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5
힐통령 375화
115. 가장 악마다운 악마(2)
좌중이 얼어붙었다.
키네사가 숨쉬듯 뿜어내는 강렬한 마기와 함께, 대공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 때문이었다.
마계에서는 상급, 최상급 악마만 되어도 윤택한 삶은 물론, 왕에 버금가는 삶을 누리게 된다.
그렇다면 등급에 구애받지 않는.
‘규격 외’라는 판정을 받은 이들은 어떠할까.
“표정을 보니 재미가 없었나? 나는 재미있었는데.”
그들은 스스로가 세상이라는 무대의 주인공이다.
삶 자체가 재미로 점철되어 있다는 소리다.
원하는 것은 가지고, 빼앗으며, 하고 싶은 것은 참지 않고 모두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제지할 이는 없었다.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망아지.
“……아아, 그러고 보니 힘을 드러내면 내 앞에서 못 움직이는군.”
벌레들의 수준을 오랜만에 떠올린 키네사가 은연 중 내뿜고 있던 힘을 거두었다.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억, 허억.”
“후우우…… 하아아…….”
막혀있던 숨을 겨우 내쉬게 된 악마들.
특히 대부분의 광부들은 감히 키네사를 마주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눈을 내리깔았다.
그것은 상급 악마들로 이루어진 해방군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대공이 왜 이곳에…….’
카즈라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감히 키네사에게 향하지 못했다.
자신보다 윗선의 악마인 드라켄조차 기세 좋게 노려봤던 그였지만, 상대는 대공이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악마들이 득실거리는 마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
후, 하고 숨을 불어내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먼지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존재다.
“…….”
하지만 그 상황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덱스였다.
지난 며칠간 자신을 할아버지라고 부르고 따르며, 따스한 정을 느끼게 해준 이라.
그녀가 사실은 대공 키네사였다는 사실에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기만의 악마…….’
대공 키네사는 무력 부분에 있어서는 다른 대공들에 비해 살짝 약하다는 평을 듣는다.
물론 다른 대공에 비해서 약하다는 소리.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강자존의 마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를 수식하는 단어들은 대개 교활한, 거짓말을 일삼는, 기만하는.
그는 부족한 무력을 이간질이나 간계를 이용해 메꾸었다.
덕분에 본신의 힘은 조금 밀릴지 몰라도, 이끌고 있는 세력의 크기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수준.
“대체 왜…… 그렇다면 이라는…….”
“이라? 아아, 이 모습 말하는 건가?”
키네사의 몸은 다시 덱스가 알고 있던, 귀여운 소녀로 변했다.
그녀는 사람 좋아보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러 번의 시험 결과, 이 모습이 상대의 경계를 허물기에 가장 좋더군. 어리고, 연약해 보이면서 보호본능을 일으키거든.”
싸악.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키네사가 히죽 웃었다.
“내가 벌레만도 못한 네 놈에게 접근해 살갑게 굴었던 이유는, 네가 이 광산에서 가장 오랫동안 일했기 때문이다. 알고 있는 것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고…… 솔직히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놀랐다.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지.”
“아아…….”
큰 충격을 받은 덱스가 픽하고 쓰러졌다.
광산의 텁텁한 먼지와 흙먼지 사이에 볼썽사납게 넘어진 그를 챙기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오직 키네사만이 그의 고통을 즐기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으음, 이 기분이다…….’
누군가를 속였을 때, 그리고 그 대상이 큰 충격을 받았을 때의 이 짜릿한 희열감.
상대에게 달콤한 말을 속삭이고 뒤통수를 쳤을 때의 묘한 성취감.
키네사는 예전부터 누군가가 고통받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조금 과장하자면 지금 같은 순간만이 살아있다는 감정을 느낄 정도.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키네사는 고개를 돌려 드라켄을 내려다보았다.
“수확량이 점진적으로 줄어들기에 이런 귀찮은 일까지 했는데…… 저 녀석이 제법 많은 걸 알고 있더군..”
“그, 그게 무슨…… 당치도 않습니다.”
