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6
힐통령 316화
99장 신의 한 수 (1)
카이가 최초로 미드 온라인의 백작이 되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주로 귀족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 사실은 일차적으로 그들과 친분이 있던 랭커들의 귀로 들어갔고, 그들은 커뮤니티에 이 정보를 흘렸다.
대부분의 유저들 귀로 카이의 승작 소식이 들어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아니, 카이 원래 남작 아니었냐? 한 번에 2단 승작이라고? 이게 말이 됨?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래서 갓노운, 갓노운 하는구나. 세계 8대 길드조차 못 하던 걸 개인이 떡하니 해버리네.
-랭킹 1위, 보유한 영지 다수…… 이것만 해도 부러운데 이제는 백작의 권력까지?
└거기에 하나 더하자면, 이번에 드워프 장인들 파견하면서 어마어마한 돈을 받아냈을걸. 그것까지 생각해 보면 재력도 전 세계 1위가 아닌가 싶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블랙마켓 길드가 있는데 개인이 재력 1위인 건 많이 오바인 듯.
└빠돌이 짓도 좀 적당히 하자. 뭐만 하면 언노운이 최고래ㅋㅋㅋㅋ
이미 카이는 미드 온라인의 대명사 같은 존재였다.
특히 어느 길드에서 소속되지 않은 그가 단신으로 일군 업적들을 동경하는 유저들은 많았다.
인기인에게는 당연히 팬이 따르고, 또 안티 팬이 따르는 법.
카이는 오늘도 열심히 싸우는 키보드 워리어들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마 나 맞을 텐데. 재력 1위…….”
꾸준히 환전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도 카이의 저택 금고에는 수천억 원 상당의 골드가 고이 잠들어 있었다.
‘아무리 블랙마켓이 생산직 유저들의 집단이라고 해도, 나한테는 안 되지.’
길드 중 가장 덩치가 크다는 흑룡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보유한 모든 자산, 심지어 무형적 가치를 포함한다고 해도 그만한 값어치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
물론 카이는 이러한 사실을 유저들에게 알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페가수스 사랑 약속을 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알려져서 좋을 건 없으니까.’
지금만 해도 유저들의 시기와 질투는 매일매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판국이다.
여기서 자신이 재력마저 게임 내 최강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악플 세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런 카이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헬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말이냐?”
“음? 아 그게…….”
현재 카이는 천상의 정원에서 뒹굴뒹굴거리는 중이었다.
백작으로 승작도 했고, 당장 깨야 할 퀘스트도 없었다.
심지어 이번에 하인드 백작에게 인계받은 로잔과 트라반 영지는 글렌데일 정도 크기의 도시.
굳이 카이가 손댈 필요도 없이 꾸준히 성장 중인 장소였다.
‘게다가 영주 대리들도 훌륭하고.’
현재 두 도시의 영주 대리직을 맡고 있는 자들은 형제지간이었다.
고아였던 두 사람 모두 하인드 백작의 후원을 받아 성장한 케이스로, 그를 향한 충성심은 대단했다.
‘백작님은 부담스러울 테니 내 사람을 채우라고 하셨지만, 글쎄.’
카이는 굳이 일 잘하는 두 사람을 교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현재 카이 주변에 영주 대리직을 맡을 유능한 인재가 없다는 부분이었다.
“흠. 이거 진짜 공고 한 번 때려야 하나.”
카이가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자, 옆에서 빼액 소리가 들려왔다.
“이이…… 내 말을 왜 계속 무시하는 것이냐!”
“음?”
잠시 생각에 잠겨있느라 옆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던 것이었다.
카이는 작은 두 손을 앙 쥐고 몸을 바르르 떠는 헬릭을 쳐다봤다.
“내가…… 내가 여섯 번이나 무슨 일이냐고 물었거늘…….”
“여, 여섯 번이나요?”
정정한다.
생각을 잠시 동안 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여섯 번이나 불렀다고? 이런…….’
카이는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혀있는 헬릭을 달래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제가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고 그랬나 봐요.”
“본인이 받드는 신을 눈앞에 두고 딴생각을 하다니. 그대처럼 불경한 사도는 처음이니라!”
헬릭은 단단히 화가 났는지, 카이의 얼굴을 보기도 싫다는 듯 몸을 반대쪽으로 휙 돌렸다.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쳐다보던 카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방법은 웬만하면 쓰기 싫었지만…….’
카이는 인벤토리에서 잘 포장된 고급 초콜릿 박스를 하나 꺼내 들었다.
고급 초콜릿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본의 브랜드 초콜릿 중 하나로, 일본 여행을 다녀오는 이들이라면 여행 선물로 많이들 사오는 로이즈 초콜릿이었다.
‘이거 미드 온라인에서는 몇 개 생산되지도 않아서 프리미엄이 잔뜩 붙는 거지만.’
헬릭의 토라진 기분을 푸는 데는 이 초콜릿만 한 것이 없었다.
