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
힐통령 281화
91장 메모리 다이브(2)
몬스터 투기장 사건이 마무리되자, 카이는 성혈단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단장님과 함께 일하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우리는!”
“약자들의 울타리, 부패한 자들의 목덜미를 노리는 비수!”
“아…… 응, 그래. 좋은 일 많이 하고.”
이제는 카이가 자신들의 단장이라는데 자부심마저 느끼는 성혈단원들.
심지어 단장으로 기용될 때 했던 연설에 큰 감동을 받았는지, 저 낯간지러운 문장을 오히려 자랑처럼 떠들고 다닌다.
단원들의 뜨거운 눈빛이 부담스러워진 카이는 그들을 서둘러 돌려보냈다.
그리고 본인이 향한 곳은 사냥터였다.
아무도 오지 않는 외지의 사냥터.
그곳에서 걸음을 멈춘 카이는 몸을 돌려 블리자드를 쳐다봤다.
“설산에서 너와 헤어질 때 내가 했던 말, 기억 나?”
“예. 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시험 친다고 하셨습니다.”
“……그거 말고.”
“아. 강해져서 돌아오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듣고 싶던 대답을 얻어낸 카이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얼마나 강해져서 돌아왔는지 보자. 천천히 들어와 봐.”
“저는 마스터가 강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양하지 않고 전력으로 가겠습니다.”
예의바르게 고개를 꾸벅 숙인 블리자드의 머리가 다시 올라왔을 때, 녀석의 눈빛은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깨끗하게 비웠다.
카이가 자신의 마스터라는 것을 지워냈고, 그가 조금 전 자신을 구출했다는 사실도 지웠다.
그 자리를 대신해서 채운 것은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쓰러트릴 수 있지?’
카이를 어떻게 쓰러트릴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
그 생각이 그의 머리를 꽉 채웠고, 수백 가지의 방법이 빠르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어…… 진짜 천천히 들어오라는 말은 아니었어.”
“죄송합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블리자드는 몸을 낮춰 땅에 납작하게 붙은 뒤, 사족보행을 시작했다.
파바바박!
리자드맨 본인들의 최대 속도를 낼 수 있는 자세!
“으음?”
그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던 카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주변을 빙빙 돌던 블리자드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진 탓이었다.
‘이것도 오랜만인데? 게다가 더 정교해졌어.’
블리자드의 고유 기술 중 하나인 카모플라쥬!
주변 배경에 물감처럼 녹아든 블리자드의 모습은 쉽게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는 녀석한테 포션을 뿌려서 위치를 파악했는데…….’
자신이 그 전투를 기억하는 것처럼, 블리자드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블리자드는 섣불리 달려들지 않았다.
‘다시 겪어봐도 카모플라쥬는 고급 기술이야.’
주시하고 있던 와중에도 움직임을 놓쳤다.
하물며 블리자드가 근처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면?
‘넌 최고의 암살자가 될 수도 있겠어.’
물론 전사의 혼이 그것을 용납할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번뜩!
카이의 눈동자가 녹빛으로 물들었다.
매의 목격자가 활성화된 탓이었다.
‘전방에는 없고, 위쪽의 나무도 아니야. 땅을 파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니…….’
블리자드는 어느새 자신의 배후를 점한 상태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카이의 검집이 거친 숨결을 토해냈다.
까아아아아아앙!
동시에 두 자루의 곡도와 한 자루의 롱소드가 부딪치며 금속이 갈리는 비명을 내질렀다.
“크르릉.”
거친 콧김을 뿜어낸 블리자드는 그 대치 상태를 이어가며 꼬리를 휘둘렀다.
‘마스터에게는 꼬리가 없지.’
때문에 그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회피뿐일 것이다.
블리자드는 그렇게 판단했지만, 물론 그건 오산이었다.
“중력장.”
블리자드가 무사 수행 기간 동안 강해진 것처럼, 카이도 그간 놀고 있었던건 아니었으니까.
순식간에 무거워진 꼬리는 카이의 옆구리 대신 땅을 강타했다.
푸화아악!
흙먼지가 잔뜩 피어오르는 순간, 그리고 블리자드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는 순간.
