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334화 (334/441)

# 334

힐통령 334화

102. 북부탈환전(6)

‘대체 어느 틈에?’

크롬은 의문을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들고 있던 낫을 뒤쪽으로 휘둘렀다.

손끝에 걸리는 감각은 없었다.

‘빠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크롬은 신형을 뒤로 물렸다.

빈틈을 노려 상대의 공격이 이어질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나 공격은 없었다.

“성격 급한 친구네.”

피가 튀기고, 비명과 함성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왜 그렇게 바짝 얼어있는 거지?”

카이는 딱딱한 안색의 크롬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얼어있다고? 헛소……!”

욱하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던 크롬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마, 말도 안 된다.’

자신의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카이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크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 보폭에 맞춰, 크롬은 뒤로 물러서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이, 이 무슨 꼴이냐. 뮬딘 교의 이단심판관이!’

심지어 자신은 뮬딘 교에서 촉망 받는 차세대 인재 중 하나.

기세만으로 자신을 압박할 수 있는 교에서도 몇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드래곤 피어의 영향을 받나본데.’

카이는 비오듯 땀을 흘리는 크롬을 쳐다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물론 그걸 알았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새애액!

휘둘러진 비정한 성검이 예기를 뿜어내며 공기를 절삭시켰다.

크롬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신성력으로 가득 찬 검을 보며, 낫을 휘둘렀다.

하나 느리다.

몸은 천근처럼 무겁고 낫은 물 속을 유영하는 것처럼 느리게 뻗어나간다.

온 세상이 느려진 것만 같은데, 상대방의 검은 여전히 정상적인 속도를 지닌 채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아…….’

크롬의 세상이 암전(暗轉)되었다.

***

아버지와 어머니는 뮬딘 교도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 뿌리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조상의 대부터, 자신의 가문은 뮬딘 교를 믿어왔다.

그래서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종교가 정해져 있었다.

5살이 되자 부모님은 슬픈 표정으로 자신을 어딘가로 보내셨다.

바로 뮬딘 교의 훈련소였다.

5세의 아이를 받아, 18세까지 혹독한 훈련을 시키는 곳이었다.

그곳의 룰은 5세의 어린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했다.

-꼭 천재일 필요는 없다. 하나, 둔재는 살아남을 수 없다.

매달 말일, 뮬딘 교가 마련한 시험을 통과하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통과하지 못하면 죽는다.

상대적 평가가 아니라 절대적 평가인 만큼, 모두가 뛰어나다면 한 명의 낙오자도 나오지 않는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서로를 북돋으면서 열심히 노력했다.

그리고 대망의 첫 번째 시험의 날.

입소자 67,523명 중 841명의 아이가 죽었다.

그날 크롬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몇 시간 전까지 자신과 함께 밥을 먹고, 서로를 응원해 주던 친구가 모두 죽어버렸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터트리다가 구토하기를 반복했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둘째 달에 죽는 것이 자신이 아닐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크롬은 억지로 두려움을 밀어내고, 자신의 나약함을 떨쳐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살기 위해 검을 휘둘렀고, 살기 위해 뮬딘 교의 성경을 달달 외웠다.

말은 절대 평가였지만 수천의 아이들이 합숙을 하면서 생활하면 자연스럽게 서로 비교를 하게 되는 법.

크롬은 온갖 견제와 신경전이 펼쳐지는 지옥에서 13년을 보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15등.

졸업생 38,178명 중 15번째라는 성적을 거두게 되었다.

그 출중한 재능을 인정 받아 젊은 나이에 이단심판관이라는 자리를 거머쥐기도 했다.

하나, 그때까지만 해도 크롬의 마음속에는 딱히 뮬딘 교를 향한 신앙심이 없었다.

오히려 이 지옥 같은 훈련소를 만들어낸 교단에 증오심마저 품고 있을 정도였다.

“왔냐.”

졸업식 날, 크롬은 훈련소의 소장이자 뮬딘 교의 주교인 기든의 앞에 섰다.

이단심판관으로 임명을 받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옆은 누구지?’