드라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니긴. 자꾸 날 바보 취급할 셈인가?”
“저, 저 버러지가 뭐라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저는 결백…… 제 영혼을 걸겠습니다.”
“흐음. 영혼이라…… 뭐, 그렇게까지 말하니 내 너를 믿어주지.”
“대공님…….”
드라켄의 입에서 살짝 물기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뚝!
키네가사 돌연 드라켄의 뿔을 잡고 반으로 부러트렸다.
“아, 안 돼!”
악마에게 있어 뿔은 마기를 저장하는 창고.
드라켄의 뿔에 내포되어 있던 마기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갈 곳을 잃은 마기들이 새로운 주인으로 모신 것은, 그곳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악마.
키네사였다.
“믿는 것과는 별개로, 수확량이 떨어졌으니 책임은 져야하지 않겠느냐.”
“죄,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나도 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는 거.”
키네사가 인자한 목소리로 말을 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퍼어엉!
드라켄의 몸이 폭발하며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놀랍게도 키네사의 머리나 옷에는 그 잔해들이 티끌만큼도 묻지 않았다.
“벌써 죽은 놈이 어떻게 그런 짓을 다시 하겠느냐.”
빙그레 미소를 지은 키네사가 뒷짐을 지며 몸을 돌렸다.
단지 수확량이 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상급 악마의 목을 쳤다.
앞으로 여기 있는 광부들은 죽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일을 할 것이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해방군들.
키네사는 티는 안 내지만,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해방군들을 쳐다보며 웃었다.
“살고 싶으냐.”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여섯 명의 악마들 중, 절반 이상이 잠시나마 움찔거렸다.
‘살고 싶겠지.’
키네사는 마침 재미있는 놀이가 생각나서 입을 열었다.
그들을 두 편으로 갈라 서로를 싸움시킨 뒤, 이긴 자들만 살려주겠다고 할 생각이었다.
“특별히 살 수 있는 기회를…….”
“괜찮으십니까.”
그 순간, 오직 키네사라는 배우만이 활보하던 무대 위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그 사실이 불쾌해진 키네사는 단번에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휙 돌렸다.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어요?”
시야로 들어온 것은 여전히 자리에 쓰러져있는 덱스였다.
그리고 그를 부축하며 안부를 묻는 비실비실한 악마 하나.
“……허?”
가벼운 웃음을 뱉어낸 키네사가 천천히 손뼉을 부딪쳤다.
짝짝짝.
동시에 주변을 둘러보며 호응을 유도하자, 광부들이 멋도 모르고 박수를 따라 쳤다.
“다들 박수. 이 얼마나 훈훈한 장면이야.”
덱스에게 천천히 걸어간 키네사가 과장된 웃음을 흘렸다.
마치 기업의 회장이, 자신의 앞에서 실수를 범한 사원을 치켜세워주는 장면 같았다.
“마계에서 보기 드문 청년이야. 타인을 도와준다, 그야말로 해방군에서 찾는 인재가 아닌가?”
대공의 시선을 정면에서 받은 카즈라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대답이 없네. 어쩌나. 해방군에서 찾는 인재는 아니었던 모양이야.”
키네사는 무릎을 살짝 굽히고 덱스와 그를 부축한 악마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훈훈해. 그래서 보기가 좋아야하는데…… 아. 나는 왜 이런 게 꼴 보기 싫은지.”
읽고 있던 대본이 시시하다는 이유로 던지는 배우처럼, 키네사의 음성이 돌변했다.
지루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악마가 악마다워야 악마지. 지금 하는 꼴을 보면 역겨운 천계 놈들 같지 않느냐.”
“다치신 데는 없으시죠? 제 손 잡고 일어나 보세요.”
“…….”
철저한 개무시.
키네사는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언제였더라,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은.
한참을 생각하던 키네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태어나서 딱 두 번 겪어봤다.
서쪽의 대공과 마왕 앙골모아.
두 악마의 경멸 가득한 눈빛 이후로 처음 받아오는 대우다.
“그렇다면 네가 세 번째…… 아니지, 첫 번째가 되겠군.”