“킁킁…….”
이제는 완전히 과자 귀신이 되어버린 헬릭의 몸이 움찔거렸다.
초콜릿은 분명히 밀봉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초콜릿의 기운을 귀신같이 느낀 것이다.
“헬릭 님, 선물을 드릴 테니 한 번만 봐주세요.”
카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초콜릿 박스를 내밀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으으…… 넘어가지 않을 것이니라.”
헬릭이 무려 초콜릿을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카이가 멍하니 입을 벌리며 놀라워하는 사이, 헬릭은 두 주먹을 와들와들 떨면서 저항했다.
이에 그녀가 걱정된 카이는 초콜릿 상자를 그녀의 어깨 위로 내밀었다.
“헬릭 님. 참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리하지 마시고 어서 받으세요.”
“앗…… 이건 봄 한정판인 벚꽃 에디션…….”
“제가 헬릭 님을 위해 어렵게 구한 거예요.”
“그래도…… 그래도 안 되느니라.”
“예? 대체 뭐가 안 된다는 말이에요?”
카이의 질문에 헬릭은 거의 울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로, 로비가 그랬단 말이다. 그대와 오랫동안 사이좋게 지내고 싶으면, 밀고 당기기를 잘해야 된다고…… 그런데 내가 맨날 맨날 사탕이랑 초콜릿만 보면 사족을 못 쓰니 금세 질릴 수도 있다고…….”
훌쩍훌쩍.
결국 헬릭이 울음을 터트리자 깜짝 놀란 카이는 황급히 그녀를 돌려세웠다.
그새 눈이 퉁퉁 부어오른 헬릭은 서러운 표정으로 연신 눈물을 닦아내며 물었다.
“흐어엉, 그대는…… 정말로 내가 사탕만 좋아해서…… 질려버린 것이더냐?”
세상의 억울함을 전부 끌어모은 듯한 그 목소리에, 카이는 기겁을 하며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닙니다. 애초에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그치만…… 요즘은 자주 찾아오지도 않고…… 인간 세상 구경도 또 시켜준다고 했으면서 약속도 안 지키고…… 로비가 그러는데, 그건 나를 향한 애정이 식어서 그런 거라고 했느니라.”
“최근 일이 바빠서 자주 못 온 건 맞지만, 헬릭 님을 향한 마음은 그대로입니다.”
“흐우웅.”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자, 헬릭 님 뚝!”
“뚝…….”
계속된 달래기 끝에 헬릭의 울음은 머지않아 그쳤다.
카이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토닥토닥.
“우리 헬릭 님 말도 이렇게 잘 들으시는데 제가 어떻게 미워해요. 그런 오해 마세요.”
“우웅…….”
완벽하게 의심을 거둔 헬릭의 볼이 마치 갓 쪄낸 떡처럼 흐물흐물해졌다.
이건 그녀가 편안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럼 헬릭 님, 잠시 초콜릿 좀 드시고 있으세요. 울지 마시고. 알겠죠?”
“알겠느니라. 어디 가느냐?”
역시 아이들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
달콤한 벚꽃 향이 흘러나오는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행복한 웃음을 짓던 헬릭이 물었다.
“잠시 어디 좀 다녀올게요. 금방 와요.”
“다녀오거라.”
“네, 그럼 잠시…….”
밝게 웃으며 몸을 돌린 카이의 눈빛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로비!”
사랑의 신 로비가 거주하는 섬은 우아한 백색과 정열적인 붉은색으로 꾸며진 장소였다.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비치 체어에 누워있던 로비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슬쩍 들어 올렸다.
“어머, 이게 누구람?”
“누구고 자시고, 대체 왜 그런 겁니까?”
카이의 불만 가득한 표정을 쳐다보던 로비가 쿡쿡 웃었다.
“날 이렇게 막 대하는 인간은 처음이네. 일단은 나도 신인데.”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헬릭 님한테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한 겁니까.”
낮게 울리는 카이의 목소리는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느껴졌다.
“아아, 그래서 왔구나.”
재미있다는 듯 짓궂은 미소를 지은 로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야자수 음료수를 쪼옥 빨았다.
“그야 재미있잖아. 너도 알 텐데?”
“그건…….”
솔직히 인정한다.
순수한 헬릭을 놀리는 건 무척이나 재미있는 일이었으니까.
로비는 상체를 일으켜 비치 체어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조금 신기해서 그랬어. 솔직히 질투 나기도 하고. 그 꼬맹이가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의지하는 건 처음 보거든.”
“……질투라니, 저한테 말입니까?”
“맞아. 그리고 헬릭에게도 조금.”
로비가 혀를 쏙 내밀며 말했다.
“부럽잖아. 신도가 가장 많아서 신성력이 제일 높다는 것도. 너처럼 유능한 사도를 두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헬릭 님이 미우신 겁니까?”
“아니?”
로비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진심으로 헬릭이 미웠으면 그 정도로 안 끝났지. 아마 이간질을 시켰을걸.”
