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34화
'초고속 촬영' 자체는 그렇게 대단한 능력은 아니었다.
그냥 현대의 초고속 카메라와 비슷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수많은 순간들을 포착하여 촬영하는 것.
그런데 내게 주어진 스킬의 이름은 '초고속 촬영'이 아니었다.
['시간배율 촬영'이 개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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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배율 촬영]
피사체를 보다 효율적으로 촬영하기 위하여 피사체의 움직임을 강제로 제한합니다.
* 적용 대상 : 촬영자 이하 레벨의 모든 피사체.
* 제한 범위 : x0.8~x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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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길지 않은 설명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 보았다.
'이게 뭐냐?'
이걸 촬영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초고속으로 촬영하기 싫으니, 네가 느리게 움직여라, 뭐 이런 거 같다.
이건 저주를 주로 다루는 마법사나 디버퍼들이나 가지고 있을 만한 능력이었다.
'0.8배속?'
퍼센트로 나타내면 -20%다.
'디버퍼 계열 플레이어가 20프로 디버프를 주려면 최소 레벨 80은 달성해야 하는데?'
이런 스킬을 쓰려면 정신력 소모가 엄청 크겠지?
스킬은 개개인의 정신력과 큰 관련이 있다.
이것은 숫자로 구체화되는 수치는 아니었으나 몇 번 사용해 보면 대충 감이 온다.
'일단 써봐야 감이 오겠다.'
레벨 80짜리 전문 디버퍼에 버금가는 능력이다.
이런 사기적인 능력이 거저 주어졌을 리는 없다.
분명히 대가가 따를 것이다.
"김정현, 동작이 잠깐 느려질 거야. 놀라지 말고, 나 공격해 봐."
[스킬, '시간배율 촬영'을 사용합니다.]
[배율 : x0.8]
스킬을 사용해 봤는데 정신력에 크게 무리가 가지 않았다.
'어?'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정신력 소모가 없을 수 있나?
연속 사용도 충분히 가능했다.
적어도 세 번은 쓸 수 있을 거 같다.
'제왕의 격 덕분인가?'
아무래도 그런 거 같다.
* * *
차진혁의 무의식은 매일 굉장한 내적갈등에 시달리고 있다.
머리는 3등을 외치는데 가슴은 1등을 원한다.
무의식 속 본인의 기준은 저 높은 곳에 있는데, 의식적으로 본인의 기준을 억지로 낮춘다.
그의 정신세계는 늘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1. 너무 강해지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2. 과거에 기인한 지나치게 높은 기준.
이 두 가지 조건이 묘한 콜라보를 일으켜 자기 객관화를 자꾸 실패하게 만들었다.
사실 시간배율 촬영쯤 되는 능력을 무려 연속 세 번이나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제왕의 격' 하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차진혁의 이성은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실질적으로 자기 객관화를 해버리면, 결국은 또 1등에 오르고 말 것이라는 무의식적 방어기제 때문이었다.
정신세계의 치열한 전쟁과는 별개로 스킬의 능력 자체에는 감탄했다.
'진짜 레벨 80대 디버퍼 수준이네.'
김정현의 몸동작은 확연히 느려졌다.
딱히 집중하지 않아도 쉽게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좋네.'
차진혁의 팀원들은 크게 놀랐다.
특히 속도가 생명인 서지수가 눈을 크게 떴다.
"오빠. 지금 뭐한 거?"
"저주 비슷한 거 걸었어."
"스트리머가 저주를 걸어?"
"0.8배속 재생 같은 거야. 나도 처음 생긴 스킬이라 꼬치꼬치 캐물어도 잘 모른다."
"와, 대박이다. 지금 저 상태면 나도 저 아저씨 그냥 이길 수 있겠다."
이 스킬을 얻고 나니 묘한 욕심이 생겼다.
'역시 초반에는 만능잡캐로 밀고 갈까? 초반에는 분명히 가능할 텐데.'
스트리머로 무쌍 찍는 것도 초반에는 가능하다.
내 경험이면 충분히 할 수 있다.
예상보다 훨씬 큰 후원들을 받고 있으니, 이대로라면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은퇴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러면 은퇴 직전까지만 맘껏 즐겨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씨, 아니지. 혹시 은퇴 못하면?'
혹여 초보 구간에서 은퇴하지 못한다면?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답이 없다.
'초반 컨셉이 스트리머의 생명을 좌우한다고 했어. 까불지 말자. 잊지 말아야 돼. 나는 평범한 스트리머다.'
나는 오늘도 내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다.
그런데 그때.
온몸에 악취를 풍기는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꽤 익숙한 냄새였다.
강철지네의 분비물 냄새.
"죽여 버리겠어."
눈에 살기가 가득했고 오른손에는 가시가 달린 채찍을 들고 있었다.
