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0
힐통령 420화
126. 드래곤 레어(3)
“그런데 높이는 어떻게 안 될까? 계속 올려다보니 목이 아파서.”
카이의 말에 레드 드래곤이 콧김을 푸르르 뿜어냈다.
[……기다려라.]
그 말과 동시에 녀석의 거체를 빛 무리가 휘감더니, 이내 적발의 미청년이 나타났다.
“오, 이게 그거지? 판타지 소설에서나 보던 폴리모프.”
“무슨 소설?”
“아냐.”
인벤토리에서 소파 두 개를 꺼낸 카이는, 미간을 찌푸리는 녀석에게 자리를 권하며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카이. 라시온 왕국의 대공령을 통치하고 있는 공왕이다.”
“흥, 레드 드래곤 일족의 마기무스다.”
심드렁한 말투를 뱉어낸 마기무스가 재차 입을 열었다.
“다시 묻겠다. 인간이 나와 무슨 대화를 하고 싶다는 거지?”
성격 한 번 급하다.
하나 대화 주제를 질질 끌고 싶지 않은 것은 카이도 마찬가지였다.
“고룡. 그러니까…… 드래곤 로드, 엘더 드래곤. 뭐 갖가지 수식어로 불리는 드래곤들 있잖냐.”
“그분들은 왜?”
“한 번 만나고 싶은데, 자리 좀 주선해 줘.”
“하!”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친 마기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사람이 아닌, 파충류의 것처럼 샛노란 빛을 띠고 있었다.
“나의 둥지가 난잡해지는 것이 싫어 적당히 이야기나 들어주려 했더니, 이거 안 되겠군.”
“앉아.”
카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로님들,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신 로드는 모든 드래곤이 존경하는 일족의 위대한 시조(始祖). 그런 분의 신상을 오늘 처음 보는 인간에게 알려달라는 것이냐?”
“알았으니까 일단 앉아.”
“그리고 말끝마다 계속 명령질인데, 내가 진심으로 화를 낸다면…….”
“세 번째 하는 말이다. 앉아.”
카이의 차가운 시선이 마기무스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움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을 물러선 마기무스가 제 발을 내려다봤다.
‘겁을…… 먹었다고? 내가? 인간 따위에게?’
물론 그 인간은 자신의 마법 수십 개를 소멸시켜 버린 대단한 인간이다.
하지만 드래곤의 진정한 강점은 본인의 심장으로부터 나오는, 끝이 없는 마력에 기인한다.
실제로 전투 시에는 눈앞의 인간에게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한데 왜일까.
그때와는 다르게 차분히 앉아있는 모습이 더욱 위협이 되는 이유는.
마기무스는 침을 꿀꺽 삼키곤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이…… 야기 정도는 들어주지. 그분을 뵙고자 하는 이유가 뭐지?”
“아마 드래곤 로드에게 있어서도 나쁜 일은 아닐 거다. 난 그가 애타게 바라고 있는 것을 줄 생각이거든.”
“그 분께서 애타게 바라는 것?”
마기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지?”
“글쎄…… 그러고 보니 넌 몇 살이지?”
“3,174살이다.”
“드래곤 로드의 나이는?”
“그 분의 경우에는 무려 1만 년에 가까운 삶을 누리고 계시지.”
“과연.”
그는 최상급 신에게 도전하고, 패배하여 천계에서 추방당한 존재.
‘모든 기억을 잃고 도마뱀의 몸에 갇힌 채로 무려 1만 년이나 살아왔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불쌍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너, 드래곤 로드랑 개인적으로 연락은 되나?”
“날 뭘로 보고…… 차기 드래곤 일족의 수장으로 꼽히는 것이 나 마기무스다.”
“그럼 말이라도 전해. 당신의 과거가 궁금하지 않느냐고.”
말을 마친 카이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이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던 마기무스가 입을 열었다.
“그 말만 전해드리면 되나?”
