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292화 (292/441)

# 292

힐통령 292화

94장 뒤끝 있는 놈(1)

천상의 정원은 언제나 그렇듯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헬릭 님은?’

정원을 두리번거리던 카이는 저 멀리 꽃밭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있는 헬릭을 발견했다.

그녀의 작은 손에는 크레파스가 꼬옥 쥐어져 있었고, 기분이 좋은지 두 다리를 까딱거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흐어어, 치유된다.’

그 평화로운 광경에  카이는 분노가 살짝 누그러트렸다.

상사에게 깨진 아버지가 야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 딸아이를 보면 이런 기분일까.

카이는 아버지들의 마음에 공감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음? 이건…….”

가까이 다가간 카이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미술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젤이 몇 개 세워져 있었는데, 그곳에는 하나같이 대단한 수준의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우리 헬릭 님에게 그림 재능이 있었나?’

카이는 마치 딸아이의 재능을 발견한 열혈 학부모처럼 기뻐하며 그녀를 불렀다.

“헬릭 님!”

“웅? 언제 왔느냐.”

자신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림 그리기에 집중한 듯 하다.

“이게 다 헬릭 님이 그리신 겁니까?”

카이는 이젤에 걸려 있던 그림 한 점을 집어들며 감탄했다.

그림 속에는 자신이 그려져 있었는데, 거울을 볼 때보다 몇 배는 더 잘생겨보였다.

이에 헬릭이 베시시 웃으며 말했다.

“헤헤. 내가 만든 것이니라.”

“하하. 헬릭 님. 그림은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렸다고 하는 거예요.”

깨알 같은 국어 교육까지!

하지만 헬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웅? 만든 거 맞는데…… 일단 좀 기다려 보거라. 다 끝나가니.”

다시 도화지로 고개를 돌린 헬릭은 정신을 집중하며 그림을 마저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뭘 그리고 계신 거지?’

슬쩍 호기심이 동한 카이가 그녀의 어깨 너머로 그림을 엿보였다.

“응?”

그리고 당황했다.

그는 곧장 자신이 들고 있던 초상화와, 헬릭이 그리고 있는 그림을 비교했다.

‘이게 같은 사람이 그린 거라고?’

헬릭이 신나게 그리고 있는 그림은 딱 유치원 생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반면에 자신의 초상화는 유명한 화가가 그렸다고 생각될 정도로 잘 그려놓았다.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던 카이가 두 점의 그림만 번갈아가며 쳐다보자, 헬릭이 소리쳤다.

“다 그렸다!”

잔뜩 신이 난 그녀는 크레파스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그림을 들어올렸다.

그림 속에는 그녀가 며칠 전 방문했던 아르칸 아카데미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

“헬릭 님, 그건…… 혹시 아르칸 아카데미를 그리신 겁니까?”

“당연한 걸 묻는구나. 척 보면 모르겠느냐.”

‘척 봐도 모르겠어서 묻는 건데…….’

속내를 숨긴 카이가 어색한 미소를 짓자, 헬릭이 비어 있는 이젤에 그림을 걸었다.

그러자 황금빛 신성력이 번쩍! 하고 빛나더니 그림이 바뀌었다.

“…….”

마치 아르칸 영지를 사진으로 찍은 것 같은 수준의 대단한 퀄리티!

감탄 밖에 안 나오는 그림을 바라보며, 카이는 실제로 감탄했다.

“와, 이거 사기 아닙니까?”

“흥. 그래서 내가 말했지 않느냐. 그린 것이 아니라 만든 것이라고.”

오늘도 한 점의 그림을 새롭게 만들어낸 헬릭은 그제서야 카이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오늘은 기분이 상당히 나빠 보이는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그녀의 질문에 잊고 있던 자신의 방문 목적을 떠올린 카이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헉! 그런 나쁜 놈들이 있단 말이더냐?”

헬릭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있습니다. 아주아주 나쁜 놈들이에요.”

“정말로 정말로 나쁜 놈들이구나.”

“그래서 말인데, 혹시 헬릭 님이라면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카이는 말을 꺼내며, 놈들이 소환했던 스켈레톤의 뼈 조각을 내밀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우움. 나는 추적에 관한 능력이 전무하지만…….”

