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323화 (323/441)

# 323

힐통령 323화

100장 문화의 도시 (3)

모두의 시선이 텅 빈 무대로 향했을 때, 여성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레이션이 흘러나왔다.

옛날 옛적에, 동등한 권세를 자랑하는 두 제국이 존재했습니다.

바로 기사들의 나라인 칸 제국과, 마법사들의 나라인 곤 제국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웃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했습니다.

제국 병사들의 손에는 항상 상대국 시민들의 피가 묻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두 제국의 황제는 상대방의 나라를 파멸시킬 때까지 무기를 놓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인간들은 너무 잔인하구나.”

“시민들이 아주 많이 불쌍한 거예요.”

“……이거 연극이에요, 연극. 허구로 만들어낸 이야기.”

“앗…….”

“그, 그랬었죠.”

헬릭과 칼 라샤가 머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행히 몰입은 잘되나 보네.’

슬쩍 쳐다본 관객들의 반응도 두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팝콘이나 과자 등을 향해 뻗던 손조차 멈춘 채, 무대를 쳐다봤다.

“후우, 날씨가 참 좋구나.”

중세시대 귀족 영애나 입을 법한 화사한 의복을 갖춘 여인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녀가 이 극에서 주인공 중 하나인 ‘소피아’ 역을 맡고 있는 엘프였다.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시녀들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황녀님, 햇빛을 오래 받으면 피부가 상하세요. 어서 안쪽으로 드시지요.”

“이 정도는 괜찮아. 오늘은 영지 시찰을 가볼 테야.”

연기력은 발군이었다.

목소리는 물론이고, 걸음걸이나 손을 뻗는 사소한 행동에서조차 황족의 기품이 배어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유저들의 연기력도 훌륭했다.

당연히 관객들이 그들의 이야기에 빠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음, 재미있네.’

카이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

극의 전개 속도는 관객이 지루할 틈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칸 제국의 황자와 곤 제국의 황녀는 이웃 왕국에 놀러 가게 된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수행원들을 몰래 따돌린 채, 신분을 숨기고 서민들의 삶을 체험한다.

사과를 구매하다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첫 눈에 반하게 된다.

매일 밤, 광장에서 몰래 만나기로 약속을 한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게 된다.

하지만 운명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피아, 나와 함께 갑시다. 사실 난…… 농부가 아니라 칸 제국의 황자요.”

“그, 그런…… 그런 말도 안 되는!”

서로가 적대국의 황족임을 알게 된 사람은 처음에는 배신감을 느끼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아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을 잊지 못하겠어요!”

“피아…… 아니, 소피아! 내 마음도 그대와 마찬가지요.”

“줄리오!”

두 사람은 금단의 사랑을 택하게 되고, 밝고 활기찬 노래가 깔리며 그들의 미래를 축복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노래의 분위기가 축축 처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두 사람의 밀회는 두 황제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당연히 제국에서는 추격대가 출발하여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이제 더 이상 시간이 없소.”

“저는 당신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태양신의 축복 아래에서 나와 결혼해 주겠소?”

“……좋아요.”

시골의 조그마한 태양교 신전, 늙은 신관만이 유일한 하객인 그곳에서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된다.

“나의 금발이 하얗게 새는 날까지 그대를 사랑하겠소.”

“저의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는 그 순간까지 당신을 사랑하겠어요.”

그들은 미소를 피웠지만, 관객들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추격대들 때문에 연신 가슴을 졸였다.

이후로 며칠 동안 밤낮 없이 도망을 치던 두 사람은 갈림길에서 잠시 헤어지게 된다.

“이틀 뒤, 늙은 느타리 나무의 그늘 아래에서 만납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시간에 도착할게요.”

새끼손가락을 걸고, 키스를 나누며 약속한 두 사람은 험난한 여정을 펼치게 된다.

자신들을 속이는 추격대를 따돌리고, 때로는 전투를 치르며.

때로는 자신과 연이 닿아있는 부하에게 인정을 구걸하며 겨우 위기에서 벗어난다.

결국 늙은 느타리 나무에 먼저 도착한 것은 소피아였다.

“하아, 하아…… 줄리오는?”

주변을 둘러보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녀는 아직 추격대를 뿌리치지 못한 상태였다.

‘황궁 마법사들은 생명을 탐지하는 마법을 펼칠 수 있어.’

이곳에서 줄리오를 기다리다가는 꼼짝없이 잡힐 수밖에 없는 상황.