“그래. 내 말에 반응이 없으면 그냥 깨끗이 물러날게.”
드래곤은 욕망의 화신들이다.
자신들에게는 필요도 없는 보석과 무구, 금화를 산더미처럼 쌓아놓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 드래곤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로드.
‘과거를 언급하는데 반응을 안 할 수가 없겠지.’
물론 예상을 깨고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때는 뭐, 직접 찾아가야겠지.
하나 일은 생각보다 잘 풀렸다.
“대체 왜…….”
연락이 끝난 것인지, 마기무스는 놀란 눈으로 카이를 쳐다봤다.
“말은 끝까지 해. 답변은?”
“……한 번 보고 싶다고 하시는군.”
“어디로 가면 되지?”
“눈을 감아라.”
카이는 마기무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눈을 감기 전, 할리를 쳐다봤다.
“오늘 고마웠어. 들어가서 쉴래? 아니면 산책이라도?”
[……그대만 괜찮다면, 나도 오랜만에 나의 둥지에 가보고 싶다.]
할리의 둥지라면 저 멀리 칠흑의 해역에 있는 군도들을 의미한다.
“그래, 그럼.”
카이가 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할리는 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냉큼 바다 쪽으로 날아갔다.
“우리도 가자.”
눈을 감은 카이가 손짓하자, 주변의 마나가 뒤틀리는 것이 느껴졌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할 때와 비슷한 느낌.’
하지만 텔레포트는 마법사의 수준에 따라 사용감이 영 좋지 않을 때가 있다.
굳이 비유하자면 비포장도로를 싸구려 소형차로 달리는 기분이랄까?
때문에 비위가 약한 이들은 텔레포트를 이용하고 나면 속을 게워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건 다르네.’
역시 드래곤은 드래곤이다.
잘 포장된 도로를 최고급 세단으로 이동하는 듯한 부드러운 느낌이 카이의 몸을 감싸 안았다.
“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카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호오. 이자인가.”
“예스, 마이 로드.”
카이의 앞에선 안하무인이던 마기무스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극상의 예를 갖췄다.
‘판타지 소설에서의 읽었던 드래곤들은 죄다 솔플만 하던 애들이었는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상하 관계가 없었다.
“허허. 무슨 책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증은 확실하군. 실제로 드래곤들은 상하 관계가 뚜렷하지 않다네.”
“……!”
마기무스가 예를 갖추고 있는 상대.
백색의 머리칼을 지닌 노인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내 생각을 읽은 건가?’
“맞네.”
재차 머릿속의 생각이 읽히자, 카이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지. 인간을 보는 건 수천 년 만의 일이라서 말이야.”
노인이 빠르게 사과했다.
‘하긴, 베오르크의 절대자의 눈을 생각해보면 납득이 안 가는 힘은 아니지만.’
가상현실게임은 플레이어의 뇌파를 읽는다.
즉,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에 대한 데이터가 이 게임에 남는다.
개발자 입장에서는 그 데이터를 눈앞의 드래곤이 읽을 수 있도록 설정만 해주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 능력은 특별해.’
천계의 웬만한 신들조차 하지 못한 일이다.
아마 눈앞의 드래곤은, 신이었을 적에 이와 비슷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 수고했으니 넌 이만 가보거라.”
“하지만 로드시여. 이 인간의 무력은 생각보다 강합니다. 제가 옆에서 호위하겠습니다.”
마기무스의 기특한 발언에 노인은 말없이 허허 웃기만 했다.
“마음은 고맙군. 하지만 눈앞에 상대를 두고도 제대로 보지를 못하다니, 눈은 왜 달고 있는 것이더냐.”
“예?”
“이 인간에게선 태양신의 냄새가 진하게 나는구나.”
“신입니까.”
마기무스가 대번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시미즈가 그랬지.’
드래곤 일족은 신들을 대게 싫어한다고.
