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2
힐통령 392화
119. 마계의 왕(3)
마왕성 최상층.
알현실을 눈앞에 둔 카이는 가볍게 심호흡했다.
“후우.”
“뀨우.”
정수리에 딱 달라붙어있던 미믹도 함께 심호흡하며 전의를 다졌다.
‘뭐, 역소환을 당해도 큰 피해는 없으니까. 놔둬볼까.’
그렇지 않아도 미믹을 통해 실험해보고 싶었던 게 있던 참이기도 하고.
카이는 천천히 알현실의 문을 밀었다.
띠링!
[경고, 알현실에 입장할 시 전투가 끝날 때까지 로그아웃하실 수 없습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이거 참 오랜만에 보는 경고 문구네.’
카이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한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거대한 공간이 드러났다.
카이가 안쪽으로 들어서자 쿵, 뒤쪽의 문이 강제로 닫혔다.
마치 한 번 발을 들인 먹잇감이 도망가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고 할까.
‘저 녀석이 마왕?’
30미터 정도 앞.
알 수 없는 동물들의 두개골로 이루어진 옥좌 위에, 권태로운 표정의 여인이 앉아있다.
마계에 와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디자인의 뿔.
가만히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눈빛.
보기 좋을 만큼 그을린 피부에 풍성하고 긴 암적색의 머리.
마왕 앙골모아가 카이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가까이 와보거라.”
마치 자신의 신하에게 명령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카이는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겨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흐응?”
앙골모아는 카이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짤막한 탄성을 터트렸다.
“네 녀석은 악마가 아니로구나.”
“인간이다.”
“아하. 이제야 납득이 되는군.”
그녀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나의 부하들이 그리 맥을 못 추었는지 알겠어. 네 녀석이지? 키네사를 죽였다는 인간이.”
“맞아.”
“그건 대단하구나.”
앙골모아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녀의 눈에는 보였다.
눈앞의 인간이 얼마나 강대한 힘을 품고 있는지.
“인간의 몸으로 이 정도의 힘이라…… 여태껏 봐온 인간 중 가장 강하구나. 놀라워.”
“나 말고 다른 인간도 본 적이 있나 봐?”
“쥐꼬리만 한 힘을 지닌 채 중간계에 소환된 적이 몇 번 있지.”
앙골모아가 아련한 눈빛으로 과거를 회상하며 중얼거렸다.
“제법 즐거운 유희였다.”
아마 그 시대를 살아가던 인간들에게는 유쾌하지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 잡설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본녀를 찾아온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매처럼 빈틈이 없는 눈빛이었다.
“겸사겸사 손도 좀 섞어보고, 물어볼 것도 있어서.”
“여기까지 당도한 그대의 노고를 인정하는 바이다. 질문을 허락하마.”
허락이 떨어지자 카이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마왕 앙골모아. 넌 마계에서 가장 강력한 악마이자, 신들조차 경계하는 대악마로인걸로 알고 있다.”
“정확하다.”
그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은 마계 역사상 가장 찬란하고 위대한 존재였으며, 그 위명은 천계에까지 자자하다.
“그럼 묻겠다. 넌 신을 죽일 수 있나?”
“……신?”
앙골모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는 카이가 던진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고자 그를 살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도통 모르겠구나. 그 질문을 던진 이유가 무엇이더냐.”
“힘들게 머리 굴리지말고 솔직하게 대답하면 돼. 신을 죽일 수 있는지, 없는지.”
“흠. 그런 것이었나.”
상대는 정말로 자신이 신을 죽일 수 있는지, 없는지를 궁금해했다.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구나. 경우에 따라서는 가능하다고.”
카이의 눈이 반짝였다.
“그건 신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인가?”
“말했잖느냐. 경우에 따라서라고.”
“자세한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
“흐응.”
앙골모아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리를 꼬았다.
“우선 묻겠다. 그런 걸 궁금해하는 이유가 무엇이더냐.”
“뮬딘이라고 아나?”
“안다.”
단호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둠과 밤을 관장하는 파괴와 멸망의 신…….”
“그 녀석을 상대할 예정이거든. 내가.”
“푸핫.”
앙골모아의 입에서 경박한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입가를 가렸다.
“미안하구나. 너무 웃겨서…… 푸흐흡.”
“……뭐가 그렇게 웃기지?”
“하아. 다시 한 번 미안하구나. 너무 의외의 존재가 튀어나와서 웃음이 나왔을 뿐이다. 아까 내가 말했던, 경우에 따라서는 신을 죽일 수 있다는 대답을 기억하느냐.”
“기억해.”
“뮬딘과 같은 상품(上品)의 신은 그 경우에 속하지 않는다.”
“……그럼?”
“흐응, 쉽게 설명하자면.”
앙골모아가 가느다랗고 길다란 손가락으로 옥좌의 두개골을 톡톡 두드렸다.