뼛조각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헬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앗, 알겠다! 이 기운, 마기로구나!”

“……마기라구요?”

“웅! 모를 수가 없느니라. 이 기운은 앙골모아 녀석의 기운이니까.”

그녀의 확답을 들은 카이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기를 다루는 이라면 지르칸이 속해있던 NPC 세력, 마왕 추종자와 연관이 있을 터.

‘그렇다면 이야기가 흥미롭게 돌아가는데.’

범인이 스켈레톤과 링크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유저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즉, 상대는 마기를 사용하는 유저라는 뜻.

카이가 알기로는 아마 그 녀석이 최초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놈이 대체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표면적으로 자신과 척을 진 유저들은 타이탄 길드와 검은 벌…….

“어?”

순간 카이의 정신이 번쩍 트였다.

‘잠깐,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설은영이 분명히 경고한 적 있었지?’

그녀는 골리앗과 스팅,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일을 꾸미는 것 같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남겼다.

‘골리앗이 그 짧은 시간에 마법을 배웠을 리는 없어. 무도가로서 쌓아올린 스탯이 아까워서라도 그 짓은 못 하지.’

하지만 과연 이번 일을 스팅이 독단적으로 저질렀을까?

‘그럴 리가.’

냉정하게 말해서, 스팅과 골리앗 중 머리가 좀 더 돌아가고 이성적인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스팅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패배한 이유는 멍청해서가 아니라, 오만한 성정과 더불어 자신을 얕보고 있었기 때문이니까.

‘설은영이 경고했던 대로, 뭔가 꾸미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카이는 그게 이번 일은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렇게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일을 꾸미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리는 없어. 아마 이번 일은 즉흥적으로 저지른 일이겠지.’

왜냐하면 천하제일야장대회가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진행 중이었으니까.

자신의 명성에 기스를 내고 싶은 이라면 놓칠 수 없는 기회이기는 했다.

“마기를 다루는 직업이라…… 히든 클래스인가?”

하지만 그 사실이 두렵지는 않았다.

‘히든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야.’

정면에서 모두 부셔버릴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그가 마족들을 소환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 수도 있다.

자신은 아직 마족들이 얼마나 강한지 알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질문했다.

“헬릭 님. 마족들은 강합니까?”

“응? 글쎄…….”

헬릭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강한 개체도 있고, 약한 개체도 있지.”

“지금 저와 비교하면 전체적으로 어때요?”

“그대 정도의 수준이라면…….”

헬릭은 세상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주머니에서 알사탕 하나를 꺼내 포장지를 벗겼다.

사탕을 입 안으로 쏙 집어넣자 한 쪽 볼이 툭 튀어나오는 헬릭.

그녀는 그 상태에서 말했다.

“악마족 중에서는 중간 정도일까?”

“……중간이요?”

카이가 적잖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말했다.

자신이 누구던가?

레벨만 500에 근접해가는 부동의 랭킹 1위 플레이어다.

뿐만 아니라 태양의 사제라는 직업을 지니고 있고, 각종 신들의 비호를 받는 그의 능력치는 동레벨 최강.

심지어 레벨 차이가 몇 백이나 나는 적들과도 비등하게 싸울 수 있을 정도의 능력치를 지닌 그였다.

‘그런 내가 고작 중간이라고?’

카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헬릭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왜, 못 믿겠느냐?”

“아니, 헬릭 님이 말씀하는 거니 못 믿는 건 아닌데…….”

“하지만 그대의 표정은 그럴 리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만.”

그 말에 카이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때만 어린아이 같지 않다니까.’

카이는 그녀의 날카로운 눈치에 두손두발을 다 들며 사실을 인정했다.

“솔직히 상상이 잘 가지 않아서 그래요. 만약 제가 마족들 중에서 중간 정도 수준이라면, 대체 얼마나 강력한가 싶어서요.”

“카이여.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 괜히 중간계와 마계, 천계가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헬릭은 마치 손자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주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먼 옛날 옛적에는 천계와 마계, 중간계라는 구분 자체가 없었느니라. 하지만 천사와 악마족의 힘은 워낙 강대했고, 당시 인간을 비롯한 아인종들의 힘은 너무나도 약했지. 마나라는 기운을 이해하지 못한 존재들이 감당하기에는, 천사와 악마족의 싸움이 너무나도 힘겨웠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진 격이로군요.”

