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1
힐통령 371화
114. 광산(2)
슥슥, 삭삭.
헝겊과 숫돌로 열심히 자신의 검을 제련한 유하린은 마무리로 입김을 불어넣었다.
“후우우우.”
그것으로 끝.
오늘도 깔끔하게 무기 손질을 마친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검이 반짝거리네요.”
“그렇죠? 이때가 제일 좋아요. 무기 손질 마치고 나면 검이 엄청 예리해지거든요. 막 휘두르고 싶어진달까…….”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검집을 꼬옥 끌어안는 유하린.
웃음을 머금고 그녀를 바라보던 카이는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야에는 끝도 없이 펼쳐진 지평선만이 보였다.
“이곳에 마을이란 게 있긴 할까요?”
“음. 솔직히 저도 모르겠어요. 마계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장소가 똑같으니까.”
두 사람이 마계에 떨어진 지도 일주일.
그 시간 동안 꾸준히 앞을 향해 걷기만 했다.
물론 그들을 괴롭히는 악마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모두 한 줌의 재가 되어 쓰러졌다.
그런 와중에도 그들이 바라보는 경치는 바뀌지 않았다.
잿빛의 하늘, 검붉은 대지.
그것이 전부였다.
‘나나 하린 씨나, 30레벨을 넘게 올릴 때까지 조그마한 마을 하나 보이지 않다니…….’
이쯤되면 마계 지역이 완벽하게 구현된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아, 그리고 슬슬 새로운 가죽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유하린이 뒤집어쓰고 있던 회색의 가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가 새로 맞춘 장비 대신 넝마나 다름없는 가죽을 덮어쓴 이유는 간단했다.
‘마계, 지옥 같은 곳이라는 말이 사실이었어.’
지난 일주일간 학습한 바에 의하면, 마계의 공기는 굉장히 독특했다.
우선 일반적인 장비는 대기에 노출된 것만으로도 내구도가 매우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게다가 24시간 떠올라있는 붉은 달은 찌는 듯한 더위를 선사했다.
이 두 가지 악조건을 돌파하기 위해 두 사람이 마련한 대안은 다름아닌 악마들의 두꺼운 가죽이었다.
마계의 대기에 저항력이 높은 가죽은 볼품이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내구도도 제법 쓸 만했고, 무엇보다 무더운 공기를 거의 완벽하게 차단해주었다.
그런 이유로 성물들의 내구도가 무한인 카이조차 악마 가죽을 덮어써야만 했다.
가죽을 덮지 않으면 미칠 듯한 폭염에 버틸 수가 없었으니까.
“슬슬 내구도가 다해 가나요?”
“네. 아무래도 저희가 잡는 악마들의 수준이 낮아서 그런가 봐요. 길어야 이틀이네요.”
“조금 더 상위 개체를 잡아야 될 것 같아요.”
“……보여야 잡죠.”
유하린이 투정을 부렸다.
그녀의 말대로,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이 퍼졌는지 요즘은 악마들이 근처에 얼씬조차 하지 않았다.
‘악마들이 일반적인 몬스터처럼 다짜고짜 달려드는 놈들이었다면 레벨 업 속도도 훨씬 빨라졌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삼킨 카이가 고개를 돌렸다.
“……어쩔 수 없죠. 저 산에 마을이라도 있기를 기도할 수밖에.”
현재 두 사람이 목적지로 삼은 곳은 이틀 전부터 보이기 시작한 산이었다.
어찌나 거대한지, 제법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꼬박 이틀을 걷고 나서야 근처에 도착했다.
“이제 마을은 바라지도 않아요. 제발 상급 악마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기왕이면 가죽을 많이 뜯어낼 수 있는 큰놈으로요.”
파사삭.
유하린이 만지기만 해도 바스러져 가는 가죽을 쳐다보며 울상을 지었다.
***
거대한 규모의 광산이었다.
