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313화 (313/441)

# 313

힐통령 313화

98장 동부의 신성(4)

‘솔직히 조금 부담스러운데.’

파발이 안내인을 자처하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파발과 그의 관계는 미묘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끄응.”

파발과의 첫 만남에서 자신은 그를 일방적으로 때렸다.

그런데 실컷 얻어맞았던 녀석이 큰 깨달음을 얻었다며 자신을 은인 취급하는 상황이라니.

파발의 속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카이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안내인으로써의 파발은 훌륭했다.

‘……이거 생각보다 편한데?’

그토록 견고해 보이던 왕성은 파발의 눈인사 한 번이면 문을 열었으니까.

왕성 바깥에도 그러더니, 안쪽에도 사람들이 우글우글했다.

“축포는 준비됐나?”

“주방 쪽은?”

“문제 없답니다.”

“오늘만큼은 사소한 실수도 없어야 할 것이야.”

분주해 보이는 사람들은 정신없이 저마다의 일을 해나가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이가 묘한 눈빛으로 파발을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오늘 무슨 날입니까? 다들 바빠 보이네요.”

움찔.

파발이 마치 고장 난 인형처럼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카이 님.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뭐가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물어보신…… 하, 표정을 보니 정말로 모르시는 것 같군요.”

옅은 한숨을 내쉰 파발이 손바닥으로 제 뒷머리를 문질렀다.

그때마다 깨끗한 수건으로 자동차 보닛을 닦는 것처럼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이 님은 오늘 왕궁을 왜 방문하신 겁니까?”

“국왕 폐하께서 부르셔서요.”

“혹시 왜 부르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큰일은 아니고, 하인드 백작의 영지 두 개를 제 앞으로 인계하는 간단한 일 때문입니다.”

“……!”

카이의 말을 듣던 파발이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러기를 잠시, 그는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카이를 쳐다봤다.

“아, 그렇게 된 거군요…….”

무언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던 파발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아무런 기별도 받지 못하신 것 같으니 제가 간략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베오르크 국왕 폐하의 탄일이십니다. 때문에 전국의 귀족과 마탑의 인사들이 축하 인사를 드리러 오신 것이지요.”

“탄일이라고요? 오늘이?”

카이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탄일이라는 건 한 마디로 생일을 뜻한다.

‘그러니까, 내 인벤토리에 있는 초대장이 생일 파티 초대장이었다고?’

그걸 왜 말 안 하냐고, 대체 왜.

난감한 표정을 짓던 카이는 고개를 숙여 제 복장을 점검했다.

왕궁을 방문한다고 깨끗한 옷을 입기는 했지만 그것이 전부일 뿐.

투박하고 단조로운 의복은 국왕 폐하의 탄일을 축하하는 데 어울리는 복장은 결코 아니었다.

“이런 복장으로 방문하는 건 조금 실례겠지요?”

카이가 입고 있는 깔끔한 의복을 훑어본 파발이 짧은 평가를 내렸다.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만, 온갖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귀족들에 비하면 아무래도…….”

격이 좀 떨어진다는 소리다.

그 말까지 듣고 난 카이는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옷 갈아입을 곳 있습니까?”

“아! 혹시 가져오신 다른 의복이라도 있습니까?”

파발의 목소리 톤이 밝아지자 카이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화려한 옷을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을 알아요.”

***

왕궁의 층 하나가 통째로 베오르크 국왕의 탄일 파티를 위해 사용되었다.

온갖 화려한 장식과 반짝이는 샹들리에.

먹음직스러운 수십 가지 종류의 음식들과 일반인은 쳐다보기도 힘든 값비싼 와인들까지.

라시온 왕국에서 이번 파티에 얼마나 신경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다들 오랜만에 뵙는군요.”

“나이가 드니 영지를 벗어나는 것도 일처럼 느껴져 그런가 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치고는 세월이 갈수록 더 젊어지십니다?”

“허허, 말이라도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모두 라시온 왕국에서 한가락을 한다는 인물들뿐이었다.

그야 초대장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최소 남작.

혹은 세계적인 상단의 단주 일가만이 가능했으니까.

당연히 국왕이 등장하기 전의 파티장은 인맥을 쌓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니는 귀족들로 가득 차 있었다.

“스텐 백작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음.”

다만 스텐 백작은 다른 귀족들과 달랐다.

왜냐하면 그는 남들처럼 돌아다니지도, 말을 많이 하지도 않았으니까.

그저 와인잔을 홀짝이다가 귀족들이 찾아와 인사를 올리면 고개만 까딱거리는 게 전부였다.

그의 막대한 권력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라시온 왕국에는 고위 귀족이 그리 많지 않았다.

전쟁의 시대 이후 명맥이 끊어진 공작 가(家)는 배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라시온 왕국의 최고 귀족은 백작이었다.

물론 백작이라고 다 같은 백작이 아니었다.

소위 대영주라 불리는 백작들이 있다.

북부의 하인드, 서부의 신바에 이어 남부의 스텐이 바로 그 세 사람.

오직 동부 쪽은 대영주라 불리는 이들이 없었는데, 그건 동부 쪽에 위치한 백작들의 힘이 팽팽했기 때문이었다.

“백작님, 혹시 오늘 아침 일에 대해서 들으셨습니까?”

“무슨 말인가.”

스텐 백작이 자신의 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작의 말에 반문했다.

“서부의 신바 백작 말입니다. 왕궁에 줄을 서 있다가 큰 창피를 당했다고 하더군요.”

“쯧, 그 격 떨어지는 수다쟁이 말인가?”

귀족이라면 응당 품위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스텐 백작은 신바 백작을 싫어했다.

