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7
힐통령 357화
110. 준비(3)
[잠깐.]
데스몬드가 다급히 손을 들어 다가오는 카이를 멈춰 세웠다.
“왜?”
[지금 네 놈은 뭔가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크나큰 착각?”
[그래. 혹시 내가 네놈을 따라온 이유를 기억하는가?]
“물론이지. 나는 너에게 선량한 인간들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바로 그거다! 너는 내게 이 세상의 인간이 모두 악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헌데 어찌…….]
가늘어진 데스몬드의 눈매는 의심으로 그득했다.
[소환될 때마다 인간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는 것 같군.]
“왜지? 아…… 그거 혹시 나 때문인가?”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버럭 소리를 지른 데스몬드가 팔짱을 끼며 턱을 치켜들었다.
[아무래도 네놈과 나의 이해관계는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 것 같군. 그러니 나는…….]
“킁킁.”
[……?]
데스몬드가 슬쩍 시선을 내려 자신의 허리 부근을 바라봤다.
아담한 체구의 여인 하나가 그의 옷자락을 꼬옥 쥔 채 냄새를 맡는 중이었다.
“냄새 난다. 순혈 냄새.”
고개를 들어올린 코로나와 데스몬드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반짝거리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던 데스몬드는 그녀를 슬쩍 밀어내며 카이에게 말했다.
[……이 녀석은 또 뭐냐. 저리 치워라.]
그런 그를 무시한 채, 코로나는 카이와 협상을 시작했다.
“피를 그냥 주진 않겠지?”
“물론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죠.”
“뭘 원해.”
“드워프들과 적응형 무구를 개발 중이시죠?”
“응. 네 영지에도 프로토 타입 몇 개 보냈잖아.”
그렇구나.
영지에 가질않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그것 좀 최대한 빠르게 완성시켜 주세요. 듀라한 군단에 입혀줄 생각이거든요.”
“미, 미쳤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야! 그게 얼마짜린데…….”
코로나가 드물게 당황하며 소리치자 카이가 태연스럽게 되물었다.
“얼마 짜린데요?”
“판매가로 개당 4천 골드를 염두에 두면서 만드는 중이야.”
“4천 골드라.”
개당 4억, 50마리면 200억인가.
‘그 정도 돈을 투자할 가치는 있지.’
심지어 나중에 되팔더라도 반값 이상은 받을 정도로 퀄리티가 뛰어나다.
게다가 그가 생돈 200억을 투자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완성되면 제 몫으로도 몇 개 나오지 않아요?”
“……30개 주기로 했잖아. 계약서 읽은거 맞지?”
“물론이죠.”
카이가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20개만 더 사면 되네.’
덩달아 내야할 돈도 80억으로 내려간다.
마음이 편-안해진 카이가 입을 열었다.
“대신 기간은 2주 드릴게요.”
“에이씨, 2주 만에 그걸 어떻게 만들어!”
코로나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카이는 지난 날 파사낙스로부터 위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마법사라는 족속은 쪼아대면 결과를 내놓기 마련이거든.’
실제로 지난 날 코로나는 두 달만에 말도 안 되는 반지를 제작한 바 있다.
때문에 카이는 강하게 나갔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저도 뱀파이어 군주와 관계가 나빠지면서까지 피를 뽑는 건 영…….”
[간만에 기특한 말을 하는군.]
데스몬드가 흡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코로나가 깜짝 놀라 데스몬드를 쳐다봤다.
“배, 뱀파이어 군주라고?”
[쯧. 고귀한 존재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를 못하는군. 이래서 인간이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를 올려다보는 코로나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너, 넘어가면 안 됨. 넘어가면 저번처럼…….’
지옥 같은 스케줄의 작업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 연구 중인 이론을 완성하려면 신선한 뱀파이어의 피가 꼭 필요했다.
게다가 개체의 격이 높으면 높을수록 좋았으니, 뱀파이어 군주의 혈액이라면 최상급 재료다.
아마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구할 수 없겠지.
결국 이러니 저러니해도 진리를 탐구하는 마도사, 코로나는 이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입을 열었다.
“조, 좋아.”
“오케이. 무르기 없습니다?”
“하지만 2주는 날 때려죽여도 무리야. 게다가 연구 중인 이론이 완성되면 적응형 무구에도 탑재시킬 예정이니 너에게도 손해가 아냐. 그러니까 혈액이랑 5주의 시간을 줘.”
“3주.”
카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코로나는 흐응,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거참 고집 세네. 어쩔 수 없지. 4주로 해줄게.”
“3주.”
카이의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단호하자, 코로나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어, 어어…… 그럼 우리 중간에서 만나면 안 될까? 25일 어때?”
“3주.”
“너무해!”
“데스몬드, 가자.”
카이가 진짜 방을 나서려하자, 코로나가 그의 소맷자락을 꽉 붙들고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3주…… 콜…….”
