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400화 (400/441)

# 400

힐통령 400화

121. 일당백만(2)

카이는 입 밖으로 꺼낸 폭탄선언을 철회할 생각이 없었다.

실제로 그는 굉장히 오랜만에 방송을 켰다.

타이탄 길드와의 전투 이후 처음 키는 방송이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커뮤니티에 죽치고 있는, 일명 커뮤니티 백수들이 이에 가장 먼저 반응했다.

-대, 대박! 언노운이 라이브 스트리밍한다!

-뭐? 진짜? 좌표 좀 쏴줘!

-이 시기에 갑자기? 아, 랭킹 표에 나오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 해명하려는 건가?

-나도 잘 몰라! 그런데 일단 언노운이 방송 켰으면 봐야지!

믿고 보는 언노운.

우스갯소리로 유행하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현실에서는 이른 아침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등굣길부터 뭐 보냐?”

“쉿, 조용히. 지금 언노운 라이브 스트리밍 보는 중.”

“뭐? 야! 그런 게 있으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대중교통을 통해 출근, 등교를 하던 사람들도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스마트폰을 꺼냈다.

방송을 켠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시청자 수만 300만을 돌파.

순식간에 몰려드는 트래픽에 커뮤니티 서버가 비명을 지를 때 즈음.

줄곧 검은색이던 화면이 바뀌었다.

“아아, 목소리 잘 들리십니까.”

리버티아에 위치한 자신의 대저택에서 모습을 드러낸 카이였다.

고작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채팅창은 도저히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네, 들려요!

-르노 미디어의 강한수 기자입니다. 실종된 이유에 대해 해명 부탁드립니다!

-전쟁 났는데 거긴 괜찮아요?

-대체 어디 있다 오신 거예여?

-꺄악! 오빠 너무 멋있어요!

-랭킹 표를 보니 레벨 600이시던데, 지옥수라 빡사냥이라도 하고 오신 건가요?

수많은 질문이 올라왔지만, 카이는 묵묵히 자신이 할 말만을 했다.

“오늘 제가 이렇게 여러분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번 전쟁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알데바란과 라시온 사이에서 불거진 대규모의 전쟁!

카이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모든 시청자들이 귀를 쫑긋 기울였다.

개중에는 조금 더 나은 음질로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이어폰을 황급히 귀에 끼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우선…… 흑룡 길드.”

카이가 푹신한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는 팔걸이에 두 팔을 편안히 내려놓더니, 손가락으로 깍지를 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위압이 되는 그 모습에 모두가 침을 삼키는 순간.

그의 입이 열렸다.

“내가 자리 비운 사이에 귀여운 짓을 해놨더라.”

무려 300만, 아니, 2,200만 길드원을 이끌고 있는 쟈오 린을 향한 도발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냐, 사이다 방송이었음? ㅋㅋㅋㅋㅋ

-아니, 카이 형. 진심 걱정되서 그러는데 이거 뒷감당 어떻게 하시려구요;;

-아직 흑룡이 못 보지 않았을까요? 지금이라도 방송 끄시는 게…….

-지금 시청자 수가 몇인데 흑룡이 이걸 못 볼 리가 ㅋㅋㅋ

-모르겠고, 일단 팝콘이랑 콜라 사러 간다.

-난 치킨.

카이의 배짱 두둑한 발언에 채팅이 올라오는 속도가 세 배는 더 빨라졌다.

더 이상 몰려드는 트래픽을 감당하지 못한 채팅창이 한순간 멈춰버렸고.

그 모습을 쳐다보던 카이가 쐐기를 박았다.

“안쟈민의 숲에 배치해 놓은 군은 모두 물리겠다. 오늘 오후, 티노움 평야에서 결판을 내자.”

물론, 끝까지 상대방의 자존심을 긁는 도발도 잊지 않았다.

“아, 혹시라도 겁먹었다면 안심해도 좋아. 이쪽에서는 나 혼자 나갈 생각이니까.”

수백만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루어진 선언이었다.

