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407화 (407/441)

# 407

힐통령 407화

122. 대화가 필요해(2)

때는 정우가 아직 집에서 독립하기 전.

주말이라 후줄근한 차림으로 소파에 늘어져 있는 누나와 함께 드라마 재방송을 본 적이 있다.

“지 딸도 아닌 나예를 왜 달고 가?”

“나예, 정선이 딸이예요.”

쥬르르르륵.

“이런 게 재밌다고?”

“어, 완전 흥미진진해!”

사람들이 흔히 막장 드라마라고 말하는, 자극적인 요소만 잔뜩 때려 박은 드라마들.

정우는 그런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는 누나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런 걸 몰랐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리고 음료수 줄줄 흘리는 것도 완전 어색한데?”

“모를 수도 있지. 그리고 너도 음료수 마시다가 충격적인 말 들으면 저럴걸?”

“설마, 아예 뿜으면 뿜었지 저렇게 주르륵 흘리진 않을 텐데.”

“글쎄~ 너 사람 일 모르는 거다?”

정우, 그러니까 카이의 머릿속으로 그때의 기억이 비디오처럼 스쳐 지나갔다.

쥬르르르륵.

왜냐하면, 현재 그의 입에서 자몽 주스가 흘러내렸으니까.

‘아…… 이래서 음료수가 흐르는 거구나.’

사람이 갑작스럽게 충격적인 말을 들으면, 턱이 빠져 버린다.

그 때문에 입안에 머금고 있던 음료수가 흘러내리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일대의 고요한 침묵이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

“…….”

화원이 침묵에 잠겼다.

헬릭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라샤는 재미있는 것이라도 발견한 표정으로 연신 카이와 헬릭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어…… 뭐, 뭐라고 했느냐?”

겨우 정신을 차린 헬릭이 재차 확인했다.

그러자 유하린이 두 뺨을 붉게 물들이더니, 조용히 말을 꺼냈다.

“카이 님이 저에게 고백하셨고…… 저희는 연인 사이가 되었어요.”

‘우리가 언제?’

유하린이 다소곳하게 왼손을 내밀었다.

“바, 반지도 받았어요…… 고백 반지…….”

‘왜 그런 거짓말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카이가 입만 멍하니 벌리며 유하린을 쳐다봤다.

“……음?”

그 모습을 누구보다 먼저 눈치챈 라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이 님, 잠시 이쪽으로.”

그녀는 카이의 소매를 끌고 화원에서 잠시 떨어진 곳으로 가서 물었다.

“카이 님,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반응이 왜 그러세요?”

“그야…….”

슬쩍 유하린과 헬릭을 쳐다보던 카이가 중얼거렸다.

“와, 미치겠네.”

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라샤에게 속삭였다.

“아니, 진짜로 제가 미친 걸까요? 전 고백한 기억이 없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요. 전 고백한 기억이 없어요.”

“그럼 하린 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소리세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요.”

“저 반지도 카이 님이 준게 아닌가요?”

“아, 그건 제가 준 게 맞…….”

동시에 카이의 머릿속으로 당시의 기억이 흘러 지나갔다.

약지에 끼워달라던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의 얼굴이 딱딱해지자, 밑에서 라샤가 폴짝폴짝 뛰면서 그의 관심을 끌었다.

“왜요? 왜요? 뭐 새로운 거 생각나신 거죠? 저도 알려주세요.”

“에, 에이. 설마…… 아니겠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카이가 입을 열었다.

간단하게 상황을 요약한 카이가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그 상황을 오해하지는 않았겠죠?”

“보통은 하죠?”

“하는구나!”

카이가 손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큰일 났다.’

이제 부끄러워서 하린 씨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인가.

심지어 더 큰일이 남아 있었다.

‘그때 고백한 게 아니었다고…… 말해야겠지.’

현재 유하린은 자신과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문자나 전화를 자주 하셨지.’

며칠 전에는 직접 요리를 해주고 싶다며, 언제가 괜찮냐고 물어본 적까지 있다.

그때는 단순히 친해져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후우, 그게 아니었구나.”

카이가 자리에 쭈그려 앉아 고개를 숙이자, 라샤가 마주 쪼그려 앉으며 물었다.

“카이 님은 하린 씨가 싫으신가요?”

“예? 그럴 리가 없잖아요.”

카이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하린이 오해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카이도 유하린을 좋게 봤다.

그저 동료로서, 사람으로서 좋게 보고 있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저번에 반지를 줬을 때…….’

그때 그녀의 밝고 아름다운 미소를 보며 마음이 떨렸던 건 사실이니까.

