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31화
몸 전체에 짝 달라붙는 형태의 가죽옷을 입고 있는 여자였다.
키가 무척 크고 늘씬했다.
얼굴은 보지 않아도 무척 아름다우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단 눈을 마주치면 안 돼.'
내 얼굴을 봐.
내 얼굴을 봐.
누군가가 귀에 속삭이는 것 같은 환청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얼굴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이미 유혹이 시작되었다는 소리다.
'몽마(夢魔).'
몽마는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아주 위험한 종족이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유혹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특히 젊은 남녀에 대한 유혹 능력이 뛰어났다.
몽마의 아름다움과 유혹에 홀려 잠자리를 갖게 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부작용에 시달리게 된다.
가장 가벼운 것이 탈모 같은 것이었고, 심하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보통은 정기를 빼앗긴다고 표현했다.
'당연히 나보다 훨씬 고레벨일 거고.'
기본적으로, 내가 만났던 몽마들은 최소 레벨이 100이었다.
쟤네들은 태어나는 순간 레벨 70부터 시작이다.
예전에 나한테 접근했던 몽마들도 최소 백 명은 될 거다.
아,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
차라리 칼 들고 싸우는 백배 낫지, 쟤들은 진짜 피곤하다.
"명령하신 다이아를 가져왔습니다."
사실 다이아는 후원의 형태로 그냥 쏴줘도 된다.
그런데 굳이 몽마를 비서로 취직시켰다는 건 그 의도가 뻔했다.
내게서 뭘 얻으려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나를 유혹하라는 명령을 내렸겠지.
"그래. 자네가 직접 받게."
"……."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달큼한 복숭아 냄새가 자꾸 코끝에 맴돌았다.
'유혹향.'
이 또한 유혹 스킬 중에 하나다.
나는 몽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몽마가 내게 말했다.
"키가 정말 크시네요. 얼굴도 잘생겼고."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는데도, 몽마의 입김이 내게 닿는 느낌이었다.
마치 입김이 손길 같았다.
내가 레벨이 좀 더 높았어도 이런 유혹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예쁜 여자에는 면역이 될 대로 되었는데, 레벨 차이가 너무 많이 나니까 유혹스킬이 좀 먹히는 것 같다.
'자존심 상한다.'
이딴 스킬이 통한다니.
"제 이름은 릴리아에요. 당신 이름은 어떻게 되나요?"
목소리 또한 달콤했다.
목소리가 어떻게 달콤하냐 묻는다면 사실 할 말은 없지만 진짜 그렇게 느껴졌다.
"우리가 서로 통성명을 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어머, 쌀쌀 맞으셔라."
"……."
"그것도 매력 있어. 당신에게 호기심이 생길 거 같아."
"저는 돈만 받으면 됩니다."
"돈보다 더 좋은 걸 받는 건 어때요?"
그러면서 내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와, 나 지금 소름 돋았다.
삼류 저질 영화에서도 저런 멘트는 안 칠 텐데.
몽마들은 타고난 유혹력이 워낙에 뛰어난 바람에, 멘트 등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정말 자존심 상하는 건, 저런 저급 멘트에도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몽마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종족이라는 거겠지.'
그래서 아무나 유혹하지 않는다.
적어도 자기 급에 맞는 상대를 유혹하려 든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몽마 눈에는 아직 제대로 여물지 않은 핏덩이에 불과할 것이다.
'내 수준에 맞춰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유혹만 하고 있을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저 정신계 마법에 홀라당 넘어가서 간이고 쓸개고 빼주고 있겠지.
그리고 또 다행인 점은, 나 스스로가 몽마의 유혹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인위적으로 유혹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유혹의 효과가 반감되니까.'
이런저런 요소들이 겹쳐진 덕분에 겨우 버틸 수 있는 거 같다.
이걸 겨우 버텨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자존심이 상해서 기분이 나빠졌다.
나는 몽마가 들고 있는 가죽 주머니를 받아든 뒤 걸음을 옮겼다.
"쿨거래, 감사합니다."
* * *
차진혁이 밖으로 나간 뒤, 연금술사 최갑수는 껄껄대며 웃었다.
"자네, 나와의 계약을 파기할 셈인가?"
"……."
"물론 몽마의 긍지와 자긍심을 모르는 건 아니네. 그렇지만 계약은 꼭 이행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저는……."
릴리아는 하아- 한숨을 내쉰 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녀는 가죽옷으로 몸을 감싸다시피하고 있었는데, 어깨와 팔은 노출되어 있었다.
그 어깨와 팔이 복숭아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는 장난을 치지 않았어요."
"무슨 뜻인가?"
