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는 그만 강해지고 싶다 9화
나는 본능적으로 확인했다.
'무기를 들고 있나?'
손에 무기는 없었다.
손가락 끝부분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으로 봐서 손을 사용하는 놈이었다.
'에이, 그건 아니네.'
무기를 쓰는 놈들보다는 손을 사용하는 놈들이 상대하기 더 쉽다.
이것도 아주 고레벨 구간으로 올라가면 얘기가 또 달라지긴 하지만, 아무튼 지금은 초보 구간이므로 대체로 그랬다.
'보통은 상대의 절망과 고통을 즐기는 타입.'
일반 악마들 기준으로는,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사용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손을 사용하는 건 '손맛'을 느끼고 싶어서다.
의지가 꺾여 절망하고 살려달라 비는 생명체를 죽이는 것을 즐기는 타입이기도 했다.
[LV22(+15)/Iblis Kecil/?/?/친우살해]
악마화되어 레벨 +15 판정을 받아 현 레벨은 37 수준.
여기는 튜토리얼 필드인데 튜토리얼 필드의 제왕보다 더 높은 레벨이었다.
직업과 스킬까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친우 살해'라는 업적으로 보아 아마 1층의 생존자들을 모두 죽인 모양이었다.
악마가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 급할 것 없다는 듯 여유로운 태도였다.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형, 보고 싶었어."
강한 녀석의 목소리를 듣자 온몸이 근질거렸다.
아, 설렌다.
"형은 무슨."
"형 강하더라. 그러면 처음부터 그냥 우릴 구해줬어도 되는 거 아니야?"
"……."
"네가 우릴 다 죽인 거야, 이 개새X야."
나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인간이었던 시절의 감정을 가지고 말을 하는 건 아니니까.
인간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악마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단도는 왜 쥐고 있어? 그걸로 뭘 어쩌려고?"
나는 악마를 향해 뛰었다.
악마는 가만히 서서 여유로이 날 바라보았다.
"날 찌르게?"
악마는 내가 휘두르는 단도를 연거푸 피해냈다.
내 생각보다 내 몸이 잘 움직이는 것은 맞았으나 악마가 나보다 좀 더 민첩했다.
악마가 손을 휘둘렀다.
그 손이 내 어깨에 닿았다.
"큭."
꽤 오랜만에 느껴지는 통증이었다.
어깨 부근의 살이 꽤 많이 찢어졌다.
'피 난다.'
이제야 좀 살아 있는 거 같다.
"왜? 그 이상한 결계 같은 거 사용 안 하지?"
나는 분한 듯 악마를 노려보았다.
악마가 키득키득 웃으며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회색 늑대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아. 여기서 싸우느라 너무 많이 써버렸구나."
"……."
"괜찮아, 어차피 그 방어결계가 있었어도 결국에 형은 나한테 죽었을 테니까."
놈의 손톱이 보였다.
나는 공격이 다가올 것을 알고 있었다.
눈에도 보였다.
머리와 눈으로는 알고 있었는데 피해내지는 못했다.
"큭!"
이번에는 왼쪽 허벅지였다.
허벅지를 꽤 깊이 찔렸다.
"아프지? 히히히."
상당한 통증이 밀려들었고, 그에 따라 악마는 즐거운 듯 히죽 웃었다.
나는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즐겁기는 한데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다.
눈에는 보이는데 몸이 안 따라주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저레벨 스트리머니까 당연한 거긴 한데.'
아, 강해지고 싶다.
* * *
목재현은 몸을 덜덜 떨었다.
무엇이 이렇게 두려운지, 이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그 스스로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악마에게서 새어 나오는 기세에 눌린 것이지만 목재현에게는 그걸 알아챌 만한 경험이 없었다.
'도망치고 싶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싶었다.
그렇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목이 잘려나갈 것 같은 환상에 시달렸다.
그저 약간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항거할 수 없는 공포에 짓눌렸다.
'근데…….'
차진혁은 조금 달랐다.
목재현의 눈에 피투성이가 된 차진혁이 보였다.
특히 어깨와 허벅지에 큰 부상을 입었고 자잘한 상처들도 꽤 많이 보였다.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어?'
지금 그는 제자리에서 움직이는 것도 할 수 없었다.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저 멈춰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최선이었다.
그러나 차진혁은 저렇게 큰 부상을 입어 가면서 필사적으로 단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런 차진혁을 상대하는 악마는 즐거워 보였다.