“하위신. 더 이상 아무도 그 이름을 따르지 않는 잊혀진 신. 그들을 나의 터전인 마계로 끌어내렸을 경우, 나는 그들을 해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그럼 뮬딘과 같은 상위신은 불가능하다는 건가?”
“물론이다. 그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무리가 따르지. 신이 왜 신이겠느냐.”
“…….”
그 명쾌한 해답에 카이는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마왕조차 하위신을 해치우는 게 고작이라고?’
그것도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마계로 끌어내렸을 경우라는 조건이 붙는다.
그녀는 태양신 헬릭조차 그 힘을 경계했던 대악마.
오죽하면 헬릭은 카이를 쫓아다니며 그녀와는 절대 엮이면 안 된다고 몇 날을 귀찮게 했다.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라면 신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은 것은.
‘하지만 안 된다…… 라.’
카이는 질문을 바꾸었다.
“그럼 죽이는 건 건너뛰고, 봉인이라면?”
“봉인?”
앙골모아의 짙고 길다란 속눈썹이 깜빡였다.
“우문이로구나. 스스로 모든 걸 내려놓지 않는 이상, 그 누가 신을 봉인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는 건가?”
“아무래도 그대는 신(神)에 대한 이해도 자체가 없는 듯하구나.”
그녀는 그러면 안 된다는 듯,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천계의 신들은 모두 주신이 만들어낸 세계의 관리자. 당연히 관리자의 권한을 부여받은 초월의 존재들이다. 그들을 상대한다는 건…… 그래, 아직까지 인간들은 신분제를 고수하고 있느냐?”
“여전하지. 평민, 귀족, 그 위로 왕족.”
“그렇다면 설명하기 쉽겠구나. 네가 뮬딘을 상대하겠다고 하는 건, 한낱 노예가 신분제를 깨부수겠다고 날뛰는 것보다 무모한 일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신은 천계라는 공간에 거주하는 한,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으니까.”
“그럼 신을 인간계로 끌어내린다면 되는 문제잖아.”
이에 앙골모아가 피식 웃었다.
“그게 말처럼 쉬울까. 게다가 하위신이 아닌 이상, 천계를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죽이기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아는데?”
“그야 나도 모른다만?”
그녀가 턱을 치켜들고 뻔뻔하게 대꾸했다.
“여태껏 그 누구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니 그저 추측할 수밖에. 하지만 하위신도 아니고 상급신들이 고작 천계를 벗어났다고 해서 피해를 입을까? 본녀는 그 부분에선 부정적이구나.”
“흐음. 과연.”
고개를 끄덕인 카이가 그녀를 쳐다봤다.
“좋아. 질문은 끝났다. 솔직히 고맙네.”
“무얼. 먼 길을 찾아온 손님에게는 당연한 일이로다.”
까딱까딱.
앙골모아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럼 이제 내 용건을 말해도 되겠느냐.”
“그런 것도 있었나?”
“왜 없겠느냐.”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 자리는 고독한 자리다. 도전자의 얼굴을 본 지도 벌써 수백 년이 흘렀구나. 그저 아랫 것들에게 추앙받고, 신격화되면서 하루하루를 덧없이 보내는 권태로운 자리. 그것이 마왕의 위(位)로다.”
“방금 그 발언, 마계의 악마들이 들으면 뒷목잡고 쓰러졌을걸.”
“나는 오히려 그들이 부럽구나. 무언가를 목표로 할 수 있고,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인생의 한 페이지를 아름답게 물들일 수 있다는 뜻이겠지.”
“너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겠지. 마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말이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만은…… 아쉽게도 없구나.”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본녀는 노력이라는걸 해본 적이 없다. 그저 절대자의 운명을 쥐고 태어났으니, 절대자의 길을 걸어온 것 뿐. 이런 시시한 인생에 그 어떠한 낙이 있겠느냐.”
“……좀 재수 없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본녀는 기대가 되느니라. 멈추었던 심장이 다시 뛰는 기분이로다.”
앙골모아가 두 손을 공손하게 포갠 뒤 제 왼쪽 가슴에 올려놓았다.
“그대여. 날 즐겁게 만들어보아라.”
“노력해 볼게.”
카이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
알데바란 왕국의 국경선.
그곳의 평원에는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병력이 즐비하게 늘어서있었다.
“와…… 저게 다 몇 명이냐?”
“글쎄. 모르긴 몰라도 최소 몇 백만 단위 아니겠냐.”
“하긴. 기사난거 보니까 흑룡에서만 300만 명 끌고 왔다던데?”
“하여튼 대륙 새끼들. 머릿수는 더럽게 많아요.”
“오히려 적은 거 아니냐? 흑룡은 길드원만 2,200만 명이라고 들었는데.”
“야야. 그 중에서 알데바란에서 활동 중인 길드원은 300만 명 정도일걸? 나머지는 대륙에 골고루 흩어져서 어차피 이번 전쟁에 참여도 못해. 그리고 막말로 흑룡이 잘나가는 길드였으니 중국인들은 그냥 의무적으로 다 가입한 거지. 활동하는 사람은 지금 모인 300만 명 정도가 맞을 거다.”