검은 팬티였다.
* * *
어벤저스 군단 소속, 각성명 검은 나비.
세리는 지옥을 통과해야만 했다.
'살아야 해.'
처음에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
그녀는 강철 지네의 몸을 타고 이동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강철 지네가 '촉각'에는 매우 둔감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강철지네와 몸을 부대껴가면서 혹은 비벼가면서 움직였다.
강철지네의 몸에는 끈적한 분비물이 묻어 있었는데, 그녀는 그 분비물을 온몸에 뒤집어썼다.
세리는 그야말로 지옥을 경험하고서 겨우 탈출했다.
겨우 100미터 남짓을 이동하는데 10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함정에 빠진 거야.'
김철수가 함정을 판 것이 틀림없었다.
세리 자신의 미행을 눈치채고서 말이다.
그녀는 사력을 다해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죽여 버린다.'
10시간 넘게 극한의 상황에 빠져 있던 그녀는 차진혁을 보자마자 이성을 잃었다.
살의가 정신을 지배했다.
[스킬, '목 감아채기'를 사용합니다.]
차진혁의 몸을 채찍으로 감아 끌고 오려 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됐다.'
저쪽의 탱커나 암살자들이 반응하기 어려울 정도의 타이밍이었다.
분명히 그랬다.
'어?'
그런데 이상했다.
채찍이 뻗어 나가는 속도가 평소보다 느린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뭐지?'
생각의 속도가 느려지는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나만 이 세상에서 홀로 떨어져나온 느낌.
묘하게, 내 주변을 둘러싼 시간만 천천히 흘러가는 느낌.
상대적으로 내가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이 빠르게 움직이는 느낌.
강력한 저주에 걸린 것만 같았다.
'시간배율 촬영'의 효과였다.
'어어?'
어어, 어어, 하는 순간, 차진혁이 채찍을 튕겨냈다.
중계결계였다.
이내, 차진혁이 손을 뻗었다.
손이 너무 빨라 미처 피할 수 없었다.
'미친!'
느려진 의식 속에서 차진혁의 손은 마치 일류 체술가의 손 같았다.
자신의 채찍보다 더 채찍 같았다.
매끈한 경로로 다가온 그의 손이 세리의 목을 움켜쥐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스킬 효과 좋네."
차진혁은 새 스킬 '시간배율 촬영'에 몹시 흡족했다.
제왕의 격에 이어서 시간배율 촬영까지 얻고 나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기분 좋게 말했다.
"안 덤벼들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차진혁이 단도를 꺼냈다.
차진혁은 먼저 나서서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자신을 죽이려는 자를 살려두지도 않는다.
그리고 죽음에 별다른 의미 같은 것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상대의 정체에 대해서도 별로 궁금하지 않았고 화도 나지 않았다.
아주 단순한 명제였다.
나를 죽이려고 했다면 나도 죽이면 된다.
단도로 세리의 목을 찌르려던 그 순간, 황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Wait!!!"
차진혁에게 매우 익숙한 목소리였다.
* * *
소리치면 달려온 사람은 스타 메이커, 죠셉이었다.
죠셉은 또 왜 여기 있어?
죠셉이 황급히 달려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일단 이것 좀 놓고 얘기합시다."
"일단 좀 죽이고 얘기합시다."
순서가 참 잘못됐다.
놓고 얘기할 게 아니라, 죽이고 얘기를 시작해야 맞는 거지.
"어벤저스 군단의 매니저로서, 대신 사과드립니다. 단언컨대 검은 나비는 당신을 해칠 목적이 없었습니다."
"검은 나비?"
"어벤저스 군단 소속입니다."
훗날의 어벤저스 군단 애들은 다 아는 녀석들이다.
내가 모르는 걸 보니 아마 초창기 멤버였을 테고, 훗날까지 살아남지는 못했을 것 같다.
"제발, 일단 놓고 얘기합시다. 다 설명하겠습니다."
흐음.
일단 목을 움켜쥐고 있는 손에서는 힘을 뺐다.
내 목을 노린 암살자를 살려준 건 처음인데.
'그래도 어벤저스 소속이라면, 일단 얘기는 좀 들어봐야겠지.'
에건 폴은 지구가 낳은 스트리머다.
명실상부 지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트리머로 성장하게 될 거다.
죠셉 역시 스타메이커로서 엄청난 인재가 된다.
이런 자들에게 미운털이 박혀서 좋을 건 없었다.
내 목표는 적당히 성공해서 사는 거고, 그러려면 아군이 많은 것보다는 적군이 없어야 하니까.
근데 또 그렇다고 그냥 놔주자니 나쁜 선례를 남길 것 같은데.
적당히 타협하기로 했다.
"그럼 팔다리 힘줄만 자르죠."