"헤헤. 조금 더 발악해 봐."
"……."
목재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나나 저 형이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똑같은데.
누군가는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고 누군가는 무력하게 숨어만 있다.
누군가는 용기를 냈고, 누군가는 절망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차진혁의 치열함은 목재현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어? 위험……!'
그런데 너무 위험했다.
악마가 입술을 말아 올리고 웃었다.
"재미있게 놀았다."
악마는 왼손으로 차진혁의 목을 움켜쥔 채 들어 올렸다.
차진혁이 버둥거렸으나 악마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는 못했다.
"이제 그만 죽어."
악마는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을 곧게 폈다.
그대로 차진혁의 심장을 찔렀다.
푸욱!
살갗을 찢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목재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그때, 크아아악!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차진혁의 소리가 아니었다.
'뭐지?'
목재현이 눈을 조심스레 떴다.
악마는 머리를 감싸 쥔 채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리고 있었다.
달콤한 냄새가 났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자세히 보니 악마의 머리부터 시작하여 몸 전체가 젖어 있었다.
악마의 몸에서 파스스- 하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차진혁은 그대로 악마의 등 위에 올라탔다.
"이제 내 차례다."
그리고 단도로 악마의 목 뒷덜미를 수십 차례 찔렀다.
목재현은 입을 쩍 벌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악마의 목 뒷덜미를 쑤시는 차진혁의 모습이 오히려 더 악마 같았다.
* * *
나는 마음이 아주 아팠다.
'어깨랑 허벅지에 겨우 이 정도 부상을 입었다고 이 정도로 움직임에 제약이 생겨?'
아까 팔이 부러졌을 때도 느꼈다.
이 몸은 너무 연약하다.
아무래도 고통을 참는 훈련을 따로 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최대한 필사적으로 싸웠다.
악마 놈이 그걸 즐기니까.
필사적으로 달려들던 상대가 더 이상 의지를 잃고 무너져 내리는 걸 보는 게 악마들의 악취미니까.
'목을 내주자.'
가슴이 떨려왔다.
분명 찌를 거다.
'결국 놈은 심장을 노린다.'
그게 하급악마들의 특성이었다.
가지고 놀다가 심장을 찔러 죽이는 것.
나를 완전히 죽였다고 생각하며 방심하는 그때.
그때가 악마의 빈틈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 될 것이었다.
'지금 찌르겠지.'
푸욱!
심장 부근에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손톱이 살갗을 뚫고 몸속을 파고드는 작열감이었다.
그러나 그건 고통스럽지 않았다.
'이제부터 내 턴이다!'
공략이 맞아떨어질 때의 이 희열감은 그 어떤 쾌락보다 강렬했다.
[여벌 목숨이 적용됩니다.]
나를 죽였다고 생각한 악마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보이지 않던 빈틈이 보였다.
나는 루루카의 깃털을 얻자마자 성향유를 만들어낸 상태였다.
'여벌 목숨'이 만들어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악마의 머리통에 향유옥합을 내리쳤다.
향유옥합이 깨지면서 놈의 몸에 향유옥합이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스트리머니까, 방송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목덜미가 질겨서 칼이 잘 안 들어가네요."
나는 괴로워하는 놈의 등 뒤로 올라타 목덜미를 연거푸 내리찍었다.
"이제야 들어갑니다."
푹! 푹!
마물들의 녹혈과는 다른, 검붉은 피가 이리저리 튀었다.
인간보다 체온이 더 높은지라 피가 상당히 뜨거웠다.
'한두 번으로는 안 돼.'
지금 확실히 숨통을 끊어놓아야 했다.
일단 놈에게서 힘이 빠지는 것은 느껴졌다.
축 늘어진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확실히 숨통을 끊어놔야 할 것 같아요."
바닥에 고인 성향유를 손에 잔뜩 묻힌 뒤, 악마의 뿔을 손에 쥔 채 힘을 주었다.
이 뿔은 악마들의 가장 큰 약점이다.
참고로, 죽음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뿔을 부러뜨리기 쉬워진다.
'안 부러지네.'
이렇게 치명상을 입혀놓았는데도 부러지지 않았다.
단도로 베어보려 했으나 날이 모두 나가서 쉽지 않았다.
"시간을 주면 안 되겠죠?"
나는 바닥에 고인 성향유를 손으로 떠서 입에 머금었다.
악마에게는 치명적일지 몰라도 인간에게는 그냥 향기 나는 물이었다.
