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339화 (339/441)

# 339

힐통령 339화

104. 슈퍼 루키(2)

미드 온라인의 결투장은 그 어떤 나라에도 속해있지 않은 독립된 공간이다.

실제로 도시의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해 결투장으로 이동하면, 바다 어딘가에 떠있는 둥글고 넓은 섬으로 소환된다.

현재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카이도 마찬가지였다.

결투장으로 이동한 카이는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들리는, 긴 계단 밑으로 텔레포트 되었다.

‘이게 그 유명한 도전자의 계단이구나.’

아무리 결투장에 대해 문외한인 카이라도 들어본 적 있었다.

한 달마다 리그 챔피언의 동상을 새롭게 전시하는 이 도전자의 계단에는…….

“죄다 캐서린이네.”

무려 52개의 캐서린 동상이 세워져있었다.

누가 보면 도전자의 계단이 아니라, 캐서린 박물관인 줄.

제각각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캐서린 동상들을 모두 지나치면 그곳이 나온다.

우글우글.

“어서 와라! 해상 결투장에!”

“거기 모험가! 미친개들의 전장에서 챔피언이 되어볼 생각 없나?”

“배당률 대박! 승부 예측 골드 받습니다! 인생 역전의 기회!”

사람들이 벌레처럼 우글거리는 결투장의 입구가.

‘많기도 해라.’

카이는 대륙 전역에서 모여든 다양한 사람들을 뒤로한 채, 접수대로 향했다.

“도전자로군. 어수룩한 기색을 보니 결투장은 처음인가?”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는 거한이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카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처음이라면 노말 매치를 하면서 감을 잡는 걸 추천하네,”

“노말 매치와 랭크 매치의 차이는 점수가 있다는 게 전부인가요?”

“음…… 솔직히 말하자면 랭크 매치의 경기 수준이 훨씬 높긴 하네.”

“그럼 랭크 매치로 부탁드립니다.”

카이의 말에 거한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크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크큭, 이거 제법 놀 줄 아는 놈이었군. 좋다! 랭크 매치로 등록해주지. 이름이나 얼굴을 공개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저쪽에서 가면이나 투구를 구매해서 익명으로 참가할 수도 있다.”

“익명 참가요?”

카이는 거한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다양한 종류의 마스크와 투구가 걸려 있었다.

“저건…….”

카이는 홀린 것처럼 한 투구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크하하하! 거한 특유의 웃음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자네도 그 투구가 마음에 드나? 모험가의 몸으로 최초로 백작의 자리까지 올라간 카이 백작이 예전에 즐겨 쓰던 투구의 레플리카라네. 당시 활동명은 언노운이었기에, 우린 편의상 언노운의 투구라고 부르지.”

“……사람들이 이거 많이 씁니까?”

“물론이지. 익명 신청자들 중 태반이 그걸 쓴다. 카이 백작은 그만큼 유명하니까.”

“그렇군요. 그럼 익명 참가하겠습니다.”

“알겠다…… 음?”

슥슥, 선수 등록을 마친 거한이 고개를 들었을 때, 카이는 이미 자리를 떠난 상태였다.

그는 여전히 한쪽 벽면에 여전히 걸려 있는 언노운 투구를 보며 껄껄 웃었다.

“녀석도 참. 너무 긴장해서 투구를 사가는 것도 잊었나 보군. 뭐, 다시 돌아오겠지.”

***

아쉽게도 카이는 투구를 사러 되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화장실에 들어간 그는 인벤토리에서 칠흑의 놀 투구를 꺼내 자신의 머리를 덮었다.

‘이걸 착용하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네.’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함께 보냈던 장비다.

어찌 애착이 가지 않겠는가.

변장(?)을 마친 카이는 곧장 결투장으로 향했다.

“선수 대기실은 이쪽입니다.”

결투장 안쪽으로 들어서자 길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관람석과 선수 대기실.

그 앞에서 안내역을 맡은 NPC는 카이를 오른쪽으로 보냈다.

“저 포탈로 들어가면 됩니다.”

선수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기실의 방도 많았다.

당연히 그 방까지 걸어가는 것은 비효율적.

선수들을 각자의 방으로 텔레포트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카이가 대기실로 텔레포트 되자 대기실 안에 있던, 서른이 살짝 안 되는 유저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봤다.

카이의 전신을 훑어본 그들의 시선은 언노운의 투구에 멈춰 섰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기실은 비웃음으로 가득 찼다.

“나참. 언제 적 언노운인지.”

“유행에 뒤쳐져도 한참 뒤쳐졌군.”

“쪽팔리지도 않나.”

“쯧, 저걸 쓴다고 지가 언노운이 되는 건 아닌데 말이지.”

