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5
힐통령 325화
102장 꼬리 밟기(1)
카이에게 뒷목이 잡힌 기사는 곧장 오른손을 뒤로 휘둘렀다.
상대의 복부를 후려쳐 뒤로 물러나게 할 셈이었다.
하지만 카이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윗줄의 고수였다.
우드드득!
날아가던 손목이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꺾이자 기사는 비명을 내질렀다.
“끄르륵……. 크륵.”
하지만 상대는 그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뒷목을 꽉 움켜쥐었기에 침 끓는 소리만이 계속 흘러나왔다.
‘무, 무슨 힘이……!’
아무리 용을 써도 상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했다.
마치 성벽 아래에 깔린 것 같은 무기력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아주 재미있는 짓거리를 하고 있네.”
“크…… 으아아악!”
카이는 그를 질질 끌면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순식간에 가게 안으로 들어간 그는 내부부터 훑었다.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어야 할 손님들은 테이블 밑에 숨어 벌벌 떨고 있는 상태.
게다가 눈물을 흘리는 어린아이들과 그들을 꼭 껴안고 있는 부모의 모습까지 보였다.
그 순간 카이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졌다.
“…….”
카이는 쥐고 있던 기사의 목덜미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의 목뼈가 아스러지면서 소름끼치는 소리를 토해냈다.
우드드드득!
그 소리에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블리자드를 압박하던 십수 명의 기사도, 상황을 여유롭게 지켜보던 귀족 차림의 남자도 행동을 멈춘 채 뒤를 돌아봤다.
“음?”
그는 카이를 쳐다보더니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오셨군요.”
그는 마치 원군이라도 도착한 것처럼 반갑게 카이를 맞이했다.
그러고는 벽쪽에 몰린 두 명의 소녀와 그를 지키는 괴한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쯧, 아무래도 영지 관리를 좀 하셔야겠습니다. 저런 무뢰배들이 대낮에 버젓이 돌아다니니 저희 같은 귀족들이 어찌 마음을 놓고 돌아다닐 수 있겠습니까.”
“…….”
카이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뭐, 물론 모르실 수도 있지요. 얼마 전까지는 남작이셨으니까요. 하지만 카이 님도 이제 백작이 되셨으니 지킬 건 지켜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기본적인 영지 관리는 귀족의 기본 소양입니다. 아, 물론 이런 무늬만 귀족인 거지새끼들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발치에 누워 있는 소년의 손등을 발꿈치로 짓밟았다.
콱!
“아아악!”
소년은 엄청난 격통이 느껴지는 손을 감싸며 몸을 굼벵이처럼 말았다.
그 순간 카이의 검이 빛살처럼 뽑혀져 나왔다.
“마, 마스터! 죽이시면 안 됩니다!”
블리자드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카이의 검은 이미 귀족의 목덜미를 살짝 파고든 상태.
주르르륵.
얕게 벌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온 붉은 선혈이 검신을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려왔다.
시선을 내려 이를 확인한 귀족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피……?”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 부근을 더듬던 귀족에게 고통이 찾아든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는 평생 느껴본 적 없던, 앞으로도 느낄 거라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아, 아파……. 아프다……. 아프다! 너무 아파!”
눈물을 터뜨리며 뒤로 물러난 귀족의 눈동자가 표독스러워졌다.
“감히…… 감히 메디프 백작가의 후계자인 나를 상처 입혀? 천한 모험가 따위가?”
그는 앞뒤 재지않고 카이에게 달려들었다.
“어우, 뭐야.”
이에 깜짝 놀란 카이는 저도 모르게 녀석의 복부에 발을 꽂아넣었다.
“꺼억. 끄어어억…….”
“도, 도련님!”
기사들이 카이에게 달려들려고 자세를 잡는 순간, 카이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노려봤다.
“움직이는 놈은 죽는다. 두 번 경고 안 해.”
“…….”
그 말에 기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상급자인 모루드만 쳐다봤다.
하지만 모루드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
그도 발바닥에 접착제를 붙인 것 마냥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크으윽. 뭐 해, 이 새끼들아……. 싹 다 죽여 버리라고! 죽여!”