그는 온몸에 두꺼운 로브를 덮고 있어서 얼굴은 커녕 살점 하나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더욱 놀라운 점은, 천하의 기든 주교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미소를 지었다는 것이었다.

“하하, 이 녀석이 일전에 말씀드렸던…… 조금 헷갈린다는 녀석입니다.”

[성적은?]

마치 쇠를 긁는 듯한 소름끼치는 목소리였다.

“전체 15위입니다. 주무기로는 낫을 쓰며, 스타일리쉬한 공격법과 타고난 거력이 특징인 녀석이지요.”

[쓸 만하군.]

의문의 남성은 크롬에게 질문했다.

[뮬딘 님을 믿는가?]

“그야 물론입니다.”

크롬은 항상 해오던 것처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했다.

하나 눈앞의 상대는 평소에 상대하던 머저리들이 아니었다.

[……아니야, 그게 아니지. 오히려 증오가 엿보이는군.]

남성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크롬에게 다가가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로브 밑에서 앙상한 뼈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기겁한 크롬은 낫을 뽑아 그를 베어내려고 했다.

“감히 누구에게!”

기딘 주교가 신성력을 일으켜 크롬의 몸을 속박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된 크롬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눈을 크게 뜨는 것뿐이었다.

[교단에 대한 증오와…… 뮬딘 님에 대한 의심이 보여.]

천천히 후드를 걷어낸 해골은 자신의 검지 손가락을 크롬의 이마에 가져다댔다.

그것은 단순히 이마와 맞닿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손가락은 크롬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그으으으…….”

크롬의 눈에서 피눈물이 줄줄 흘러나오는 것도 잠시.

그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이에 해골이 다시 한 번 질문했다.

[뮬딘 님을 믿는가?]

“예. 뮬딘 님을 믿습니다.”

크롬은 영혼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지만, 해골은 크게 만족하며 손가락을 거두었다.

[제대로 되었군.]

“오오, 그에게 세례를 내려주셨군요. 그는 새롭게 태어난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성스러운 세례 장면을 목격한 기딘 주교가 감동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찬양했다.

이에 해골, 아트록 추기경은 크롬을 쳐다보며 낮게 웃을 뿐이었다.

***

서걱!

카이는 크롬의 목을 깨끗하게 베어냈다.

물론 공격은 그것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검을 회수하면서 같은 자리를 한 번 더 베고, 수직으로 긁어내리며 또 한 번의 피해를 줬다.

“크르륵……. 커억!”

고통에 몸부림치던 크롬은 입에서 피를 뿜어내며 눈을 감았다.

“……뭐야 이 녀석.”

반격을 할 의지도 없는 것 같고,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심지어 결투 중에 눈을 감다니?

카이는 눈매를 가늘게 뜨며 성검을 꽉 잡았다.

‘왠지 느낌이 안 좋아. 빨리 끝내자.’

그 순간, 크롬이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눈은 흰 자위 하나 없이 검게 물든 상태였다.

[끄, 륵……. 크윽…….]

부웅붕!

고개를 세차게 흔든 크롬은 한 차례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카이에게 돌렸다.

그 순간 카이는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이 녀석……. 지금까지 나랑 싸우던 녀석 맞나?’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카이는 빠르게 정신을 가다듬었다.

‘괜찮아. 이 녀석이 무슨 수를 썼든, 결투의 승패는 뒤집을 수 없어.’

실제로 크롬의 몸은 이미 걸레짝이 된 상태였고, 생명력도 7%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뭘까, 이 막연한 불안감은.

가만히 카이를 관찰하던 크롬이 입을 열었다.

[두려움이 엿보이는군.]

끌끌, 낮은 웃음을 흘린 크롬은 카이를 훑어보더니 활짝 웃어보였다.

[성환 페트라, 성의 니케…… 성검 프리우스까지……. 정말로 사도였구나.]

“……뭐?”

아무리 뮬딘 교의 이단심판관이라고 해도, 성물들까지 알아보다니?

이런 적은 처음이었기에 카이는 두 눈 가득 경계의 눈빛을 띄웠다.

살벌하고도 적대적인 눈빛을 고스란히 마주한 크롬은 히죽 웃었다.