덕분에 관심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관심을 꺼주면 나야 고맙지.’

조용히 자리에 앉은 카이는 선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며 살짝 걱정했다.

‘일단 후이 관장님이 가라고해서 오기는 했는데…… 이런 곳에서 정말 나 자신이 닳아 없어질 수 있을까?’

솔직히 아무리 둘러보아도 위협이 될 만한 이가 보이지 않았다.

‘랭크 매치의 점수가 좀 더 높아지면…… 거기엔 강자가 있으려나.’

랭크 매치 점수를 올리는 법은 쉽다.

경기에서 이기면 올라간다.

높은 점수를 지닌 상대를 이기면 더 많이 올라간다.

단, 점수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패배했을 때 잃게 되는 점수 또한 커진다.

그것이 캐서린의 대단한 점이다.

단 한 번도 패하지 않고 3,000이라는 점수를 손에 넣었으니까.

그 때 대기실의 문은 열고 들어온 관리자가 소리쳤다.

“베니쉬 선수! 경기 잡혔습니다! 나와주세요!”

그 이름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난 건 다름 아닌 카이였다.

“여기 있습니다.”

관리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그에게 선수들이 예의상 응원을 보냈다.

“뭐, 열심히 해보라고.”

“대기실에서 구경 정도는 해주지.”

“결투장에서 구르다보면 패배 몇 번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그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법이니까.”

까딱.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이에 화답한 카이는 긴 복도를 지나 경기장 위로 올라갔다.

관객석에는 이미 수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차있었고,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함성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루크! 가라! 너한테 걸었다!”

“알아봤는데 베니쉬 저 녀석, 결투장 첫 무대더라고. 크하하! 꽁돈 벌었다!”

“뭐라고? 이런 젠장, 어쩐지 배당이 높더라니! 야! 언노운 대가리! 지면 뒤진다!”

“언노운이시여. 제발 저 허접에게 언노운의 가호를 내려주시길…….”

그 때 사회자가 경기장 위로 올라서며 카이의 상대를 가리켰다.

“랭크 포인트 853점! 초속의 검사 루크!”

“와아아아아아아!”

“저 녀석 검술이 기가 막혀. 보고 있으면 정말 현란하다니까.”

“확실히 루크 녀석은 시간이 지나면 2천 점 정도는 모을 수 있을 거야.”

관중들의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이에 맞서는 상대는 놀랍게도 이 경기가 데뷔 무대! 익명 참가자, 베니쉬이이이이! 랭크 포인트는 기본 500점!”

“우우우우우!”

“이 새끼들아 야유 그만해! 야! 난 너한테 걸었다!”

“돈 날리려고 작정을 했네. 언노운 투구 쓰고 나오는 애들은 승률이 2%도 채 안 되는 거 몰라?”

“첫 상대가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루크라니…… 재수도 오지게 없네!”

관중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심지어 카이의 상대인 루크조차도 피식 웃음을 터트릴 정도.

물론 카이는 이 정도의 외부 요인으로 마음이 흔들릴 수준이 아니었다.

‘나 자신을 지운다라.’

자신의 습관, 버릇, 패턴.

그 모든 것들을 이곳에서 새롭게 재정립할 수 있을까.

카이의 머리는 오직 그 생각만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후이 관장에게 그 방법에 대해서 배우기는 했다.

‘어려운 방법이긴 하지만, 우선 자신을 상대방으로 채워보라고 하셨지.’

요컨데 자신의 색을 철저하게 지워보라는 소리였다.

“경기, 시이작~ 합니다아아아~”

사회자가 소리를 지르며 경기장 아래로 내려갔다.

동시에 루크는 카이의 장비를 향해 턱을 까딱였다.

“결투장은 그냥 심심해서 한 번 와봤나 봐? 장비에 투자를 전혀 안 했네.”

그 말에 슬쩍 고개를 내린 카이는 자신의 검과 방어구를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자신의 무구를 쓰면 들킬까봐, 입고 있는 모든 장비는 경매장에서 대충 구입한 허접한 장비였다.

‘솔직히 나한테 많이 불리한 무대지.’

왜냐하면 결투장에서는 어느 정도의 스탯 보정까지 이루어지니까.

고레벨 유저가 스탯 빨로 손쉽게 이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진짜 많이 떨어졌잖아.’

상태창을 확인한 카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마 현재 자신의 스탯은 루크라는 녀석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일 것이다.

그것으로 루크의 레벨 또한 유추해낼 수 있었다.

‘녀석의 레벨은 280 정도. 나랑 거의 두 배 차이네.’

물론 떨어진 능력치는 결투장을 나서면 고스란히 복구될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스릉.