앞선 두 악마는 자신을 무시했지만, 그렇다고 발끈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한 마디로 기분은 엿 같았지만 찢어죽일 수 없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상대는 대공이 아니며, 마왕은 더더욱 아니다.
즉, 자신에게 거역할 힘이 없는 존재다.
‘……오히려 잘됐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앞의 비실비실한 놈을 보면 꼭 자신을 무시한 두 악마가 떠오른다.
아마 이 녀석을 찢어 죽인다면 스트레스가 많이 풀리지 않을까?
키네사가 자신의 손을 천천히 내뻗었다.
자신을 무시한 죗값을 군중들 앞에서 치루기 위함이었다.
“음?”
멈칫, 비실비실한 악마의 뒤통수를 향해 나아가던 손이 돌연 멈췄다.
상대가 무슨 수를 쓴 것은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키네사 본인이 스스로 손을 멈춘 것이다.
‘……왜?’
문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내가 왜 손을 멈췄지?’
딱히 거창한 일을 하려던 것도 아니다.
마기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버러지의 머리채를 쥐어 잡고, 천천히 괴롭히다가 최대한 잔인하게 죽일 생각이었다.
사람은 기어 다니는 개미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밟는다.
허나 자신이 개미를 죽였다는 것을 깨닫지조차 못한다.
키네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악마 몇 명을 찢어 죽이는 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
잠시 혼란스러워하던 그가 눈매를 찌푸렸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보다, 자신이 바랐던 것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감히.’
키네사가 다시 한 번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도중에 멈추지 않고 쭉 나아갔다.
허나 이번에도 실패했다.
“…….”
아까와는 이유가 달랐다.
스스로 멈춘 것이 아니라, 상대가 멈췄다.
그것도 눈빛 하나로.
고개를 돌린 비실비실한 악마가 무심한 눈동자로 키네사를 쳐다봤다.
“네 차례는 이 다음이니까. 기다리고 있어.”
뭘까, 이 기분은.
화를 내야하는데.
속에서 들끓는 이 분노를 터트려야 마땅한데.
저도 모르게 내려가는 자신의 손이 시야에 들어온다.
‘……왜?’
이번에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내가 왜 이 나약한 악마의 말에 이토록 흔들리는 거지?
키네사는 스스로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당황한 그는 저도 모르게 폭발적인 마기를 일으켰다.
“크윽!”
“커…… 흡.”
주변의 악마들이 너도나도 신음을 터트렸다.
특히 지척에 있던 해방군 상급 악마들의 눈과 귀, 코에서는 죽은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 와중에도 비실비실한 악마는 결국 덱스를 일으켜 세웠다.
툭툭, 그의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며 입을 열었다.
“대충 들어보니까 사기를 당하신 것 같은데, 부디 잘 털어내시길 바랍니다.”
“나, 나는 괜찮네만…… 그대는…….”
덱스의 두려움 가득한 시선이 청년의 어깨 너머를 향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귀여운 손녀 같다고 생각한 존재가.
자신을 도와준 청년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장면이 상상되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청년은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를 걱정하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녹아내렸다.
‘이건 대체…….’
그의 몸에서는 강렬하고 잔혹한 마기가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낯선 기운이다.
하지만 그 기운은 눈앞의 청년을 의지하고 싶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그러니 들어가 계세요.”
청년이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부드러운 손길로 덱스를 뒤로 밀어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키네사를 마주했다. 키네사의 기분도 몹시 안 좋겠지만, 그의 기분도 마찬가지였다.
‘기분이 아주 나빠.’
덱스는 누가 봐도 노인이다.
머리와 수염은 희끗희끗한 회색이고, 평생을 일했는지 손에는 굳은살이 가득하다.
‘그런데 그런 이를 골리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며 히죽히죽 웃는다라…….’
순 나쁜 새끼다.
비실비실한 악마 청년, 아니 카이는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키네사를 훈계했다.
“가정교육을 대체 어떻게 배웠길래…… 넌 부모도 없냐, 이 자식아?”
“…….”
태어나서 처음 겪는 언어의 폭력에, 키네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