그야 말도 많았고, 귀족으로서의 품위도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놈과 한데 묶여 라시온 삼 백작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열 받는군.’

짜증이 치밀어 와인잔을 홀짝인 백작이 재차 질문했다.

“그런데 대체 누가 그에게 창피를 주었단 말이지? 그럴 수 있을 만한 인물이 없을 텐데.”

신바 백작을 무시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힘은 진짜였다.

막대한 돈과 술수로 서부의 대영주로 등극한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없었으니까.

“남작이랍니다.”

“……남작?”

스텐 백작의 눈동자에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안타깝군.”

만약 일개 남작이 자신에게 창피를 줬다면, 자신은 그를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신바 백작은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에게 이야기를 해주던 자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마 백작님께서 상상하시는 종류의 보복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무슨 뜻이지?”

남작이 백작에게 물을 먹였다.

보복을 당하지 않는다?

스텐 백작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그 남작의 이름이 카이입니다.”

“카이…… 잠깐, 카이 남작이라면 혹시?”

“예. 동부의 리버티아와 아르칸, 하베로스를 통치하고 있는 남작입니다. 이번에 드워프 파견 건으로 한창 풍운을 몰고 다닌 자이지요.”

“알고 있다. 이번에 드워프 대장장이 하나를 데려온다고 선물을 보냈었으니까.”

“아! 경쟁률이 어마어마하다고 하던데 역시 스텐 백작님, 대단하십니다.”

자작의 칭송에 입꼬리를 말아 올린 스텐 백작이 와인잔을 흔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동부의 신성이라고 해도 백작을 상대로 까불어 놓고 안전하다는 건 이해가 가질 않는군.”

“아, 당시 상황을 목격한 자에게 들었습니다만. 수호 기사단장이 그를 보호했답니다.”

“……파발 단장이 말인가?”

스텐 백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파발 단장은 국왕인 베오르크와 자신의 가문을 위해서만 움직인다고 알려진 인물.

일개 남작을 도울 이유는 하등 없었다.

“예.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카이 남작을 극진하게 모신다고 하더군요.”

“점점 알 수가 없군.”

카이 남작이라.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소문으로만 들어봤는데, 제법 궁금해지는군.’

스텐 백작의 아들도 아르칸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영상으로 본 아르칸은 도시 전체에 기품이 넘치는 곳이었어.’

그런 곳을 계획하고, 건설한 이라면 분명 귀족의 표본 같은 사내일 것이다.

스텐 백작은 카이와의 만남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

“오랜만이군.”

“오랜만이네요.”

발칸과 미네르바가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똑같이 세계 8대 길드를 운영하는 입장이었지만, 두 사람은 딱히 접점이 없었으니까.

두 사람 모두 라시온 왕국에서 활동을 했으니 경쟁자이기는 했다.

하지만 더럽고 비열한 술수를 쓰지 않는 두 사람은 나름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라이벌이었다.

때문에 서로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거나, 반대로 좋은 감정을 품고 있지도 않았다.

‘그냥 직장 동료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겠군.’

‘같은 그룹이지만 계열사가 다른…… 직장의 동료를 만난 기분이예요.’

어색한 침묵을 지키는 두 사람은 다른 귀족들에게 인사를 올리러 다니지도 못했다.

두 사람 모두 겨우 남작.

왕국의 모든 귀족들이 모인 장소에서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언노운도 오늘 오겠군.”

“그렇겠죠.”

“흐음.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일찍 오는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좀 늦는 모양이야.”

“항상 일찍 다닌다고요? 지금 무슨 소리하시는 거예요?”

발칸과 미네르바가 서로를 보며 물음표를 잔뜩 띄웠다.

발칸의 입장에서는 자탄을 공략할 때, 사소한 브리핑에조차 언노운의 지각을 본 적이 없었다.

다만 미네르바의 경우에는 달랐다.

‘그 사람은 지각을 밥 먹듯…… 아니, 물 마시듯 하잖아요.’

침공 이벤트 때와 성혈단장의 취임식 때.

그녀가 볼 때 카이는 늦으면 늦었지 먼저와서 기다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카이는 오늘도 여태 모습을 보이지않고 있었다.

“근래 프레이 길드의 활동이 뜸하던데, 무슨 이유라도 있나?”

“내실을 다지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미네르바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발칸이아 라시온의 상황만을 염두에 두고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프레이 길드의 활동이 뜸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나 실상은 달랐다.

프레이 길드는 성혈단의 일원으로써, 최근 대륙을 돌아다니며 혁혁한 전공을 세우는 중이었다.

물론 성혈단은 베일에 싸여 있는 태양교의 비밀 세력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아는 유저는 없었다.

“내실이라,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지.”

“그쪽도요.”

어색한 두 사람치고는 제법 훈훈한 대화가 끝났을 때,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입구의 궁중 집사가 초대장을 요구하자,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남자가 초대장을 건넸다.

“음!”

초대장을 받아든 궁중 집사가 놀란 눈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그는 기품이란 이런 것이라고 외치는 듯한 청색 슈트를 입고 있었다.

어떤 장인이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슈트는 곳곳에 화이트 컬러의 포인트가 들어가 있었다.

“카, 카이 남작님 입장하십니다!”

집사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향했다.

가장 먼저 서쪽 귀족 모임의 신바 백작이 불만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고, 북부 귀족 모임의 수장인 하인드 백작은 웃는 낯으로 그를 맞이했다.

마지막으로 남부 귀족 모임의 수장, 스텐 백작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카이를 두 눈에 담았다.

“호오, 역시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군.”

옷을 갈아입자마자 파발에게 끌려가 궁녀에게 머리 손질까지 받은 카이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품있고, 화려해 보였다.

“흠.”

카이는 자신에게 향하는 다양한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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