그 이후로 알게 모르게 그녀가 신경 쓰였다.

“그럼 뭐가 문제예요?”

라샤가 순진한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야…… 양심의 문제잖아요. 이런 건.”

이대로 아무 말 없이 넘어가면, 이건 유하린에게 엄청난 실례다.

“역시 제가 어떤 욕을 듣더라도, 진실을 말해줘야겠어요.”

카이가 굳은 결의를 드러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잠깐 스탑이요.”

라샤가 그의 어깨를 살포시 눌렀다.

그녀는 상냥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카이 님은 하린 님이 싫지는 않으신 거죠?”

“네.”

“만약 기회만 된다면 연인 사이로 지내실 의향도 있으시고요?”

“……네. 하지만 이렇게는 아닙니다. 정정당당하게 제가 스스로 고백을 한 뒤에…….”

“일단 들어보세요. 그럼 진실을 말씀하신 뒤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비 온 뒤 땅이 더 굳어진다고 하잖습니까. 서로 간의 오해가 풀리면 사이가 더 돈독해지지 않을까요? 그러면 그때 또 새로운 관계로 발전을…….”

“그렇군요…….”

라샤가 옅은 한숨을 쉬더니 카이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었다.

“우선, 지금 카이 님이 진실을 얘기하시면 그건 단순히 비가 오는 게 아니에요. 태풍이지.”

“……태풍이요?”

“네. 단단해질 땅이고 뭐고, 다 뜯겨 나가는 초강력 태풍이요.”

“…….”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진실을 말하고 싶다는 것도 굉장히 이기적인 생각이에요.”

“하지만 이대로 모른 척할 수는 없잖아요. 그건 하린 씨를 속이게 되는 거니까.”

“때로는 모르는 것이 약이 되는 일도 있어요. 게다가…….”

라샤가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랑에 빠진 여자를 그런 식으로 상처 주시면 안 돼요. 절대로.”

“……그럼 더욱더 말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더 큰 상처를 받기 전에.”

“왜 상처를 줄 생각부터 하세요? 그냥 말하지 마세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신을 좋아해 주는 이성에게 상처를 주지 마세요. 사랑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라구요.”

“그, 그런…….”

카이는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가는 것을 느꼈다.

마왕 앙골모아를 상대할 때도, 심지어 흑룡의 300만 대군을 상대할 때도 느껴본 적 없던 긴장감이었다.

“그래도 하린 씨에게…… 오히려 소중한 사람이니까 속이는 건 더욱더 조심해야…….”

“아, 답답해.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돼요? 결국, 카이 님이 하린 님에게 진실을 말하고 싶은 건요. 본인 스스로에게 떳떳하기 위함이예요. 상대방의 기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기적인 생각이라구요.”

“…….”

카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쩌면 라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오해에서 일어난 유하린의 착각.

그것은 자신의 실수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 실수를 바로 잡는 것은 자신에게 있어선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하린의 입장에선?

“하린 님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얼마나 창피하겠어요. 아마 스스로가 먼지가 된 듯한 기분이 들 걸요?”

“……그럼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라샤가 카이의 손을 꼬옥 잡으며 눈을 감았다.

“이 일은 저희 둘만의 비밀인 거예요. 무덤까지 가져가시는 거예요.”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요.”

“그렇게까지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신다면, 나중에 제대로 된 고백을 하시면 되잖아요. 가령…… 결혼을 할 때라던가.”

“결혼…….”

카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결혼이라.

그래, 연인의 사이가 가까워지면 언젠가 결혼을 하게 되겠지.

“……알겠습니다.”

카이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라샤의 말에 100%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쳐다본 하린 씨는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을 미안하게 만들어서 죽일 셈인가 싶을 정도로 행복해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자, 어서 돌아가요.”

라샤가 카이의 허벅지를 허리를 낑낑 밀었다.

두 사람이 자리로 돌아가자, 헬릭이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오는 것이냐?”

“비이밀.”

라샤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짓궂게 웃었다.

“무, 무엇이냐. 나도 알려줘라…….”

“어쩔까?”

헬릭이 생떼를 부렸지만, 라샤는 그녀를 놀리며 끝까지 말을 아꼈다.

“……하린 씨.”

“네?”

카이는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치자, 밝게 웃는 유하린을 향해 말했다.

“행복하게 해드릴게요.”

“……어머.”

제 손바닥으로 두 볼을 감싼 유하린이 부끄러운듯 중얼거렸다.

“지금도…… 매일 행복해요.”

말 안 하길 잘했다.

