아지트 삼고 있는 도둑이 있다.
그놈의 각성명이 임꺽정이었다.
최근 흑장미 연합에 가입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왔는데 바로 거절했다.
흑장미 연합의 도둑들에게는, 도둑들 나름대로의 룰이 있다.
아직 완전히 정립된 건 아니지만 크게 세 가지였다.
1. 노약자나 어린아이 등, 사회적 약자의 것은 훔치지 않는다.
2. 비플레이어의 물건은 훔치지 않는다.
3. 신성한 도둑질 과정에서 가급적 피를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임꺽정이라는 각성명을 쓰는 그놈은 이 세 가지를 모두 지키지 않았다.
제출된 서류에 따르면 레벨은 20 중반.
서류상으로만 도둑이지 행적을 보면 영락없는 강도였다.
"최근에는 중학생을 피떡 만들어 놨어요."
"왜?"
"도둑질 한다고 그랬더라고요."
"그건 강도지, 도둑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얼마나 정의롭지 못한 짓이에요!"
"……."
"게다가 뭘 훔쳤는지 알아요?"
"뭘 훔쳤는데?"
"핸드폰이요."
"……."
"안 빡쳐요?"
"어디서 빡쳐야 해?"
어린 애를 때렸다는 거?
도둑이 강도짓을 했다는 거?
"아이템이 아닌 걸 훔쳤다니까요? 그것도 겨우 50만 원짜리."
"……."
과학문물인 핸드폰을 훔쳐서 화가 난 건지.
아니면 그게 겨우(?) 50만 원짜리라서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도둑의 긍지를 뭘로 보고."
송하영과 차진혁은 신림동에 도착했다.
"저기, 공터 안쪽에 놈의 아지트가 있어요."
"근데 동업자 거를 이렇게 막 털어도 돼?"
"도둑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놈이니까 도둑이 본때를 보여줘야죠."
차진혁은 아까부터 궁금하던 걸 물어봤다.
"도둑한테 명예가 있는 게 맞아?"
"도둑도 도둑 나름대로의 프라이드와 긍지가 있거든요? 내 꿈이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거거든요?"
역시 미친 게 틀림없다.
미친놈에게 상식이 통할 리 없으니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금방 가지고 나올 테니까."
송하영이 은신을 사용하여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컨테이너가 놈의 은신처.'
낡은 금고가 하나 보였고 번호를 맞추어 열어보니 베르클라프 목걸이 한 쌍이 숨겨져 있었다.
'흥,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지.'
책상 위에 '메롱'이라 써 있는 쪽지를 붙여놨다.
이내 유유히 컨테이너를 빠져나가려는 찰나,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독?'
무색무취의 독에 당한 느낌이었다.
황급히 해독제를 사용하려고 했는데 그 전에 포박줄이 날아들었다.
포박줄 형태의 아이템이 송하영의 몸을 순식간에 포박했다.
"잡았다, 쥐새끼."
방독면을 쓰고 있는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야, 암컷 쥐네?"
송하영은 아뿔싸 싶었다.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것 같았다.
'젠장. 몸이 안 움직여.'
임꺽정이 가까이 다가갔다.
"메롱? 아, 네가 그 천사소녀였어?"
책상에 붙은 쪽지를 떼어내 한 손으로 구겼다.
그는 송하영의 머리맡에 쪼그리고 앉았다.
"동업자 정신이 이렇게 없어서야."
그는 송하영이 남긴 '메롱' 쪽지를 송하영의 입에 쑤셔 넣었다.
"천사소녀가 흑장미 연합의 창립멤버라는 소문이 있던데, 아무래도 헛소문인가봐. 이렇게 쉽게 잡힐 정도면 말이야."
송하영은 바닥에 쓰러진 채, 어떻게든 포박줄을 풀어내기 위해 애썼다.
포박을 해제하는 스킬이 있기는 했지만 정신이 크게 흐트러진 상태여서 제대로 발동이 안 됐다.
"이 죗값은 어떻게 치를래?"
그가 씨익 웃으며 송하영의 얼굴과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고서 침을 꼴깍 삼켰다.
"이렇게 미인일 줄은 몰랐어. 잘만 협조하면 살려줄 수는 있는데, 어때?"
송하영은 최대한 침착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입안에 들어온 쪽지 때문에 말을 제대로 못 했다.
"어버버어버버. 어버버버?(장난을 좀 쳐봤어요. 어떻게 협조하면 되죠?)"
송하영의 협조적인 태도를 느꼈는지 임꺽정은 송하영의 입안에 넣었던 쪽지를 꺼내주었다.
송하영은 필사적으로 눈웃음을 지었다.
"장난을 좀 쳐봤어요. 어떻게 협조하면 될까요?"
"그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지 않을까?"
그가 검지손가락으로 송하영의 볼을 살살 긁다가 목덜미를 매만졌다.
마치 뱀이 온 몸을 기어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뭘 바라고 있는 건지 빤히 보였다.
송하영의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으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좋아요. 도둑으로서 실패했으니까, 어떻게든 대가를 치를게요. 당신 마음대로 해요."
"네가 동의한 거다?"
임꺽정은 실실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옷은 각자 스스로 벗는 걸로 하지."
맨 위에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뒤쪽으로 던졌다.
그리고 그때, 재킷을 뚫고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억!"
화살처럼 쏘아진 것은 다름 아닌 단도였다.
임꺽정의 뒤통수에 단도가 꽂혔다.
쿵!
임꺽정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차진혁이 걸어오고 있었다.
'와, 이제야 기억났다, 임꺽정!'
아무래도 베르클라프 목걸이를 여기서 만나게 된 건 필연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