그것은 카이 스스로 자신의 발목에 족쇄를 채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그가 모두를 속이고 군대를 매복시켜 둔다면, 설령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더라도 여태껏 쌓아온 명성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이어지는 비난의 화살 또한 피할 수 없을 테고.

“기다릴게.”

그 말을 끝으로 카이가 오른손을 뻗었고, 방송이 종료되었다.

방송은 끝났지만, 충격을 받은 시청자들은 게시판으로 몰려들어 서로 의견을 분분히 나누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감. 언노운은 흑룡 길드원이 몇 명인지 모르는 거 아님?

-그럴 수도 있어. 이미 검은 벌이랑 타이탄 길드를 깨봤으니, 같은 세계 10대 길드 출신인 흑룡도 걔네랑 비슷한 규모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그게 사실이라면…… 큰 실수했네;;

-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이 있는 법인데, 아마 카이에겐 오늘이 그날인 것 같다.

시청자들의 의견은 대부분 카이가 실수했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하나, 미련 없이 방송을 끈 카이는 여유롭게 차를 홀짝였다.

딸라앙.

저택의 현관 쪽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방문객이 있다는 소리였다.

“얘들아, 문 좀 열어줄래?”

카이의 부탁에 요정들이 꺄르르 웃으며 현관 쪽으로 날아갔다.

문을 통해서 들어온 이는 드워프 족의 대장장이들이었다.

그들은 무거운 상자들을 수십 개나 집 안으로 들여놨다.

“영주님이 부탁하신 물건들입니다.”

“흑탑주에게 직접 요청하신 물품이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카이는 그제야 웃는 낯으로 일어나 물품들을 확인했다.

“다행이네요. 늦지 않아서.”

상자를 열어 그 안의 내용물들을 바라보는 카이의 눈이 반달처럼 곱게 휘었다.

***

“수준 낮은 도발일 뿐이다. 무시하고 군 내부의 사기를 신경 써라.”

회의실에서 단주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쟈오 린의 음성은 차가웠다.

하지만 그의 분위기는 무시하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저기압이었다.

우선 항상 그의 오른쪽 자리를 지키고 있던 쿤 팽이 없었다.

‘5초 만에 당했다고…….’

이미 오프라인에서 어떻게 당했는지를 듣게 된 쟈오 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그 시간이면 나 또한 녀석을 처치할 수 있다.’

자신감을 되찾은 쟈오 린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물었다.

“왕창, 적 엘프 정찰병들의 움직임은 어떻지?”

“……카이의 방송 이후, 그의 말처럼 모두 기척이 사라졌습니다. 정황상 후퇴를 한 것 같습니다.”

“흐음…….”

쟈오 린이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렇다면 방송에서 한 말이 모두 진실이라는 건가?’

사실 그런 공식 석상에서, 몇 시간 만에 들통날 거짓말을 하기도 힘들다.

현재 미드 온라인에서 카이가 지닌 좋은 이미지와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럼 녀석이 진실만을 말했다는 것인데…… 그건 더욱 이해가 가질 않는군.’

현재 리버티아로 진격하는 흑룡의 군대는 한두 명이 아니다.

무려 300만 명.

그중 일반 병사들을 제외하더라도, 세계적인 길드를 모방한 단들만 무려 20개가 있다.

‘자신감인가, 자만심인가…….’

뭐,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은 없다.

‘이 기회를 살린다.’

쟈오 린은 카이가 거짓말을 했든, 진실을 말했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거짓을 말했다면 오늘 흑룡은 그의 위선을 전 세계에 까발릴 것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진실을 말했다면…….’

쟈오 린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오늘, 놈을 죽인다.’

토끼를 사냥하는 사자의 마음가짐으로, 방심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서 순식간에 녀석을 해치우고 리버티아를 손에 넣는다.

그것이 깔끔하고 뒤탈이 없는 것을 선호하는 쟈오 린의 방식이었다.

“한 시진 후 출정한다. 모두 준비하도록.”

***

티노움 평야에 도착한 카이는 저도 모르게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초등학생 시절,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듣던 기억이었다.