[재미있구나. 정말 재미있어.]

몸을 숙인 크롬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자신의 낫을 집어들었다.

[이 아이……. 낫을 쓴다고 하던가.]

무언가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크롬이 카이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한 번 실력이나 보지.]

“너…… 뭐야.”

[끌끌……. 글쎄.]

아무래도 의문에 답을 해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강제로라도 알아낼 수 밖에.’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은 카이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의 남은 생명력은 7%. 심장 한 번 찌르면 끝나.’

카이는 최적의 궤적, 최고의 속도로 성검을 녀석의 심장에 찔러넣었다.

“…….?!”

아니, 찔러넣었다고 생각한 순간.

크롬의 몸은 검은색 연기가 되어 흩어졌고, 카이는 목젖 부근에서 알 수 없는 이물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서걱!

“크윽!”

이물감의 정체는 거대한 낫이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당한 카이는 뒤쪽으로 날아갔다.

바닥을 몇 바퀴나 구른 그는 자신의 목을 더듬으며 생명력을 확인했다.

NPC가 아닌 유저인지라 피는 나오지 않았지만, 생명력은 단번에 23%가 사라져 있었다.

카이의 얼굴 위로 당황이 떠올랐다.

‘내 속도를 따라잡은 것도 모자라서…… 도리어 날 압도했다고?’

확실하다.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의 이 녀석은 조금 전까지 자신에게 맥을 못 추던 그 녀석이 아니었다.

[흐음…… 고작 이 정도인가. 정말이지 쓰레기 같은 육체로군.]

현재 카이의 방어력과 스탯, 레벨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공격을 성공시켰지만 크롬은 불만족스러운 기색을 내비췄다.

하지만 카이는 그가 불만을 토해내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드드득.

크롬의 왼쪽 팔은 이상한 방향으로 꺾인 채 덜렁거리고 있었으니까.

[전력을 다한 공격 한 번에 고장나는 몸이라니. 과연 불량품답군.]

혀를 찬 크롬은 오른손만으로 낫을 쥔 채, 카이에게 다가갔다.

[부디 이 여흥이 조금 더 이어졌으면 좋겠구나.]

“……혹시 너, 뮬딘이냐?”

우뚝.

크롬의 몸이 멈추었다.

그러기를 잠시, 그의 입에서 푸스스. 바람 새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푸흐흐. 크하하하!]

크롬은 어깨를 들썩이며 박장대소를 했다.

그 때마다 그의 왼팔이 덜렁거리며 춤을 췄다.

[크큭, 하아. 우매하고 건방지구나. 만약 뮬딘께서 직접 이 녀석의 몸에 강림하셨다면, 너 같은 벌레는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사악!

이번에는 예고 없이 공격이 뻗어졌다.

하나 카이는 이미 상대방의 기량을 자신보다 윗선이라고 판단한 상태.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던 터라 이번 공격은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카아아앙!

어둠의 낫과 성검을 부딪친 두 사람이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승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카이였다.

[안타깝구나. 육신이 조금만 더 멀쩡한 상태였다면……. 이 즐거움도 조금은 더 지속되었을 텐데.]

드드득, 드득.

크롬의 피부가 갈라지며 돌처럼 부스러기를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네놈의 정체는?”

카이는 성검으로 녀석을 밀어내며 날카롭게 물었다.

툭.

흥이 식었다는 듯, 뒤로 물러난 크롬은 낫을 놓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트록.]

“아트록?”

카이가 되물었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아니, 생각해 보니 뮬딘 교의 인물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부스스, 부스슥.

스스로를 아트록이라 밝힌 존재는 산산조각나는 자신의 몸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고개를 들었다.

[다음번에는…… 조금 더…… 나를 즐겁게…….]

“…….”

그 말을 끝을 크롬의 몸이 완전히 부서졌다.

카이는 바람에 쓸려나가는 까만 가루를 쳐다보며 침묵에 잠겼다.

“와아아아아!”

“적군의 총사령관이 사망했다!”

“잔당들을 쓸어버려라!”

전쟁에서는 대승을 거뒀지만, 가슴 한 구석에 묵직한 돌멩이를 얹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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