"저 남자를 유혹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고요."
최갑수가 껄껄대며 웃었다.
"그래. 그렇게 말해야 계약을 온전히 이행한 것이 되겠지. 그래. 그럴 수 있어."
"……."
"레벨 39, 햇병아리를 상대하는 수준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으로 이해하겠네."
릴리아는 조금 억울했다.
그녀는 정말로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러나 '나는 정말로 최선을 다했어요'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걸 인정하는 것 또한 몽마의 자존심에 큰 상처였으니까.
'39레벨, 그것도 오픈베타 서비스의 플레이어가 어떻게 그런 정신력을 가지고 있어?'
정신방벽이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느낌이었다.
몽마는 상대의 정신에 굉장히 깊숙이 관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종족이었고, 당연히 김철수(차진혁)의 정신에 침투하려 무던히 애를 썼다.
'스킬로 막아낸 건 아냐.'
레벨 39짜리 스트리머의 스킬로, 자신의 유혹을 막아낼 수 있을 리 없다.
현자급의 대단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거나, 그도 아니면 고자이거나, 그도 아니면 유혹이 안 통하는 미친놈이거나.
그녀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뭐, 아무래도 좋네. 오늘 당장 유혹해 달라는 건 아니었으니. 기한은 오픈베타 기간까지네. 꼭 김철수를 유혹해 주게."
* * *
어느덧, 명품 플래그십 스토어로 쓰이고 있던 이 건물에는 '연금술사 최갑수 공방'이라는 간판이 새로 붙어 있었다.
'이 영감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일단 그 자리를 피하는 게 급선무였기에 제대로 따지지 못했다.
자존심 강한 몽마를 저렇게 움직였을 정도면 정말로 천문학적인 다이아를 동원했을 텐데,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내 정신력에 약간 하자가 있는 것 같다.
'와, 진짜 정신력 개쓰레기.'
동료 놈들이 봤으면 아마 배를 잡고 웃으며 놀려댔을 것이 뻔했다.
몽마의 유혹에 그렇게까지 무방비하게 당하면 어떡하냐고.
실제로 나를 비롯하여 내 동료들은 정신계 공격에 어지간해서는 안 당했다.
우리는 모두 '정신방벽' 혹은 '제왕의 격' 같은 특성들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참고로 제왕의 격이 더 높은 등급의 특성이고, 나는 정신방벽을 갖고 있었다.
'하마터면 유혹당할 뻔했어.'
아무래도 '정신방벽'을 얻어야 할 거 같다.
'정신방벽을 얻어도 괜찮겠지?'
정신방벽을 먼저 얻으면 제왕의 격을 얻을 수 없다.
두 특성은 서로 충돌을 일으킨다.
당연히 제왕의 격을 얻으면 좋겠지만 그건 지금 레벨에서 얻을 수 없다.
'난 빠르게 은퇴할 거니까 정신방벽이면 충분할 거야.'
레벨 240까지도 정신방벽으로 잘만 버텼다.
그러고 보니 나도 '제왕의 격'을 갖고 있었다면 지옥여제의 저주에 버틸 수 있었을 거 같기도 한데.
'아이씨 내가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반얀트리 던전은 이 시대에 새로이 태어날 검왕이 도전하겠지.
앞으로도 살면서 각종 정신계 공격을 받을 테니 나는 정신방벽을 얻기로 했다.
'3등한테 딱 어울리는 특성이기도 하고.'
제왕의 격은 너무 뛰어난 특성이다.
정신방벽이 딱이다.
나는 서둘러 서지수에게 연락했다.
-뭐해? 시간 있어?
-응. 언니랑 같이 있어. 왜?
-시간 있어?
-왜?
-잠깐 만나.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서지수가 대답했다.
-우리 둘이?
-아니? 셋이.
-당연히 그럴 줄 알았어. 당연히 셋이 보는 거지, 하핫!
뭐가 웃긴 건지 모르겠는데 한참을 웃었다.
쟤는 진짜 웃음 버튼이 특이한 데 있는 거 같다.
참고로 '정신 방벽'을 얻기 위해서는 말레이시아로 가야 하고, 쌍둥이의 도움이 필요하다.
쌍둥이만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던전'의 입구를 활성화할 수 있으니까.
우리 셋은 용산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서지수가 눈을 크게 떴다.
"뭐? 해외여행을 가자고?"
"여행 아니고, 레이드."
"어, 어, 어쨌든 해외를 가자는 거잖아. 우리 둘이?"
얘는 귀가 고장 났나 보다.
요즘 훈련을 많이 해서 피곤한 것 같기도 했다.
우리끼리를 우리 둘로 듣다니.