“아이구. 우리 유능하신 흑탑주님은 3주면 충분하죠. 전 믿고 있었어요.”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한 카이는 코로나의 어깨를 주무르며 힘을 북돋아줬다.
[으음. 역시 인간이란 존재는 악한 것이…….]
데스몬드가 중얼거리자, 카이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움찔.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듯한 그 눈빛에 데스몬드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차, 참고로 뱀파이어가 되어서 자신의 피를 뺏기는 건 일족의 수치…….]
“뺏기는 게 아니야. 내가 너에게 피를 뺏을 리가 없잖아.”
스르릉.
검을 반 바퀴 돌린 카이는 검 손잡이가 데스몬드에게 향하도록 만든 뒤 부드럽게 웃었다.
“네가 만들어서 주면 되잖아.”
[누굴 바보로 아나! 결과는 같은 것 아닌가!]
이게 안 속네.
카이는 데스몬드가 격렬하게 반항하자 뚱한 표정을 지었다.
“자꾸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나 너무 슬픈데. 난 네 부탁대로 뱀파이어 일족도 살려주고 옷도 돌려줬어.”
[그 이후의 행동을 생각…….]
“그래. 생각해봤어. 그런데 내가 너한테 잘못한 거라고는 소환해서 머리 한 번 밟고, 옷 잠깐 빌려입은 것 밖에 없더라고. 설마 그거 가지고 삐진 거야? 그것도 뱀파이어 일족의 군주가? 내 머리 한 번 밟고, 내 옷 뺏어가 그럼.”
“음. 그게 사실이면 군주치고는 굉장히 속이 좁은 것…….”
카이의 소매를 꽉 붙들고 있던 코로나까지 가세해서 중얼거렸다.
[무, 무슨…… 누가 삐졌다고……!]
항상 창백한 안색을 자랑하던 데스몬드의 얼굴은 귀까지 벌개진 상태.
그는 카이가 내민 검을 잡더니 자신의 손바닥을 가볍게 그었다.
촤아아아악.
피가 빠르게 흘러내리자, 코로나가 잽싸게 대야를 들고 다가가 이를 몽땅 받아냈다.
[나는 뱀파이어들의 군주. 고작 인간 따위가 사소한 실수를 몇 번 한 걸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 이것이 군주의 그릇이며, 배포다.]
“와…… 순간 오해할 뻔했잖아. 역시 대단하다. 한때는 적이었지만 존경해.”
카이가 박수를 세 번 짝짝짝 쳤다.
목소리에 담긴 영혼은 다소 부족했지만, 그는 코로나를 슬쩍 부추겼다.
눈치를 받은 코로나도 피를 받으며 냉큼 입을 열었다.
“와, 와아아…… 뱀파이어 군주의 그릇. 너무 커다래.”
[흐, 흐음. 고작 이런 걸 가지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데스몬드의 얼굴에서 붉은 기가 사라졌다.
그는 자꾸만 승천하려는 입 꼬리를 억누르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
[협상 스킬이 상승했습니다.]
[협상 스킬이 중급 2레벨이 되었습니다.]
[화술 스킬이 상승했습니다.]
[화술 스킬이 중급 1레벨이 되었습니다.]
“음. 의외의 소득.”
흑탑을 나서는 카이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대야 하나를 꽉 채울 정도로 피를 쏟아낸 데스몬드는 찜찜한 표정을 지며 역소환당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노예 계약에 사인까지 끝낸 코로나는 그가 떠날 때까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얻은 것만 잔뜩이야.’
카이 입장에서는 흥이 안 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안타까운 점이 하나 있다면, 적응형 무구가 완성되기 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 정도.
‘하지만 배달해주기로 했으니까.’
마탑은 교단과 마찬가지로 어느 왕국이나 제국에 속해있지 않은 독립적인 세력이다.
당연히 마탑의 NPC들은 제국 너머의 암흑 대지에서도 활동을 할 수 있다.
때문에 카이는 50여 개의 적응형 무구를 배달 받기로 약조한 상태였다.
‘하루 늦을 때마다 한 개씩 추가.’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새로운 스킬들도 배웠고, 장비 점검도 끝났으니까.
카이는 망설일 것 없이 메시지창을 켰다.
[카이 : 저는 준비가 다 끝난 것 같은데, 하린 씨는 어때요?]
[유하린 : 음. 저도 경매장에서 성기사 장비 다 샀어요. 어디서 만날까요?]
[카이 : 바로 타르달 님한테 찾아가죠. 아쿠에리아의 저택으로 와주세요.]
[유하린 : 바로 갈게요.]
신출귀몰을 통해 타르달의 저택 앞에서 기다리고 있자, 유하린은 금방 도착했다.
“헉헉. 되게 빨리 오셨다. 혹시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들어가시죠.”
카이는 앞장서서 저택으로 들어섰다.