“그래도 많네.”
“많지.”
언덕에 모여 알데바란 왕국의 출정식을 구경하던 유저들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기를 잠시, 왕국 소속의 백작이 성채 위에 올라가 긴 연설을 토해냈고, 알데바란 왕국에 소속된 모든 유저들의 눈앞으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띠링!
[알데바란 왕국과 라시온 왕국이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양 국가에 소속된 유저들의 관계가 적대 상태로 변경됩니다.]
[적을 죽이거나 공성에 성공하면 전쟁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획득한 포인트에 따라 전쟁이 끝난 뒤, 보상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국경선을 차지한 성채의 문이 열리고.
투두두두두!
말을 탄 NPC 기사들부터 빠르게 성을 지나갔다.
***
게임을 다루는 방송국 입장에서 이번 전쟁은 놓칠 수 없는 대어였다.
공식적으로 미드 온라인에서 일어난 최초의 전쟁이었고.
이 전쟁에 얽혀있는 인물들만 해도 하나같이 기사를 쓰기 좋은 이들 뿐이었다.
[무서운 대륙의 기상, 흑룡 길드, 무려 300만 대군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
[쟈오 린, ‘과거 아시아를 일통했던 민족의 기상을 보여주겠다.’]
[라시온 왕국에 속해 있는 세계 8대 길드들, 과연 흑룡의 머릿수를 감당해 낼 수 있는가?]
[리미트리스 캐서린, ‘메이드 인 차이나? 불량품이겠네.’ 흑룡 측 세력 비하 발언 화제.]
기사를 쓰자마자 올라가는 조회 수의 단위가 평소보다 자릿수 하나는 더 달려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커뮤니티의 반응도 전체적으로 월드컵과 비슷한 축제 분위기였다.
-오우, 드디어 전쟁인가?
-라시온 역배팅했다. 알데바란 참교육 가즈아!
└응 아니야~ 머릿수부터 겁나 밀려~
└아직도 게임을 머릿수로 하는 무식한 사람이 있네ㅋㅋㅋ 레벨 1짜리 초보자 천 명이 모여도 레벨 100의 유저 한 명 선에서 정리 가능.
└흑룡의 이미지가 좀 오합지졸이라서 그렇지, 알데바란 소속의 유저들은 수준 나쁘지 않음.
-아, 다 필요 없고 시리스 성채 전이 제일 기대된다.
└거긴 또 왜?
└듣기로는 라시온의 동부랑 남부 세력은 거기 몰빵했다고 하더라.
└아, 하긴. 거기가 지리적으로 꽉 틀어막고 버티기엔 좋지. 그런데 동부는 카이 밖에 생각 안 나고…… 남부엔 누가 있더라?
└워리어스.
└오, 빅꿀잼 예약. 근데 카이는 아직도 실종 상태 아님?
└ㅇㅇ 맞음.
유저들은 각자의 집이나 호프집에서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영상들을 보며 축제를 벌였다.
전장은 사람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치열했다.
머릿수가 더 많은 알데바란 측이 유리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북부 관문을 수성 중인 라시온 측에서 공격을 잘 막아내고 있던 탓이었다.
그 때, 후방에서 가만히 대기 중이던 쟈오 린이 행동을 개시했다.
-오, 흑룡군도 드디어 움직이나!
-여태까지 가만히 있길래 라시온 힘 빠질 때까지 대기하나 했는데, 웬일?
-뭐, 아마 무슨 생각이 있으니까 움직이는 거겠지.
사령탑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하인드 백작도 같은 생각을 했다.
“흠, 아무래도 적들이 본격적인 공세를 취할 생각인가 보군.”
아무리 늙었다지만 그는 라시온의 국경을 수십 년간 지켜온 호랑이.
그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주변 병사와 장군들에게 명령했다.
“성채 위쪽에 마법사와 궁수의를 더 배치해라. 그리고 관문 쪽에 대한 방비를 한 번 더 확인하도록.”
이런 큰 전쟁에서 출신이 불분명한 모험가들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때문에 노련한 하인드 백작은 관문 쪽 병력을 믿음직스러운 사병들로 배치해 놓은 상태였다.
‘이것으로 내부에서의 배신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가 잠시 생각을 정리할 때였다.
“크, 큰일 났습니다!”
병사 하나가 사령탑을 올라오며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공성 병기가 등장했습니다!”
“흠. 공성 병기인가.”
하인드 백작은 침착한 어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정도 규모의 전쟁에서 공성 병기의 동원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리 호들갑떨지 말거라. 관문의 성벽은 마법사들의 방어막으로 철저히 보호되고 있으니까.”
“지, 지금 성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침을 꿀꺽 삼킨 병사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공성 병기를 통해 바위 대신…… 사람이 날아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