개발이 완료되어 채굴 중인 갱도의 수만 여덟이었고, 새롭게 파고 있는 갱도는 열셋.
이 정도 크기의 광산은 드넓은 마계에서도 족히 100위 안에 드는 엄청난 규모였다.
“서둘러!”
“끄응, 몇 시간 쉬지도 못했는데…….”
여유로운 마계 대악마들에게는 시간의 구분이 없다지만, 그건 대악마들의 경우일 뿐.
노예처럼 부려지는 하급 악마들은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시간을 지켜야만 했다.
그것이 이유였다.
“정렬!”
“줄 하나 제대로 못 맞추나!”
“이래서 쓰레기들은…….”
짜악!
채찍과 단봉을 장비한 감독관들의 잔소리를 들으며, 물경 천에 다다른 하급 악마들이 헐레벌떡 광산의 입구로 모여들었다.
“다 모였나?”
“예! 관리자님.”
갱도에서는 누구도 덤빌 자 없다는 감독관들이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마계에서 악마들의 등급을 가리는 것은 단연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을 구분하기 쉬운 방법은, 머리에 달려 있는 뿔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힘이 강력한 악마들은 최소한 하나씩 지니고 있는 것이 뿔이었기 때문이다.
이 뿔은 상위종으로 갈수록 크기가 거대해지거나 숫자가 많아지거나, 혹은 형태가 더 멋있어지는 식으로 변해갔다.
“오셨습니까!”
“일동, 관리자님께 인사!”
감독관들이 허리를 꾸벅 숙여 자리에 등장한 관리자에게 인사했다.
뿔이 달려있는 머리를 내린다는 것은 곧 복종한다는 의미였다.
“음.”
감독관들의 머리에 박힌 뿔들이 성인 남성의 손가락 하나 크기인 반면, 막 등장한 관리자의 이마에는 그들보다 족히 세 배는 두꺼운 뿔이 박혀있는 상태였다.
“오늘도 관리자님의 뿔은 멋있군.”
“나도 언젠가 저렇게 우람한 뿔을 가지는 것이 꿈이다.”
존경과 두려움이라는 모순적인 감정을 한몸에 받은 관리자는 콧김을 짧게 뿜어냈다.
키네사 대공이 다스리는 마계 남부의 악마 서열 152위.
바로 그들이 위치한 제4 광산을 관리하는 드라켄의 정체였다.
“흐으음.”
무언가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악마들을 훑어본 드라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어라, 쓰레기들아.”
꿀꺽.
여기저기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단이 난 것이다.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드라켄의 기분이 이리 좋지 않을 때면 악마 몇은 반드시 죽어 나갔다.
“9광산과 비교했을 때 면적과 인부의 숫자가 족히 두 배는 많은 우리 광산의 저번 달 생산량이, 놀랍게도 9 광산과 비슷하더군.”
그 끔찍한 발언에 악마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부디 드라켄의 잔혹한 손속이 향하는 곳이 자신만은 아니기를 바라면서.
“허나 난 너희 쓰레기들을 탓하지 않겠다.”
드라켄이 희미하게 웃었다.
물론 그 미소를 바라본 악마는 몇 없었다.
대부분이 두려움에 떨며 고개를 숙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촤아아아아악!
드라켄이 가볍게 손을 들자, 어디선가 분수가 치솟는 소리가 들렸다.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 뭘 알겠느냐. 너희를 사용하는 녀석들이 머저리인 탓이겠지.”
심드렁하게 말을 내뱉는 그의 손에는 감독관 하나의 머리가 들려있었다.
자신이 죽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감독관의 몸뚱이가 잠시 후 뒤로 넘어갔다.
드라켄은 들고 있던 악마의 머리를 뒤로 던지며 감독관들을 하나씩 노려봤다.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감독관들은 몸을 덜덜 떨었다.
아무리 뿔이 있는 악마라고 할지라도, 절대적인 강함을 지니지 못한 존재는 결국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에게 언제든지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마계였다.