그것은 그들의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일수도 있고.
인간이 드래곤 대신, 보이지도 않는 신을 믿어 빈정이 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 안위를 걱정할 것이었다면, 넌 이 인간을 나에게 데리고 오지 말았어야 한다.”
단번에 카이의 수준을 파악한 노인이 손을 휘휘 저었다.
“날 걱정하기에는 이미 늦었으니 가거라.”
“어, 어떻게…… 다른 일족의 용들이라도……?”
“다행스럽게도 이 늙은이의 목숨이 오늘 꺼질 일은 없는 것 같구나.”
깊고 우묵한 눈으로 카이를 쳐다보던 노인이 중얼거렸다.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이만 자리를 비켜주어라.”
“…….”
노인과 카이를 번갈아 쳐다보던 마기무스는 결국 인사를 올리고는 사라졌다.
“미안하네. 요즘 젊은 녀석들은 여기,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먼저 움직이거든. 철이 덜 든 게지.”
자신의 관자놀이와 심장 부근을 톡톡 두드린 노인이 말했다.
“카이라고 합니다.”
“알고 있네. 라시온 왕국의 구국의 영웅. 대륙에서 가장 강한 인간. 마계에서 생환한 사나이.”
그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대에게 알려준 이름이 없는 것이 애석하군.”
“이름이…… 없습니까?”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이 들었을 때부터 줄곧 로드라고 불렸으니까. 그게 내 이름이 되었고, 상징이 되었네.”
카이에게 자리를 권한 로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가 이 늙은 용의 과거에 대해 언급했다고 들었네.”
끄덕.
카이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분명 그랬습니다만…… 질문 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혹시, 당신의 첫 번째 기억이 무엇이었는지 여쭤 봐도 됩니까.”
“나의 첫 번째 기억이라.”
로드는 옅은 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드래곤들은 참 똑똑하단 말이지. 1만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날의 기억만큼은 유독 강하게 남아있으니.”
그가 자신의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그날은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었네. 그래, 맞아. 나의 첫 번째 기억은 비가 떨어지는 잿빛의 하늘을 올려다보던 것이었어. 숲 속에서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며 비를 맞고 있었는데, 뭔가를 잃어버린 듯한 공허함이 사무치게 느껴졌었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때 울고 있었네.”
“눈물이라…….”
그것은 천계에서 추방되었다는 분노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한낱 미물의 몸에 갇혔다는 상실감 때문이었을까.
“혹시 나의 과거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있나? 아니, 물론 없겠지만…….”
로드는 다급한 목소리로 묻다가, 이내 포기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긴. 무려 1만 년이네. 인간의 나라가 세워지기도 전에 세계를 돌아다니며 나의 과거를 찾기 위해 애썼지.”
“뭔가 건지신 게 있었습니까.”
“없었지.”
“……그렇군요.”
“미련을 버리기로 했었는데, 오랜만에 과거라는 말을 들으니 흥분했던 것 같군. 현 세대의 인간이 나의 과거에 대해 알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지.”
이쯤 되니 카이가 더 궁금해졌다.
‘대체 뭘까. 그는 대체 어떤 신에게 대항했었던 걸까.’
궁금증을 참지 못한 카이가 입을 열었다.
“제가 잠시 당신의 기억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나의 기억을 말인가?”
“예. 본인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깨져버린 과거의 편린을. 저라면 읽어낼 수 있습니다.”
카이의 말에 로드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오랫동안 봐온 바에 의하면, 인간들은 거래를 할 때면 예리한 칼 같이 변하더군. 그 대가로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없습니다.”
카이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제가 원하는 것과 당신이 원하는 것은 상통합니다.”
그의 손은 순식간에 로드의 주름진 이마 위에 얹어졌다.
“당신의 까마득한 과거. 그 곳에 우리가 동시에 원하는 것이 숨겨져 있을 테니까.”
카이의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메모리 다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