카이는 몸을 살짝 뒤로 빼서 블리자드의 흐름을 빼앗고는 재차 돌진했다.
몸의 균형이 무너진 블리자드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무너졌다.
그런 그의 가슴팍으로 카이의 검 손잡이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콰아아아앙!
‘이 녀석, 여전히 심리전으로 들어가면 약하잖…… 음?’
돌연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카이의 귓가를 흔들었다.
띠링!
[카운터 어택에 14,84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충격으로 모든 움직임이 2초 동안 봉쇄됩니다.]
‘뭐라고?’
카이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기치 못한 데미지가 훅 들어와서 놀란 것은 아니었다.
‘블리자드가 이 정도의 심리전을 걸 줄 안다고?’
놀란 것은 바로 그 부분.
무사 수행을 떠나기 전의 블리자드는 용맹했다.
아오사와의 전투 때도, 잔머리를 굴리지 않고 정면에서 맞서는 무모함을 보여줄 정도였다.
그랬던 블리자드가 변했다.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을 익혔어. 표정 연기도 제법인데?’
단순히 강하기만 한 자는, 강하면서 머리가 좋은 자를 당해내지 못한다.
전사처럼 용맹했지만 앞만 보고 달려들던 과거의 블리자드는 실력자들의 좋은 먹잇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녀석, 정말 강해졌구나.’
카이의 입가 주변에 웃음이 만개했다.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는데, 스스로 이 정도의 실력을 쌓은 블리자드가 기특해서였다.
‘하지만 기특한 것과는 별개로, 마스터의 체면을 구길 수는 없지.’
블리자드는 스턴 상태에 빠진 카이에게 득달처럼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카이의 몸을 금빛 광채가 휘감았다.
“햇살의 따스함.”
순식간에 디버프 상태를 해제한 카이의 왼쪽 소매에서 사슬이 튀어나갔다.
촤르르르륵!
신성 사슬은 위쪽의 단단한 나뭇가지를 반 바퀴 맴돌더니, 그대로 떨어지며 블리자드의 왼쪽 팔에 휘감겼다.
“크르륵?”
카이는 당황한 표정의 블리자드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있는 힘껏 사슬을 잡아당겼다.
부우웅!
블리자드는 몸에 힘을 주며 버텼지만, 도르래의 원리까지 이용한 카이의 압도적인 힘에 저항할 수는 없었다.
결국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블리자드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졌습니다. 내려주십시오.”
“나한테 한 방 먹일 생각에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더라?”
카이가 웃으며 신성 사슬을 해제하자, 바닥에 착지한 블리자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우물쭈물,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블리자드의 입 안에서 한 문장이 맴돌다가 사라졌다.
‘마스터에게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결투에서 일방적으로 패배한 블리자드는 차마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자신에게 그런 말을 뱉어낼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더욱 크게 반응했다.
“너, 엄청 강해졌네.”
검을 갈무리하던 카이가 뜬금없이 뱉어낸 말에 말이다.
“……잘 못 들었습니다?”
“너 강해졌다고. 내 등을 맡겨도 좋을 만큼 강해졌어.”
싱긋 웃는 카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블리자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눈을 휘둥그렇게 뜬 블리자드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정말이십니까, 마스터!”
“물론이지. 지금 당장 널 당해낼 유저가 몇이나 있겠어.”
단순한 립 서비스가 아니었다.
실제로 현재 블리자드의 실력은 상위 랭커는 되어야 상대가 가능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진심으로 등을 맡길 수 있겠다고, 카이는 생각했다.
“마, 만약 저에게 등을 맡겨주신다면…… 마스터의 등을 제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블리자드의 샛노란 눈동자가 의욕으로 활활 불타올랐다.
“그래그래.”
적당히 맞장구를 쳐준 카이가 그와 함께 영지로 돌아가려는 찰나.
블리자드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마스터.”
“응? 왜.”
“마스터는 병에 걸린 자들을 낫게 하는 힘을 지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카이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근데 갑자기 왜?”
“제가 무사 수행을 할 때, 몬스터들에게 둘러쌓여 있던 사람을 하나 구했습니다.”