“…….”
실제로 로비의 말이 짓궂기는 했지만, 헬릭이나 자신을 향한 명백한 적의가 담겨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앞으로는 이런 장난치지 마세요. 재미없을 겁니다.”
“어머, 무서워라. 하지만 말 잘 들을게. 그럼 앞으로 나도 신경 좀 써주겠지.”
“……이미 감점당했습니다.”
“그건 좀 아쉽네.”
배시시 웃던 로비가 선글라스를 벗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다시 봐도 아름다운 외모였다.
과연 사랑과 미(美)를 관장하는 신이라는 납득이 저절로 될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실제로는 어떻게 생각해?”
“뭐가요.”
질문에 대꾸하는 카이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아이에게 안 좋은 말을 가르친 불량아를 대하는 듯한 아버지의 목소리 같았다.
“헬릭 말이야. 그녀는 너에게 어떤 존재지?”
무슨 답을 요구하는지 모르겠다.
카이는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기 위해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를 빤히 쳐다봤다.
“소중한 사람이죠. 제가 모시는 신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늦둥이 여동생 같은 느낌?”
“아하, 대하는 태도를 보면 영락없이 딸처럼 여기는 줄 알았는데.”
“제가 결혼해 본 적은 없어서, 딸을 대하는 느낌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잠시 생각을 해보던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런 기분일 수도 있겠네요.”
“그래? 그렇다면 내가 헬릭에게 했던 말을 좀 더 깊게 들어줬으면 좋겠어. 그거, 놀리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너에게 전하는 경고의 의미도 있었으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헬릭이 울리지 마. 밝고 순수해 보이는 아이지만, 제법 상처가 많은 아이니까.”
“흠.”
패트릭에 이어서 두 번째로 듣는 말이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숙녀에 대한 비밀을 뒤에서 캐고 다니는 건 실례야.”
말해줄 생각은 없다는 뜻이다.
결국 가볍게 혀를 찬 카이는 뒤돌아섰다.
“……아무튼, 헬릭 님한테 두 번 다시는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알았어요, 헬릭 아버님~”
카이는 끝까지 농담을 건네는 로비를 뒤로한 채 헬릭에게 돌아갔다.
***
카이는 헬릭을 울린 죄로 하루 종일 그녀와 놀아주어야 했다.
의사와 환자 놀이를 끝낸 뒤, 짤막한 휴식 시간 동안 간식을 먹던 헬릭이 물었다.
“카이여, 저게 무엇이더냐?”
그녀는 천상의 정원 끝자락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자칫하면 섬에서 떨어질 정도로 위험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위태로워 보여도 그녀는 신.
그 옆에 함께 앉아 있던 카이가 그녀를 쳐다봤다.
“뭐가요?”
“저것 말이다, 음…… 그대의 눈에는 안 보이려나. 그렇다면 이러면 되겠지.”
헬릭이 가볍게 머리카락을 비비 꼬자, 카이의 눈앞으로 짤막한 영상이 나타났다.
영상은 한 도시를 돌아다니는 유저들을 담고 있었다.
“저들이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은 무엇이더냐?”
“아…… 저거요.”
헬릭이 가리키는 물건의 정체를 알아챈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폰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에요.”
“폰(Pawn)? 저게 졸병이라는 뜻이더냐?”
“아니요. 그 폰이 아니고, 폰(Phone)인데……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던 카이가 적절한 예시를 들어줬다.
“일종의 통신기예요. 저게 있으면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연락을 할 수 있죠.”
“우와아, 대단하니라. 그런데 원거리 통신 수정구와는 다른 것이더냐? 똑같이 생겼는데.”
“네. 똑같이 생겼지만, 저건 통신 수정구처럼 전화는 못 해요. 대신 문자를 보낼 수 있습니다.”
“문자…… 한마디로 글자를 통해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는 뜻이구나.”
“맞아요. 똑똑하셔라.”
카이가 머리를 스윽스윽 쓰다듬자, 기분이 좋아진 헬릭이 헤헤 웃었다.
“그럼 저것만 있으면 원하는 존재랑 다 연락할 수 있는 거냐?”
“네. 상대방의 인식 번호를 등록하기만 하면 간단하죠.”
“그 말은…… 이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소리겠지. 그렇지?”
“음, 그건 모르겠네요. 여긴 천계잖아요.”
“차원이 다르면 사용할 수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을까요?”
“음…….”
잠시 고민을 하던 헬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내가 만들겠느니라.”
두 주먹을 앙 쥔 헬릭이 다짐했다.
“완성되면 내가 하나 주겠느니라.”
“설마…… 제가 이번처럼 너무 연락이 안 될까 봐 그러시는 거예요?”
살짝 감동을 먹은 카이가 귀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헬릭을 쳐다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저번에도 과자가 다 떨어졌는데 연락이 안 돼서 힘들었느니라.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느니라.”
“…….”
감동은 빠르게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