결국 소피아는 자신의 마법 실력을 발휘해, 24시간 동안 가사 상태에 빠지는 주문을 자신에게 걸게 된다.

***

“흐허엏어헣흐엏.”

“흐아앟항아앙.”

카이는 펑펑 울음을 터트리는 두 소녀를 말없이 바라봤다.

말은 안 했지만 그도 제법 감동을 받은 상태였다.

‘로미오와 줄리엣, 과연 세계적인 희극, 명작이네.’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처절하게, 그리고 때로는…… 가슴이 시리도록 슬프게.

<소피아와 줄리오>가 선사한 여운은 극이 끝나고 배우들이 무대에 모두 올라 인사를 마친 그 순간까지 가시지 않았다.

짝짝짝짝짝!

돔을 거대한 박수 소리가 뒤덮었다.

하지만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는 새어 나오지 않았다.

연극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절대 아니었다.

“…….”

“흐읍.”

“크흡! 눈에 무슨 먼지가…….”

모두가 자신들의 감정을 추스르느라 입을 열 만한 상황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소리를 뱉는 순간 눈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질 것 같았기에,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짝짝짝짝짝!

하지만 그들이 선물해주는 박수는 배우들의 귀에, 눈에, 그리고 가슴에 똑똑히 새겨졌다.

“어떠셨습니까? 영주님.”

스필벅스의 말에 카이는 스윽, 눈가를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감동적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수많은 많은 사람들이 접한 이야기입니다. 때문에 제법 흔한 스토리일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훌륭히 잘 살리시다니. 감독님의 명성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두 숙녀 분들은 어떠셨습니까?”

“끄윽…… 끕!”

“히익, 흐윽.”

눈가에서 굵은 물방울만 뚝뚝 흘려대는 두 소녀를 바라본 스필벅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가, 감동을 많이 받으셨나봅니다.”

“둘 다 재미있게 본 것 같습니다. 좋은 극을 제작하신다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영주님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똑똑.

VIP룸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고, 잠시 후 시종이 들어왔다.

“영주님. 메디프 백작과 기타 귀족들이 영주님을 뵙고자 합니다. 게다가 스필벅스 감독님도 꼭 만나보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귀족들에게도 잘 먹히는 것 같네요.”

카이가 빙그레 미소를 짓자, 스필벅스 감독이 환한 안색으로 말했다.

“뒤풀이도 준비해 놨습니다. 참석해주셔서 귀족 분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시지요.”

“아…… 그럼 잠시만요.”

이동을 하게 된 카이는 울고 있는 목소리를 낮추며 두 소녀를 달랬다.

“헬릭 님, 라샤 님. 이제 그만 뚝.”

“끄으윽, 그치마안…… 그치마아안…… 줄리오가…… 흐어엉!”

“소피아도…… 너무…… 너무 불쌍해요오욧! 끄아앙!”

“으음.”

아무래도 눈앞의 귀여운 신들이 받아들이기에는 꽤나 자극적인 이야기였던 모양.

그러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마냥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저희는 이제 이동해야 해요. 그럼 천계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카이의 물음에 헬릭과 라샤가 동시에 고개를 흔들었다.

“끄윽…… 먼저…… 먼저 가거라.”

헬릭이 휘휘 손을 저으며 소매로 제 눈을 부볐다.

“제가 어떻게 두 분을 놓고 가요?”

“진정되면…… 우리끼리 구경을 하면 되느니라.”

“크흥. 저희가 보기에는 아이처럼 보여도, 진짜 어린 아이는 아닌 거예요.”

조금씩 진정한 두 신은 카이가 자신들을 애 취급하는 게 불만인지 입을 삐쭉 내밀었다.

물론 평소였다면 귀엽다 못해 사랑스럽겠지만, 눈이 퉁퉁 불어있는 지금은 솔직히 좀 웃기다.

“푸훕. 큭…… 그럼 저 진짜 다녀와도 돼요?”

“다녀와도 괜찮다고 했지 않느냐. 무슨 일이 생기면 부르겠느니라.”

“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녀들이 아이 취급 받는걸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카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절대 길 잃어버리지 마시고, 위험한 사람 따라가면 안 돼요.”

“응. 알겠느니라.”

“명심하는 거예요.”

카이는 서로의 손을 꼬옥 잡고 도시를 구경가러 떠나는 두 소녀를 쳐다보며 블리자드를 소환했다.

“예, 마스터.”

“두 분에 대한 엄호를 부탁해.”