맛 자체는 역했으나 그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입에 성향유를 머금은 채 악마의 뿔을 물어뜯었다.
턱에 힘을 꽉 주자 우드득- 우드득- 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뿔을 부러뜨리는 것에 성공했다.
손맛과는 다른 맛이 느껴졌다.
"크아아아아악!"
뿔에서 피 분수가 솟구쳤다.
하나가 뜯어져 나가자 다음은 훨씬 쉬웠다.
다른 하나의 뿔은 굉장히 물러져 있었고, 성향유 없이도 쉽게 뜯어낼 수 있었다.
['Iblis Kecil'를 처치하였습니다.]
나는 알림을 듣고 약간 허탈할 지경이었다.
이름 자체는 알고 있었지만 저걸 시스템 알림으로 보여주다니.
'겨우 이게 네임드 마물 취급이라고?'
와, 이건 이것 나름대로 충격적이네.
물론 튜토리얼 필드 기준에서는 어마어마하게 강한 것이 맞지만, 그래도 '네임드'로 취급받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적어도 한 필드에서 네임드 판정을 받으려면 최소 하나 이상의 파티가 궤멸 될 정도의 위기감은 있어야 하는 게 보통인데 말이다.
솔직히 어떤 편법을 써서든 솔로잉이 가능하다면 네임드를 주면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업적, '구마(驅魔)'를 달성하였습니다.]
사실 '구마' 업적 자체는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은 튜토리얼.
'저게 대영웅의 시초일 텐데.'
참고로 난 절대로 대영웅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나는 대영웅이 싫다.
대영웅은 개같이 굴러서 존경만 받고 단명하는 애들이 대부분이다.
돈을 벌어도 선행하느라 쓸 시간이 없고, 위대한 일을 하느라 가족과의 시간도 보낼 수 없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빛을 발하는 직업인데, 뭐 이게 즐겁다는 애들도 있기는 했는데 나랑은 상성이 안 맞는다.
아니나 다를까, 알림이 이어졌다.
[튜토리얼 필드에서 구마에 성공하였습니다.]
[히든 직업, '대영웅'으로 전직할 수.]
나는 고민하지 않고 'NO'를 선택했다.
'아니오.'
[재확인합니다.]
[히든 직업, '대영웅'으로 전직할……]
'아니오.'
[히든 직업, '대영웅'으로의 전직을 포기하였습니다.]
[히든 직업, '대영웅'의 전직 기회를 양보할 수 있습니다.]
해당 내용이 머릿속에 정리되어 전송되었다.
함께 이 구마에 성공한 플레이어에게 전직 기회를 전달할 수 있었고 현재 그 조건에 맞는 사람은 목재현이었다.
'나는 대영웅이 싫어. 근데 동료로서는?'
동료로서 대영웅은 그 누구보다 든든하다.
시스템 제약상 배신하기도 거의 불가능할뿐더러, 믿음과 신의가 아주 중요한 직업이다.
최고의 동료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대영웅'의 전직 기회를 내가 준다?
그러면 아마 나한테 거의 충성하다시피 하며 은혜를 갚아야만 할 거다.
대영웅은 그런 직업이니까.
대영웅을 중계하면 양질의 방송을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재현 학생."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목재현이 흠칫 놀랐다.
악마를 멋들어지게 사냥하는 모습에 감명받은 건가 싶다.
아무튼 목재현에게 물었다.
"학생한테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하는데요."
"……뭔데요?"
어차피 나는 안 받아들일 거다.
버리는 거보다는 제안이라도 해보는 게 낫지.
"강해지고 싶지 않아요?"
"……."
"방금, 무력하지 않았어요? 악마의 마기에 눌려 아무것도 못 했을 때 말이에요. 비참하지 않았어요?"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멸망하는 기분이다.
진짜 끔찍하다.
목재현도 나와 비슷한 것 같다.
"……비참했어요."
"재현 학생한테 대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줄까 해요."
"……."
"적어도 오늘처럼 무력한 날은 없을 거예요. 물론 원하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좋아요. 잘은 모르겠는데 장단점이 분명한 직업 같아요. 장점은 뭐 엄청 세질 거 같고, 단점은 희생을 많이 해야 할 거 같은 느낌이네요.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해요."
강요할 생각은 없다.
선택은 얘 몫이다.
"형,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뭔데요?"
목재현이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영웅이 된다면, 형처럼 강해질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