"아니 우리끼리라고."
"……."
"왜 그래?"
"그래도 한국에도 다녀야 할 던전 엄청 많고, 또 남녀가 유별하기도 한데, 무슨 벌써 해외를 같이 가? 우리가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는 아니잖아."
"나는 그래도 그 정도 사이는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그래?"
머지않은 미래에, 생판 모르는 남과 팀을 짜서 해외 원정도 다닌다.
첫 만난 사이에도 목숨을 맡기고 임무(혹은 레이드)를 수행한다.
그게 곧 다가올 세상이다.
서지수의 귓불이 살짝 붉어졌다.
"오빠가 그렇게까지 우릴 각별하게 생각하는지는 몰랐는데."
"그렇게 각별한 건 아닌데……."
"이제 오빠를 좀 알겠어."
뭘 알겠다는 건지 도대체.
"비행깃값도 대주고, 숙소값도 대주고, 그렇게까지 해서 우리랑 같이 해외를 나가고 싶단 말이잖아?"
내 필요에 의해서 가는 거니까 너무 당연한 거다.
그러면 당연히 경비는 내가 지불하는 것이 맞다.
"말은 맨날 띠껍, 아니, 음, 좀 안 다정하지만……."
띠껍다고 한 거 다 들었지만 굳이 짚지는 않았다.
"츤데레잖아?"
뭐라고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얘는 아무튼 정상은 아니다.
"아무튼 같이 가는 거다?"
"알았어, 생각 좀 해볼게."
그날 저녁 전화가 와서 '특별히 가줄게. 오빠가 그렇게까지 성의를 보인다면 말이야.'라고 대답을 했다.
그렇게까지 대단한 성의를 보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엄청난 성의를 보였다고 생각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 * *
차진솔이 말했다.
"오빠, 나도 같이 가."
"너도?"
"어. 내 경비는 내가 낼게."
"음."
돈은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차진솔이 가진 '초재생'과 '초인' 특성은 다른 특성과 부딪친다.
아마 정신방벽과도 충돌을 일으킬 거다.
"아냐. 넌 그냥 있어."
"아니? 나도 갈 건데? 나 안 그래도 회사 그만두면 말레이시아 여행 꼭 가고 싶었어."
"여행 아니라니까."
애들이 아직 이 세계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떨어진다.
내 입장에서는 아주 답답할 노릇이었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것들이니 마음을 너그러이 먹기로 했다.
"그 미래일기에 엄청 좋은 거라고 쓰여 있었다며? 그럼 나한테도 좋은 거 아냐? 나도 그거 얻을래."
"욕심내지 마. 너 최근에 특성 두 개나 얻었잖아. 뭐든 욕심이 너무 과하면 탈 나는 법이야."
"아무튼 나도 같이 가. 나만 빼놓고 플레이하지마."
차진솔이 워낙 완강해서 나는 그러라 했다.
생각해 보니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도 '정신방벽'을 얻으면 좋지 않을까 싶기는 했다.
'어차피 내가 연희동 건물주가 될 때까지는 같이 플레이해야 하니까.'
그래,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나와 함께 플레이하고 있는 목재현과 김정현도 데리고 가기로 했다.
말레이시아로 출국하기 위해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서둥이들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서지수는 레이드에 참여하는 거치고 지나치게 화사하고 예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괜히 저런 거 입으면 움직임 걸리적거리고 찢어지고 할 텐데.
저 밀짚 챙모자는 왜 쓰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서지수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셋이 가는 거 아니었어?"
"그냥 다 같이 가게 됐어."
"그럼 미리 얘기라도 해줬어야지."
"그런가?"
"그게 당연한 거 아냐?"
아니 근데 왜 약간 싫어하는 거 같지?
뭐가 됐든 레이드에 있어서 동료가 늘어나면 좋은 거다.
늘 인력이 부족해서 난리였지, 인력이 넘쳐나서 문제가 됐던 적은 별로 없다.
뭐, 동료가 너무 허접하면 그럴 수도 있기는 한데 사실 여기에 그렇게 수준 떨어지는 애들은 없었다.
수준 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 목왕, 혈사제, 권왕 조합이다.
원래는 나한테 고맙다고 해야 할 텐데 좀 이상했다.
'엄청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내가 한창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 윗선에서 나 몰래 이런 파티를 미리 준비해 주면 나는 진짜 감사하다고 백 번은 절했을 텐데.
"그래도 고맙지?"
"……."
말레이시아에 도착할 때까지 서지수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많이 고마운데 딱히 내색하기는 부끄러워서 그런 거겠지.
쟤도 참 부끄럼이 많은 거 같다.
이후 약 7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프 공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