‘그때 그게 총 몇 명쯤 됐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게 대략 천 명은 넘었을 것이다.

학년별, 반별로 모두 줄 세웠으니까.

지금에 와서야 흐릿한 기억이지만,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는 건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았다.

“비교도 안 되네.”

카이가 피식 웃었다.

티노움 평야는 푸르다.

아니, 티노움 평야뿐만 아니라 라시온 왕국의 동부 지역은 대부분 푸른 평야를 지니고 있다.

왕국의 최대 곡류 생산지인 만큼, 땅이 기름지기 때문에 잔디조차 잘 자라기 때문이다.

“……까맣네.”

그 푸르고 넓던 티노움 평야가 좁아 보였다.

검은색 계열로 장비를 맞춘 수백 만의 흑룡군이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도 구경 많이 왔고…….’

저 멀리에는 가까이 오지 못하고, 망원경이나 스킬들을 통해 평야를 구경 중인 이들이 보였다.

대부분 일반 유저들이지만, 개중에는 방송국 직원들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후우우…….”

카이가 눈을 감으며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아무리 본인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지만, 저도 모르게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300만이라 이거지.’

살면서 이 정도 규모의 사람을 한자리에서 보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하물며 카이는 그 엄청난 머릿수를 적으로 돌린 채 상대해야 한다.

그것도 혼자서.

“좋아.”

그의 눈이 다시 뜨여졌을 때, 더 이상 긴장감이나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손가락 끝을 까딱였다.

올 테면 와보라는 제스쳐.

누가 봐도 이 자리에서 불리한 사람은 카이였지만, 그 단순한 행동 하나가 분위기를 바꾸었다.

마치 카이가 흑룡에게 도전을 허락한 듯한 모양새가 된 것이다.

“그렇게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백 미터 앞.

멋들어진 흑마의 안장 위에 앉아 있던 쟈오 린이 중얼거렸다.

‘모든 것을 연구했다.’

그와 흑룡 길드의 정보부는 카이에 대한 모든 정보를 낱낱이 수집했다.

그가 최초로 세상에 자신을 알린 붉은 주먹과의 일전.

그때보다도 더 먼저인 붉은 노을과의 다툼까지.

쟈오 린은 이 세상에서 카이에 대해 자신보다 잘 아는 이가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전투에서 패배할 수는 없다.’

심지어 아군의 머릿수도 훨씬 많고, 적은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전쟁이란, 싸움이란 단순히 개인의 무력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린 돌들이 모여 굳건한 성채가 되는 것처럼.

전쟁 또한 하나부터 열까지 천천히 공을 들이고 준비를 해야만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

저 멀리 점처럼 보이는 카이를 바라보던 쟈오 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죽여라.”

그 짧은 명령과 동시에 수십만 명의 흑룡군이 튀어나갔다.

단순히 뛰어가는 것만으로도 굉음이 터져 나왔고, 땅이 뒤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방심은 안 한다는 건가.”

오직 자신의 목을 노리며 달려오는 적들을 바라보며, 카이가 피식 웃었다.

“괜찮네.”

방심하는 적을 두드려 패는 것만큼 허무하고 재미없는 일도 없는 법이니까.

적들이 지척에 도착하기 직전, 카이의 손가락이 허공을 유려하게 쓸었다.

동시에 뿌옇고 검은 운무가 그의 신형을 집어삼켰다.

이제는 대부분의 유저가 알고 있는, 그의 전매특허.

“듀라한 군대인가.”

50마리의 듀라한을 소환할 때 연출되는 모습이었다.

‘녀석이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추진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지.’

지난 몇 시간 동안 계속 생각을 한 뒤 내린 답은 단 하나였다.

‘네놈은 정말로 자신이 있는 것이다.’

자신과 듀라한 군대, 그리고 소환수들.

그것을 이용해서 ‘흑룡’을 정면에서 깨부술 자신이 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깨닫게 해주지.’

그것이 얼마나 광오한 생각이었는지를.

쟈오 린의 눈동자에 살기가 번들거리는 순간.

콰아아아앙!

오십 마리의 듀라한이 전장에 난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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