“어이, 감독관들.”
“네헤…… 네!”
공포에 목소리가 갈라진 감독관들이 억지로 소리를 쥐어짜냈다.
“수확량 늘려라. 이번 달에도 날 실망시킨다면, 너희들의 목을 전부 날려 버리겠다.”
“며,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넓으신 아량에 가, 감사를…….”
살해당한 것이 자신이 안도감과 생명이 연장되었다는 소소한 기쁨.
그다음으로 느껴진 것은 분노였다.
쓰레기 같은 하급 악마들 때문에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졌다는 데에서 기인한 순수한 분노.
“쓰레기들 관리 잘해라. 난 두 번 말하지 않아.”
“예!”
감독관들에게 강렬한 본보기를 보여준 관리자가 이번엔 악마 노예들을 쳐다보았다.
“명심해라 쓰레기들. 마계에선 한 번 쓰레기가 영원한 쓰레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강자로 태어난 이가 약자로써 죽기도 하고. 약자로 태어난 이가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강자로서 군림하기도 한다.”
쿵, 쿵.
드라켄이 연설대를 돌아다니며 소리쳤다.
“도태되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의 유능함을 증명해라!”
그는 이어서 근처에 있던 감독관 하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허, 허억……!”
“보아라! 실제로 너희들을 감독하는 이 녀석들 역시 한때는 너희처럼 하루종일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마정석만 캐던 놈들이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했고, 강해지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태어나기를 쓰레기로 태어났지만, 이들은 스스로의 운명을 바꾸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스스로의 노력으로 말이다!”
그것은 일종의 동기 부여였다.
하루살이처럼 갱도에 처박혀 마정석만 캐는, 하급 악마들을 위한 달콤한 속삭임.
“기회를 주지. 이번 한 달 동안 가장 많은 마정석을 캐내는 3명에게 뿔이 돋아날 만큼의 마정석을 지급하겠다.”
“……!”
그것은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노예들이 하루 20시간 가까이 꼬박 일해도 받는 것은 고작 마정석 부스러기가 전부다.
그걸 먹고, 기력을 약간이나마 보충한 뒤 다시 네 시간 후에 일을 나가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죽어 나가는 이들은 하루에만 수십이었다.
미래라고는 없는 그 암울한 이들에게 뿔이 돋아난다?
더 이상 노동을 할 필요도 없고, 삼시세끼 밥을 꼬박꼬박 챙겨 먹을 수도 있다.
바퀴벌레처럼 모여서 하루 네 시간 동안 쪽잠을 자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달콤한 말보다도 확실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생을 구제할 유일한 기회였으니까.
“뿔이 돋아날 정도의…… 마정석…….”
“뿔만 돋아나면…… 달라질 수 있다.”
“3위다, 무조건 3위 안에 들어간다.”
드라켄의 말을 들은 악마 노예들은 당장이라도 갱도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를 의지하던 이들이, 한순간에 경쟁자로 돌변한 것이다.
항상 흐리멍텅하던 이들의 눈빛 자체가 확 바뀌었다.
그 안에 깃든 것은 단연 탐욕과 욕망이었다.
그런 노예들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쳐다보던 드라켄이 소리쳤다.
“가라! 가서 너희들의 쓰레기 같은 미래를 바꿔봐라!”
“와아아아아아!”
악마 노예들은 쏜살같이 각자 배정받은 갱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순식간에 휑해진 광산의 입구에서, 드라켄이 입을 쭈욱 찢었다.
“병신들아. 봤느냐? 무턱대고 채찍질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이렇게 근사한 당근을 내밀 줄도 알아야지.”
“네, 네…….”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 쓰레기들에게 그만한 마정석을 지급한다면, 결국 수확량 자체는 큰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닐지…….”
제법 똘똘한 감독관 하나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묻자, 드라켄이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끝까지 병신 같구나. 대공께 납품하기도 벅찬 마정석을 내가 왜 나눠줘야 하지?”