“좋은 비유구나. 그 말이 맞다. 그래서 그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주신께서 차원을 나누셨지.”

헬릭의 눈 앞으로 동그란 빛이 하나 떠올랐다.

“신과 그들을 모시는 천사들이 기거하는 천계.”

그 옆에 생성되는 칠흑의 구.

“악마족들이 거주하는 지옥의 땅, 마계.”

이윽고 두 개의 구가 융합하더니, 거대한 행성 하나가 만들어졌다.

“마지막으로 천계와 마계, 그 두 차원의 성질을 절묘하게 섞은 것이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중간계. 주신께서는 세상을 이렇게 세 개의 차원으로 나누셨지.”

헬릭이 손을 휘젓자 행성이 크게 팽창하며 두 사람을 덮쳤다.

카이가 움찔하며 반응을 하려했지만, 거대화 된 행성은 두 사람에게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이건…….”

카이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비록 텅 비어 있는 대륙이라지만, 평소 자신이 활동하던 대륙을 못 알아볼 리는 없었으니까.

카이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자, 헬릭이 다시 한 번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수십 마리의 드래곤이 허공을 유영하더니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다.

“주신께서는 자신에게 도전한 하위 신들을 드래곤이라는 생물로 재가공하여 중간계를 관리할 생명체로 임명…… 했으나. 천적이 사라진 인간과 아인종들의 발전 속도는 모두의 예상을 깨부쉈지.”

아무것도 없던 대륙 곳곳에 문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문명이 세워지고, 덧없이 사라지고, 그 위에 또 새로운 문명이 일어섰다.

처음에는 세력의 규모도 작았고, 건축물들도 움막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세력이 규모는 점점 비대해졌고, 성과 같은 거대 건축물들이 세워졌다.

그렇게 수천 년의 시간이 흘러 완성된 것이 현재.

인간이 만든 두 개의 제국과 세 개의 왕국, 그리고 수많은 아인종들의 도시와 왕국이었다.

“이 땅에 이런 역사가 있었다니…… 멋있네요.”

비록 게임이라지만, 한 행성의 발전 과정을 목도한 카이가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재미있지 않느냐. 이제 인간과 아인종들은 드래곤의 힘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대만 해도 혼자서 사룡을 처치했지.”

헬릭은 허공에 떠오른 대륙을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평화로운 나날들이다. 하지만 기나긴 평화가 앗아간 것들도 있느니라.”

헬릭이 가볍게 박수를 치자, 대륙이 모습이 바뀌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모습에서, 매일 같이 전쟁이 일어나고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지는 전장으로.

“바로 투쟁심이지. 길었던 평화는 인간들에게서 투쟁심을 앗아갔고, 나태를 안겨주었지. 반면 마계는 어때 보이느냐.”

“미친 동네 같은데요.”

카이가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멋진 표현이구나. 그래, 마계는 약한 자가 죽어 마땅하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지독한 공간이다. 매일을 싸움으로 시작하고, 싸움으로 끝내는 이상한 세계지.”

“……그런 곳에서 살아남은 놈들은 강하겠군요.”

“그래. 그리고 그중에서도…….”

마계의 대륙은 다섯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현재 마계에서 마왕의 칭호를 쓸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 앙골모아 뿐이다.”

“그 녀석이 마계를 제패한 겁니까?”

“아니. 하지만 자신 이외의 존재가 마왕의 칭호를 쓰면, 그 녀석의 목부터 따버리겠다고 선언했지. 때문에 이전에는 다섯 명이었던 마왕이 한 명으로 줄어들었고, 대신 네 명의 마계 대공이 탄생한 것이다.”

“앙골모아라는 녀석이 대체 얼마나 강하길래요?”

“그냥 강하다. 그 어떤 수식어 없이, 그냥 강하다는 말로 모든 것이 설명될 정도로 강하다.”

“혹시 손가락을 한 번만 튕겨도 인류의 절반을 없앨 수 있을 정도로 강합니까?”

카이의 질문에 헬릭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그건 나도 못 하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