귀족이 입가에서 침을 뚝뚝 흘려대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카이에게 달려드는 기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카이가 내뿜는 드래곤 피어.
엄청난 스탯을 지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강자’의 기운 때문이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기사들은 카이의 절대적인 힘을 알아보고는 완전히 기가 죽은 상태였다.
겨우 상황이 정리되는가 싶던 순간, 분노에 잠긴 목소리가 가게를 뒤흔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인가!”
노성을 터뜨리며 가게에 들어선 이는 메디프 백작이었다.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자신의 아들을 발견하고는, 카이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자네가 이런 건가?”
그 질문에 카이는 말없이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허, 허허허……. 허허허!”
메디프 백작이 돌연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기를 잠시, 웃음을 뚝 끊어버린 그가 이빨을 꽉 깨물며 소리쳤다.
“이 미친 새끼, 다리 하나 정도는 날려 버려!”
명령과 동시에, 백작과 함께 가게에 들어선 기사 한 명이 카이에게 달려들었다.
‘과연, 백작의 영지쯤 되면 기사도 이 정도 수준인가.’
기사의 수준을 파악한 카이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제법 강한 녀석이라고, 백작이 저토록 의기양양한 이유가 있었다고.
하지만 감상은 그것이 전부였다.
“핫!”
기사가 검을 쭉 뻗었다.
속도는 빨랐다.
게다가 그는 팔다리가 길었기에 검이 다가오는 체감 속도는 실제보다 훨씬 더 빨랐다.
하지만 카이는 그 속도를 따라잡았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상대의 공격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빠른 검이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닿지 않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일어났다.
‘내 검은 더 빨라.’
자신의 검은 아직 출수조차 안 했지만, 상대의 심장을 먼저 찌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르릉.
카이가 검을 날카롭게 세워 앞으로 찔러 넣었다.
그 과정에서 낭비되는 에너지는 한 줌도 없었다.
후발선지(後發先至).
늦게 떠난 카이의 검이 기사의 심장을 먼저 파고들었다.
동시에 느릿하게 느껴지던 시간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푸우우욱!
“커어억…….”
기사의 검은 죄 없는 허공의 공기를 베었다.
카이는 고통에 잠겨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기사를 주먹으로 강타했다.
쾅! 콰아앙! 콰앙! 콰아아아앙!
옆구리에 한 방, 얼굴에 한 방, 얼굴에 두 방, 마지막으로 얼굴에 세 방.
피떡이 되어 날아가는 기사의 생명력은 순식간에 걸레가 되어 있었다.
콰드드드득!
카이에게 가슴이 걷어차인 기사가 가게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
메디프 백작의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카이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입술을 달짝였다.
“인벤토리 오픈.”
그가 꺼내든 것은 통신 수정구였다.
값비싼 녀석으로, 마탑이나 길드에서나 쓸 만한 수준의 아이템이다.
하지만 카이는 이 수정구를 자신의 모든 세력과 영지에 골고루 분배해놓았다.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서였다.
[카이 님, 호출하셨습니까.]
코드를 입력하자 곧바로 아르칸 아카데미의 교장이자, 신학을 가르치는 알버트 교황의 얼굴이 수정구에 떠올랐다.
“알버트 님, 제가 뭐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정중하게 묻고 있었지만, 카이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날카로웠다.
그 사실을 깨달은 알버트가 더욱 공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엇이든 물어보시지요.]
“태양교에서 제가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의 상한선이 있습니까.”
그의 질문에 알버트 교황은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카이 님에겐 그 어떠한 제한도 없습니다.]
시원하고 명쾌한 대답이었다.
카이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메디프 백작을 슬쩍 쳐다봤다.
“어쩔래.”
“……무엇을 말이냐.”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빌면서 사과할래, 아니면 끝까지 갈까.”
“…….”
메디프 백작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가 알기로 카이는 태양교의 성혈단장이었다.
게다가 성혈단은 현재 태양교의 제일가는 무력 부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쯤에서 물러서는 것이 맞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었던 그는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여기서 사과를 하고 물러선다면, 자신은 귀족 사회에서 놀림감이 될 것이 분명했다.