“예에? 그, 그럼 아까 하신 말씀은…….”
“어차피 지난 달 수확량이 마음에 안 들어서 싹 다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그냥 죽이기는 아까우니 한 달 정도 바짝 부리려는 것이고.”
“여, 역시 드라켄 님이십니다.”
“정말 악마 같습니다.”
“타고난 대악마……!”
감독관들의 아부를 듣던 드라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악마로 태어난 이상 악마답게 살아야지. 그것이 바로 마계의 율법이니까.”
***
까앙, 까앙!
좁고 어두운 갱도.
허리를 펼 정도의 공간도 안 되는 곳에서 곡괭이를 힘겹게 휘둘러야 한다.
아무리 악마들의 신체가 인간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다고 해도, 기껏해야 하급 악마들이다.
신체 능력은 인간 왕국의 기사와 비등한 수준.
당연히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끄응…… 나 죽네.”
“어우, 할당량이 뭐 이리 늘었어.”
“미치겠군.”
겉보기에는 어제와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광부들 사이에는 미묘한 선이 그어진 상태였다.
그야 목적지 없이 표류하는 배와 목적지가 확실히 정해진 배는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허억, 허억…….”
그 와중에 늙은 악마 하나가 쓰러졌다.
사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악마였다.
평소에는 마정석을 더 캔다고 득이 될 게 없었기에 악마들은 조금씩 자신의 몫을 늙은 악마에게 나눠주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모두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한 번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
늙은 악마도 차마 마정석을 나눠달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이곳은 마계니까.
약하면 도태되고, 죽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무한경쟁사회였으니까.
‘그래도 고마우이.’
늙은 악마는 속으로 조용히 감사를 표했다.
지금은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지만, 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태까지 살아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비록 실패한 악마였지만, 그대들은 꼭 강해지게나.’
몸과 마음은 지난 수십 년의 노예 생활로 지친 상태였다.
오히려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담담했다.
늙은 악마는 자신이 평생을 바래왔던 것처럼, 곡괭이를 손에서 놓고 허리를 쭉 폈다.
신장이 작은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이! 거기 누가 허리 펴도 괜찮다고 했지!”
당연하게도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감독관 하나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왔다.
“허허…….”
이왕 죽을 거라면,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서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
그렇게 생각한 늙은 악마에게 감독관이 호통을 쳤다.
“누가 허리를 펴도 좋다고 했지?”
“저는…….”
“오늘 할당량을 다 채웠으니 이리 당당한 거겠…… 음?”
늙은 악마의 소쿠리를 뒤져보던 감독관이 멈칫했다.
“다…… 채웠군.”
“……?”
“쯧. 그래도 남은 시간이 있으니 더 일해라!”
늙은 악마를 신경질적으로 밀친 감독관이 사라지자, 그는 자신의 소쿠리를 쳐다보았다.
‘아니, 이게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도 본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텅 비어 있던 자신의 소쿠리에는 하루치의 마정석이 들어 있었으니까.
그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볼 때, 그와 눈이 마주친 악마가 하나 있었다.
인간형의 악마였는데, 당연하지만 머리에는 뿔이 달려 있지 않았다.
키는 자신과 비슷할 정도로 조그마한 아이였다. 그것도 여자아이.
그녀는 늙은 악마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한 달 동안, 제가 될 수 있는 한 도와드릴 테니까.”
“너는 대체…… 아니, 그것보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대체 왜 나를?”
“제가 어제 잡혀 와서 모르는 게 참 많아요.”
살포시 웃음을 지어 보인 그녀는 늙은 남자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여기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것이 할아버지라고 들었거든요. 앞으로 이것저것 좀 많이 가르쳐주세요.”
“나라도 도움이 된다면야…… 아, 내 이름은 덱스라고 한다.”
“……제 이름은 이라. 이라라고 불러주세요.”
하얀 머리칼을 지닌, 홍안의 소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