초속의 검사 루크는 검 손잡이를 살짝 쥐더니, 입을 열었다.

“너, 데뷔전부터 나를 만나다니 운이 나쁘구나. 하지만 결투장에선 대진 운 또한 중요하다고.”

“…….”

카이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하긴, 결투장을 장난삼아 방문한 녀석에게 충고를 건네다니. 나도 참 무르구나.”

멋드러진 미소를 지어보인 루크가 검을 뽑았다.

촤아아아아악!

루크의 검은 순식간에 춤을 췄다.

마치 벚꽃이 흩날리는 것처럼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주던 그의 검은 무려 여덟 방향에서 카이의 전신을 압박했다.

‘나 자신을 지우고…….’

카이는 루크의 검이 코앞까지 당도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나를 상대방으로 채운다.’

파아아앗!

평범한 철검이 빛살과 같은 속도로 튀어나왔다.

놀랍게도 카이가 휘두른 검은 약간이지만 루크의 검술을 닮아 있었다.

‘크윽, 이거 생각보다 훨씬 어렵잖아.’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카이가 천재는 아니라는 점.

때문에 그가 열심히 루크의 검술을 모방하려고 해도, 완벽하게 따라하지는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평소에는 이런 짓도 안 할 텐데.’

그냥 압도적인 스탯으로 밀어붙이면 루크 따위는 1초 만에 게임 오버시켜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뭐야, 너 설마 지금 내 검술을?”

가장 먼저 이상함을 느낀 것은, 당연히 카이와 검을 나누고 있는 루크였다.

그는 카이의 어설픈 검술을 처음에는 비웃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검을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닫자 순수하게 분노했다.

“감히 날 능욕하는 거냐!”

“아니, 그게 아니고…….”

루크의 검이 더욱 더 빨라졌다.

이에 맞춰 카이도 검을 한 박자 더 빠르게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초속의 검사 두 명이서 서로의 급소를 노리는 장면은 당연히 화려했다.

“오오오오오!”

“저 녀석, 지금 설마 루크의 검술을 모방하고 있는 건가?”

“뭐야, 화장실 갔다 왔는데 이게 무슨 허니 빅 꿀잼 경기야?!”

관중들은 볼거리를 좋아한다.

그들의 입장에서 루크와 베니쉬의 결투는 예상 이상으로 볼거리가 풍부했다.

파밧, 팟! 파바밧!

루크와 카이, 서로의 몸에 생채기가 늘어갔다.

일반인들이 볼 때는 정말 박빙의 승부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당사자들, 그리고 싸움을 좀 볼 줄 아는 자들은 달리 생각했다.

‘이, 이 녀석…… 대체 뭐지?’

‘베니쉬라고 했나? 신기한 녀석이군.’

‘아무리 모방했다고는 하나 검술 실력은 형편없어. 그런데…….’

‘정확하게 루크의 급소만 찌르고 있다. 심지어 자신은 별 타격 없는 부위에만 피격을 허용하고 있어.’

‘전형적인 살을 내어주고 뼈를 깎는 타입.’

시간이 갈수록 루크의 움직임은 느려졌다.

허나 카이는 달랐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은 페이스로 루크를 압박해 나갔다.

“허억, 허억…….”

서로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른 것이 13분.

마침내 정신이 한계치까지 몰린 루크의 검끝이 살짝 흔들렸다.

카이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여기서 끝낸다.’

자신의 기술이 아닌 루크의 기술로.

촤아아아악!

루크는 순식간에 여덟 방향에서 쏘아지는 검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의 몸에서 피어오른 여덟 개의 피 분수가 경기의 끝을 알렸다.

쿠웅!

생명력이 바닥이 된 루크는 폴리곤이 되어 사라졌다.

물론 결투장에서 죽는 건 게임 오버 취급이 되지 않았기에, 대기실로 이동되었을 것이다.

“스, 승자. 베니쉬! 랭크 포인트 542점!”

“……우오오오오오!”

“화끈하다!”

“언노운 대가리! 네가 2%의 벽을 깨는구나!”

“베니쉬! 베니쉬!”

카이는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관중들을 뒤로한 채,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에 들어섰다.

후이 관장이 했던 말, 아주 약간이지만 알 것 같다.

-결투장. 네가 그곳에서 싸우게 될 모든 상대가 너의 스승이 될 것이다. 그들의 기술과 생각, 전투 방법을 모두 훔쳐라. 너 자신의 냄새가 옅어질 때까지. 상대방이 너를 직시하면서도 다른 이를 떠올릴 수밖에 없을 때까지 말이다.

카이가 검을 쥔 뒤 처음으로 여명의 검법이 아닌, 다른 검술로 승리를 거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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