뿌드드득.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
‘게다가 놈이 아무리 겁을 준다고 해도, 놈과 나는 세력을 쌓아올린 시간부터가 다르다.’
자신의 가문은 라시온 왕국이 건국될 때부터 귀족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살짝 떨어졌던 자신감이 다시 솟구쳐 올라왔다.
‘암. 나의 가문은 메디프. 갓 백작이 된 녀석 따위에게 좌지우지될 리가 없지.’
자신감을 되찾은 메디프 백작이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끝까지 가면 그대의 세력도 멀쩡하지는 못할 것이다. 내 장담하지.”
카이는 가볍게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네가 선택했다. 후회하지 마.”
메디프 백작이 찔끔했지만, 이미 열차는 떠난 후였다.
“지금 이 시간부로 태양교는 메디프 영지 인근에서의 모든 활동과 지원을 중지합니다. 아울러, 메디프 백작령과 적대 상태에 돌입함을 선포합니다.”
[모든 것은 카이 님의 뜻대로.]
* * *
메디프 백작과 그의 아들은 두고 보자는 말을 남기고는 도시를 떠났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고 싶었지만, 알버트 교황이 이를 말렸다.
‘지금 그들을 감옥에 가두면 훗날 카이 님에게 불리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부터는 자신에게 맡겨달라는 교황의 말을 믿은 카이는 그 말을 따랐다.
“고생했어, 블리자드.”
“아닙니다. 오히려 제 선에서 처리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마스터.”
칭찬을 했지만 블리자드는 오히려 겸손을 피우며 사양했다.
‘하긴, 원래 이런 녀석이었지.’
어깨를 으쓱거린 카이는 헬릭과 칼 라샤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분,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난 괜찮으니라. 그런데 라샤가 잔뜩 겁먹었자너.”
“내, 내가 언제 겁먹었어.”
“그럼 아까 내 소매를 꽈악 쥐고 있었던 게 누구였느냐?”
“……너 치사해. 두고봐.”
잠시 티격태격대던 두 사람은 금세 지친 표정을 지었다.
“후으……. 카이여, 배고프니라.”
“나도. 맛있는 걸 먹으러 들어왔는데, 귀족 놈한테 욕만 실컷 얻어먹은 것이에요…….”
두 사람의 안쓰러운 표정을 바라보던 카이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근처의 다른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죠. 어차피 도시 구경은 물 건너 간 것 같으니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말을 마친 카이는 식당 내부를 돌아다니며 손님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케어했다.
“햇살의 따스함.”
“큐어.”
치료는 물론이고, 소정의 위로금과 함께 고개를 숙여 오늘의 일에 대해 사과까지 건넸다.
“부디 이번 일로 하베로스를 미워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그럼요. 그리고 함부로 고개 숙이지 마세요. 백작님께서 어찌 저희 같은 평민에게…….”
하지만 돌아오는 건 감사의 인사보다, 안절부절 못하는 NPC들의 모습뿐이었다.
‘……어째 귀족이 된 뒤로 NPC를 대하는 게 더 힘들어진 것 같네.’
예전에는 한낱 모험가였기에 자신이 항상 고개를 숙이며 다녔다.
자신의 마음가짐과 고개는 그때와 똑같지만, 이제는 상대방 쪽에서 이를 부담스러워한다.
그렇다고 목에 빳빳하게 힘을 주는 것은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뭐, 게임을 하다 보면 내 태도에 대한 정답도 알게 되겠지.’
카이는 마지막으로 귀족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소년을 치료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언젠가 꼭 연락 주십시오. 저희 가문은 은혜와 원수는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본인을 베르마 남작가의 자제라고 소개한 소년은 예의바르게 인사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카이여, 이제 정녕 끝난 것이더냐?”
어느새 다가온 헬릭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예, 끝났습니다. 메디프 백작령은 이제 끝났고, 저희야 못 즐겼지만 반응을 보니 문화의 도시도 대박이 난 것 같으니까요.”
“그것 참 잘된 일이로구나.”
“추, 축하드려요.”
두 소녀의 축하를 받은 카이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두 시간 뒤.
알버트 교황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메디프 백작령을 점령했다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