"일단 검은 나비를 살려만 주신다면 김철수 씨가 원하는 것을 뭐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제 능력이 닿는 한도 내에서라면요."
"진짜요?"
이 시대의 사람들은 진짜 순수하구나.
원하는 걸 다 들어준다니.
내가 목숨이라도 내놓으라고 하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좋습니다, 얘기를 한 번 들어는 보죠. 다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무조건 죽일 겁니다. 뒤통수 시린 건 싫어서요."
"알겠습니다."
우리는 일단 자리를 옮겼다.
내 호텔 방으로 들어온 죠셉은 이런저런 얘기들을 해줬다.
요약하자면 내게 관심이 있어서 붙여놓은, 말하자면 첩자 같은 거였다.
아니 무슨 첩자를 암살자로 붙여놔?
미행을 붙일 거면 암살자 직업이 아니라, 탐정 직업이나 공격 능력이 전무한 도적직업 같은 걸 붙여야 하는 건데.
직업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초보 구간이다 보니 아직 그렇게까지 직업이 세분화되지도 않았고, 덕분에 아직 개념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저는 당신의 스타성과 천재성을 진즉에 알아봤습니다. 에건 폴 또한 당신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고요."
"저는 스타 될 생각이 전혀 없고요. 앞으로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압니다. 죽일 거라는 거."
어쩐지 죠셉은 포기하지 못한 눈빛이었으나 일단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분간 절대로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당분간?"
"당신은 분명 어디에서든 빛이 날 겁니다. 그 빛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습니다."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다.
이 세상은 힘순찐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렇지만 은퇴하면 그만이다.
"언젠가 반드시 저를 필요로 하는 날이 올 겁니다. 당신은 스타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자이니까."
자꾸 헛소리를 하길래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어차피 내가 은퇴하고 나면 쟤도 나에 대한 관심을 좀 거두겠지.
"위로금과 검은 나비의 목숨값으로 100만 달러를 요구하셨지요?"
"예?"
내가 요구했던 건 100만 달러가 아니라 100만 다이아였다.
에건 폴과 별로 척을 지고 싶지도 않고, 사람 목숨값으로 떼돈을 벌고 싶은 생각은 딱히 없었으니까.
그냥 형식적으로나마 100만 다이아 받고 퉁치려고 했다.
어차피 별로 위협도 안 됐으니까.
열받은 꼬꼬마가 손가락으로 찔렀다고 100만 달러를 뜯어내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100만 다이아라고 했는데요."
"예, 물론입니다. 100만 달러 지급하겠습니다."
"……."
"검은 나비를 살려주셨으니 그만한 보답은 해야죠."
죠셉에게서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어떻게 해서든 내게 100만 달러를 지급하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이걸 빌미로 나를 귀찮게 하지 않기를 바라요."
"물론입니다. 여기 각서도 미리 작성해 왔습니다."
죠셉은 확실히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이 100만 달러를 빌미로 내게 어떤 요구나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는 내용의 각서였다.
이 정도쯤 했으면 받아도 될 것 같다.
몰랐는데, 죠셉은 내 파티원들한테도 각각 약 1억 원을 피해 보상금으로 지급했다나 뭐라나.
덕분에 애들은 싱글벙글 웃었다.
처음 여기 올 때 약간 기분이 나빠 보였던 서지수도 행복해하고 있었다.
차진솔도 굉장한 자본주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빵, 나 오빠를 사랑해도 될까?"
"꺼져."
"헤헤, 사랑해."
한 번 잃어본 동생이라 애틋한 마음이 피어오르기는 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괜스레 내가 좋은 오빠인 척, 다정한 오빠인 척하면 차진솔은 질색하며 도망칠 게 뻔했다.
그냥 평소처럼 대했더니 더 좋아하더라.
우리는 별 탈 없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곧바로 나는 최갑수 영감님의 공방으로 향했다.
최갑수 영감님은 약간 짜증이 난 모양새였다.
"왜 이리 방송을 안 켜는가? 스트리머가 이렇게 불성실해서야."
"의뢰를 좀 하려고 하는데요."
"의뢰?"
"예. 연금술사시잖아요. 포션도 제작하시죠?"
"일단 보지."
나는 품 안에서 '오공독(蜈蚣毒)'을 꺼냈다.
강철지네를 사냥하면서 획득한, 포션 형태의 아이템이었다.
"이걸로 두꺼비를 사냥하는데 최적화된 독을 만들 수 있을까요?"
당연히 만들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그게 있으면 레벨 60 이하 저레벨 구간, 최고의 선물이라 불리는 '황금 두꺼비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길 몇 번만 클리어하면 나는 연희동 건물주가 될 수 있겠지.
아무래도 나는 계획보다 훨씬 빠르게 은퇴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