카이는 라샤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또한 자기 합리화일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행복한 감정을.

이 기분을 망치는 주범이 되기는 싫었다.

‘내가 잘하자. 최선을 다해서. 절대 울리지 말고.’

굳게 다짐을 한 카이는 세 사람과 즐거운 대화를 이어갔다.

* * *

시간이 무르익어 어느덧 땅거미가 지고, 석양이 내려앉았다.

“헬릭 님.”

카이가 그녀를 불렀다.

“웅?”

“잠시 이야기를 좀 드리고 싶은게 있는데요.”

그의 진중한 음색이 세 사람의 귓가를 울렸다.

유하린은 카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눈치챘다.

필히 뮬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리라.

“라샤 님, 이번에 칼 라샤 교단 설립을 진행하고 있는데, 몇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네, 그래요. 그럼 날도 어두워졌으니 방으로 가실까요?”

눈치 빠른 유하린과 라샤가 한 쪽 눈을 찡긋거리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두 사람이 남은 화원은 유독 거대해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화원에는 왜인지 알 수 없는 삭막함이 감돌았다.

“헬릭 님.”

“응, 말하거라.”

카이의 진지한 모습을 보일 때면, 헬릭도 장난기를 지운 모습으로 대화에 임했다.

“훗.”

그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계세요.”

“기, 긴장은 누가 했다고 그러느냐…….”

머쓱해진 헬릭이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헬릭 님 의견을 못 들어봤네요. 어떠세요?”

“뭐가 말이냐?”

“저랑 하린 씨랑 그…… 연인 사이가 된 것에 대해서요.”

“움…… 그냥 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만?”

헬릭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솔직히 의외네요…… 이제 과자랑 사탕 일일이 못 챙겨주는 거 아니냐고 울먹거리실 줄 알았는데.”

“아, 아앗…… 설마 이제 과자랑 사탕을 주는 것에 소홀해지는 것이더냐!”

헬릭이 그제서야 큰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아뇨, 그럴 리가요.”

“후유…… 그럼 다행이다.”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헬릭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대와 유하린은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두 사람 모두 내가 아끼는 이들이기도 하다.”

“저야 그렇다치고. 하린 씨는 왜요?”

“두 사람 모두 나에게 뭔가를 바라지 않으니까.”

헬릭이 태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대여. 이 대륙에는 나를 따르는 인간들이 많다. 정말 터무니없이 많아.”

그녀의 입가로 살짝 서글픈 미소가 걸렸다.

“그들은 항상 내가 무언가를 해주기를 바란다. 그 대상은 때로는 돈이 되고, 때로는 권력이 되며, 때로는 불 같은 사랑이 되기도 하지.”

고개를 든 헬릭의 눈동자로 천천히 저물어지는 태양이 반사되었다.

“하나 그대들은 그런 것이 없다. 항상 나에게 사탕이나 과자를 하나라도 더 쥐여주면 쥐여줬지, 딱히 나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지 않느냐. 그래서 대하기가 편하다.”

“과연…….”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이야기를 저번에 한 번 해주신 적 있죠?”

“음음. 아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 놀이를 하고 있을 때였을 거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놀이는 헬릭이 천상의 섬에서 심심할 때 하는 놀이였다.

어느 날 카이가 심심풀이 삼아 종이컵과 실을 이용해 전화기를 만든 적이 있었다.

그때 헬릭은 전화기를 들고 섬 끝자락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전화기 한 쪽을 제 귀에 대더니, 다른 한 쪽을 구름 밑으로 내렸다.

그러고는 그 종이컵을 통해서 인간들이 자신에게 올리는 소원들을 듣는 놀이였다.

물론 종이컵이 없어도 소원은 들을 수 있지만, 그걸 사용하는 편이 더 잘 들리는 기분이라나.

“신이란 항상 기대를 받는 존재다. 나 뿐만이 아니라 모든 신들이 그렇다.”

그럴 것이다.

인간들은 항상 그들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빌며, 갈구하니까.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기도를 하는 이들도 있지만, 개중에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신에게 기도만 주야장천 올리는 이들도 있다.

“뭐,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꾸나.”

헬릭이 카이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역시 그대와 둘이서 있는 것이 제일 편하구나. 마음이 엄청 편안해진다.”

“다행이네요. 하지만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카이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제가 다룰 주제는 헬릭 님을 조금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만.”

“우으응…… 그대니까 용서하겠느니라.”

카이는 잠깐의 고민 끝에, 자신을 용서한 귀여운 신을 바라보며 용건을 꺼냈다.

“오늘은 뮬딘, 그 녀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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