“오, 좋은 일 했네.”
“그런데 제 생각엔 그 사람이 많이 아픈 것 같습니다. 고통스러워 보였습니다.”
블리자드가 하고 싶은 말을 깨달은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장 서.”
“……정말이십니까?”
“내 손이 보통 약손이 아니거든. 그리고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네가 이렇게 마음을 쓰는지도 궁금하고.”
“감사합니다.”
블리자드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사실 마스터의 심성이라면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은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아무렇지도 않게, 오히려 반갑다는 기색으로 승낙해줄 줄은 몰랐다.
“자,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야하지?”
“플람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입니다.”
“거기 가서 소환해 줄게.”
플람은 텔레포트 게이트가 없는 조그마한 산골 마을이었다.
때문에 카이는 블리자드를 역소환한 뒤,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해 플람과 최대한 가까운 도시로 이동해야만 했다.
“자, 여기가 제일 가까운 도시야. 길은 알겠어?”
“예. 한 번 가 본적이 있습니다. 저 길 잘 찾습니다.”
블리자드가 콧김을 뿜어내며 자신감을 내비췄다.
하긴, 부족 최고의 전사라 꼽히던 녀석이 길치일리는 없을 터.
녀석을 따라 산속 깊이 들어가기를 두 시간.
슬슬 해가 떨어지는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두 사람은 한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야?”
“예, 이곳이 플람입니다. 좋은 마을입니다.”
블리자드는 묘하게 들뜬 기색을 내비췄다.
플람은 정말 작은 마을이었는데, 통나무로 지어진 오두막도 20여 채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녁이 다가오자 분주하게 움직이던 마을 주민들은 블리자드를 알아보고는 인사를 했다.
“오오, 저기 몬스터 검사 양반이 왔군.”
“껄껄껄, 언제 사라졌나 했더니, 다시 돌아오기는 했군그래.”
그들의 호의적인 반응에 카이는 블리자드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인기 좋은데?”
“……마스터께서는 약자를 보호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곤경에 처한 인간들을 가볍게 도와줬던 것뿐입니다.”
블리자드는 최대한 겸손한 말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어깨와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 상태였다.
“그래서 누군데? 그 아프다는 사람은.”
“저 집의 주인입니다.”
블리자드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오두막 하나를 가리켰다.
다른 집들과는 달리, 유난히 작고 낡은 집이었다.
곧장 그곳으로 걸어간 블리자드는 똑똑, 현관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가 갈라진 나무 문 사이로 흘러나왔다.
“블리자드.”
끼이이익.
블리자드가 자신을 소개하자, 가타부타 말 없이 현관문이 열렸다.
문지방 너머로 서 있는 건 19세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아이라고 하기엔 너무 크고, 그렇다고 어른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나이.
그의 눈두덩이 밑으로는 짙은 다크써클이 내려와 있었다.
“드, 드디어 와주셨군요. 이제야 검술을 가르쳐주시는 겁니까?”
절레절레.
블리자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소년에게 카이를 소개했다.
“지금 너에게 필요한 것은 검술이 아닌 치료다.”
옅은 한숨을 내쉰 블리자드는 카이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카이 님. 이 아이의 이름은 로엔…… 보다시피 상태가 많이 안 좋은…… 마약 중독자입니다.”
“흐음…….”
카이가 침음을 흘렸다.
‘햇살의 따스함으로 마약 중독증도 치료가 가능할까?’
쇠뿔도 단김에 빼는 법.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카이는 로엔에게 햇살의 따스함과 큐어, 블레스를 비롯한 각종 스킬들을 사용했다.
로엔의 혈색이 훨씬 나아지고, 다크써클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죽어있는 눈동자는 변하지 않았다.
“치료…… 시도해 보지 않은 방법이 없습니다.”
로엔이 힘없이 피식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소용없었어요. 순회 방문을 하는 치료사가 그러더군요. 제가 지닌 병은 마음의 병이라 스스로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전 도저히…… 도저히…… 크윽.”
말을 잇던 로엔이 돌연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카이가 블리자드를 쳐다보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