“수위는 어느 정도로 하면 되겠습니까?”

“위험에 쳐하면 그때 나서서 지켜드려. 몰래 경호원 붙였다는 거 알면 싫어하시니까 웬만하면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예, 그럼 조용히 경호하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블리자드는 회색 로브를 제 몸 위에 덮어 번쩍거리는 갑옷을 가렸다.

***

카이와 헤어진 두 소녀는 서로의 손을 잡은 채 하염없이 길거리를 걸었다.

훌쩍, 훌쩍.

태어나서 그토록 슬픈 연극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두 사람은 광장의 벤치에 앉아 입을 헤 벌린 채, 멍한 표정으로 하늘만 쳐다봤다.

마치 나라라도 잃은 것 같은 서러운 표정들.

그녀들이 연극의 여운을 가라앉히는 데는 무려 두 시간이나 걸렸다.

꼬르르륵.

여운이 가라앉자, 한참 동안 울면서 많은 기력을 소모했는지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라샤여, 배고프지 않느냐.”

“……고파.”

“그럼 케이크를 먹으러 가자꾸나.”

라샤는 벤치에서 일어나려는 오래된 친우의 손목을 잡으며 제지했다.

“하지만 헬릭. 인간들의 세상에는 화폐라는 개념이 있어. 나는 무전취식을 하는 신이 되고 싶지는 않아.”

이에 헬릭이 반박했다.

“라샤여. 이런 때를 대비해서 카이가 나에게 용돈이라는 것을 챙겨주었다.”

“핫…….”

라샤는 헬릭이 주섬주섬 품 속에서 꺼내든 동전 주머니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역시 너의 대리자는 대단하다. 이런 상황까지 꿰뚫어보다니…… 얼마나 들어있는데?”

“우, 우응?”

라샤의 질문에 살짝 당황한 헬릭이 슬그머니 동전 주머니를 열었다,

“잠깐만 기다리거라. 노란색 동전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움…… 오른손에도 손가락이 다섯 개 더 있으니…… 합치면 여섯, 일곱…….”

아쉽게도 헬릭이 셀 수 있는 숫자는 열 까지 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는 동전 주머니를 스윽 닫으며 태연히 말했다.

“열 개보다 많이 있느니라.”

“그럼 그걸로 케이크를 몇 개나 사먹을 수 있는 거야?”

“움…….”

그 질문에 헬릭은 또 고민에 빠졌다.

그러기를 잠시, 그녀는 굉장히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카이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느니라. 인간관계란, 기브 앤 케이크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동전을 하나 주면, 케이크를 하나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아아!”

라샤가 물개 박수를 치며 헬릭의 유능함을 칭송했다.

“대단해. 나도 사도가 생기면 그런 걸 배울 수 있겠지?”

“물론 그럴 것이다.”

헬릭과 라샤는 다시 손을 잡고는 근처에서 가장 예뻐 보이는 가게로 들어갔다.

“어서 오…… 응?”

정장을 입고 있는 종업원이 그녀들을 바라보고는 뒤쪽을 살폈다.

그곳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물었다.

“저기, 꼬마 숙녀님들. 보호자는 같이 오지 않았니?”

“있었지만 지금은 뒤풀…… 으음.”

“뒤풀이.”

라샤가 속삭이자 헬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뒤풀이에 간 것이다. 용돈은 충분하니라.”

헬릭이 동전 주머니에서 금화 다섯 개를 꺼내 종업원에게 건냈다.

“케이크 다오. 콜라도 잊어선 안 될 것이야.”

두 사람은 그 즉시 가게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좌석으로 안내되었다.

“이곳은 분위기가 좋구나.”

“응. 가게가 예뻐.”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케이크와 빵, 음료를 주문하곤 가게의 인테리어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가게의 분위기가 시끄러워진 것도 그 때였다.

우당탕!

테이블이 넘어지고, 그 위에 있던 음식 접시와 물컵이 그대로 엎어졌다.

그것을 그대로 뒤집어쓴 소년은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문화의 도시니 뭐니 말은 거창하더니. 실상은 이런 거지새끼들이 돌아다니는 수준 낮은 도시에 불과하군.”

누가 봐도 나 귀족이요, 라고 써놓은 듯한 의복을 입고 있는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종업원을 불렀다.

“여기 책임자 불러와라. 지금 당장.”

헬릭은 조용히 차가운 물에 빨대를 꽂아마시며 그 광경을 구경했다.

쪼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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