타르달은 마당에 위치한 인공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못에는 화려한 비늘색을 지닌 물고기들이 마음껏 헤엄치는 중이었다.
카이는 유하린과 시선을 한 번 교환한 뒤, 그에게 다가갔다.
“무엇을 그리 보고 계십니까.”
타르달은 슬쩍 고개를 돌려 두 사람에게 눈인사를 하더니 다시 물고기를 쳐다봤다.
“물고기를 보고 있네. 가끔씩 보고 있으면 신기하지 않은가.”
“무엇이 말입니까?”
“저 물고기들에게는 이 연못이 세상의 전부일세. 그들은 저택 밖의 개천이나 호수도, 심지어 바다라는 세상도 알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지.”
타르달이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일세. 대부분의 주민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이나 도시. 혹은 왕국을 벗어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게 되지. 그래서 나는 가끔 모험가들이 부럽네.”
뒷짐을 진 그는 천천히 등을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갔다.
“좀 걷지.”
오늘의 타르달은 평소보다 조금 더 진지해 보였다.
언뜻 보기엔 슬프다고 생각될 정도.
때문에 카이와 유하린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그를 따라갔다.
“역사서는 오곤 제국과 칼데란 제국을 최초의 나라라고 기록하고 있네.”
“괜히 제국이 아니군요.”
“하지만 알 수 없는 문자로 이루어진 고대의 문헌들을 보면, 분명히 나름의 규칙이 있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그들이 독자적인 언어 체계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까?”
“똑똑하군. 맞네. 게다가 그들은 발전된 문명 또한 지니고 있었어. 칼데란과 오곤 제국은 그들이 남긴 유산을 절반씩 나눠가진 나라들이니 확실하네.”
그의 설명에 유하린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럼…… 고대의 왕국은 마법과 무력. 이 두 가지 힘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는 뜻인가요?”
“아직까지 역사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네. 탁상공론일 뿐이지.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잊혀져버린 역사라…… 아쉽군요.”
“허나 시간이 지나면 밝혀질 역사이기도 하지.”
우뚝. 걸음을 멈춘 타르달이 천천히 몸을 돌려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대륙의 북쪽에는 오곤 제국과 칼데란 제국이 있네. 거기서 조금 더 북쪽으로 가면, 외부인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는 고집 센 땅이 나오지.”
“암흑 지대군요.”
“맞네. 최근에는 죽지 않는 모험가들에 의해 조금씩 그 땅의 비밀이 밝혀지고 있다고 들었네.”
“제 생각엔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현존하는 최상위 랭커들도 암흑 지대의 외곽 부근.
전체의 2% 정도 될까 말까 한 곳을 겨우 탐사하는 수준이었으니까.
“……지난번에 자네와 난 아트록의 영혼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
“예. 타르달 님께서 자료를 알아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타르달이 뒤쪽을 향해 손짓하자, 어둠추적자 단원이 다가와 공손하게 서류를 건넸다.
“받게.”
카이와 유하린은 똑같은 서류 뭉치를 각각 하나씩 받았다.
“그 정보를 모으기 위해, 조사단원 82명이 목숨을 잃었네.”
멈칫. 아무 생각 없이 서류를 넘기려던 카이의 손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트록이 정말 리치가 된 것이 맞다면. 암흑 지대의 중앙 부근에서 강렬한 어둠의 기운을 뿜어대는 무언가가 그의 ‘영혼함’일 걸세.”
툭툭, 타르달은 묵직한 손으로 카이와 유하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부디, 단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게.”
띠링!
[암흑 지대 조사]
등급 : S-
82명의 어둠추적자 조사단원은 암흑 지대에서 목숨을 바쳐가며 정보를 긁어모았습니다.
그들이 알아낸 정보에는 암흑 지대의 중앙 부근에 강렬한 어둠의 기운을 뿜어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뿐입니다.
하나, 아트록이 정말로 저주받은 불사의 존재가 된 것이 맞다면 그것은 그의 영혼을 보관해 놓은 ‘영혼함’일 것입니다.
암흑 지대를 탐사하여 조사단이 알아낸 정보가 맞는 것인지 확인하십시오.
퀘스트 성공 보상 : 레벨 10 증가, 명성 대폭 증가, 골드와 아이템 보상.
퀘스트 실패 시 : 타르달의 호감도 하락, 어둠 추적자로부터 신뢰도 하락, 명성 하락.
카이는 슬쩍 고개를 돌려 유하린을 쳐다보았다.
작고 여린 손가락으로 서류철을 꽉 쥐고 있는 그녀의 눈은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중이었다.
그때 타이밍 좋게 그녀가 고개를 돌렸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이거 해요. 하고 싶어요.’
‘……해야죠.’
눈빛만 나눴을 뿐인데 마치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은 듯한 기분을 느끼며.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 저희가 맡겠습니다.”
띠링!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파티원 ‘유하린’ 님과 함께 퀘스트를 진행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