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255화 (255/441)

# 255

힐통령 255화

86장 검술의 달인(3)

롱소드는 길지만, 그 길이가 압도적인 것은 아니다.

당장 유효 사거리가 더 긴 무기를 찾아보면 창이 있다.

하지만 미드 온라인의 기사 대부분이 사용하는 무기는 창이 아닌 검이다.

창이 배우기도 더 쉽고, 사거리도 길며, 더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데 기사들의 주 무기로 채택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 수많은 기사들이 이에 의문을 품었고, 효율을 위해 창을 들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 깨닫게 되었다.

바로 창은 기본적으로 ‘찌르는’ 무기이라는 것을 말이다.

반면 롱소드는 찌르고, 베는 것이 무기의 주요 사용법이다.

강력한 유효 공격 수단이 하나 더 있다는 것.

그것은 창보다 검 쪽이 더 변수를 창출하기 쉽고, 깊이 파고들 만한 여지가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크윽.”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지만, 카이는 바체와의 대련을 통해 그 사실을 깨달았다.

‘단순히 손목을 반 바퀴 돌린 것뿐인데…….’

카이의 검 아래에 있던 바체의 검은 어느새 카이를 위에서 짓누르는 중이었다.

완벽한 형세의 역전.

말은 쉽지만 서로의 검이 전력으로 부딪치는 와중에 그런 식으로 검의 위치를 뒤바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상대방의 힘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이해하고, 그 흐름을 이용할 줄 알아야만 선보일 수 있는 신위.

‘게다가 무슨 힘이……!’

바체가 한 손으로 가볍게 누르고 있는 검은 태산을 올려놓은 듯 무거웠다.

그 무게를 두 손으로 막아내는 카이의 무릎이 조금씩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것은 정확한 분석이었다.

이런 식의 경주가 계속되면 상대방이 먼저 결승선에 도달할 것이라는 냉정한 분석.

‘홀리 익스플로젼이나 추적하는 빛의 화살, 태양의 분노 등을 쓰면 이 위기는 벗어날 수 있겠지만…… 그건 안 돼.’

카이는 검을 배우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지, 바체를 쓰러트리고자 온 것이 아니었다.

달리 말하면 검이 아닌 마법 주문들을 써서 위기를 벗어난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소리였다.

때문에 그 상황에서 카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바체의 검을 쳐내는 것뿐이었다.

헌데, 그러한 노력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또한, 힘에만 모든 신경을 쓰는 적만큼 농락하기 쉬운 상대도 없다.”

바체는 카이가 혼신의 힘을 담아 자신의 검을 밀어내자, 미련도 없이 제 검을 회수했다.

“어엇!”

자연스럽게 카이의 검은 허공을 향해 쭉 뻗어나갔고, 몸의 무게 중심이 크게 흐트러졌다.

이어서 세 번의 짧은 소음이 귓가로 들려왔다.

서걱, 핏, 피익!

그 소리가 무엇인지는 구태여 알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카이의 눈앞에 떠오른 붉은색 메시지가 점등처럼 반짝이는 중이었으니까.

띠링!

[손목의 힘줄이 잘렸습니다. 일시적으로 힘 스탯이 25% 감소합니다.]

[경동맥이 잘렸습니다. 뇌에 산소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일시적으로 스테미너가 30% 감소합니다.]

[왼쪽 눈이 실명되었습니다. 일시적으로 한쪽 시야가 차단됩니다.]

찰나에 휘둘러진 세 번의 공격.

그것은 여태까지 카이가 적들을 공격하던 방법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큰 데미지를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상태이상까지?’

카이도 이런 식으로 급소를 공격하면 상태이상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직 그의 스탯이 대단치 못했을 때, 이 방법을 누구보다 유용하게 사용했던 것이 바로 그였으니까.

하지만 충분한 스탯이 모이고, 본인의 스펙 자체가 높아지면서 카이는 굳이 이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렇게까지 하지않아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찰나의 순간에 뇌를 비우고 아무런 고민 없이 바로 공격할 수 있는 곳.

카이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곳만을 찔러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편안함에 물들어있었던 것이다.

“오우거는 고블린을 사냥할 때조차 최선을 다 하는 법이다.”

“윽…….”

바체의 질책에 카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검술에서 완벽하게 밀렸다는 부끄러움보다는, 초심을 잃었다는 수치심이 가장 먼저 밀려들었다.

“검술의 경지는 예전보다 나아졌을지 몰라도, 마음만큼은 퇴보했군.”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짙은 실망감이었다.

카이가 화이트홀에서, 그리고 비르 평야에서 이를 악물고 강자들과 싸워 이긴 것을 알고 있는 바체는 더더욱 큰 실망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할 말이 없어진 카이가 입술을 지끈 깨물자, 바체가 중얼거렸다.

“개인적으로 카이 그대의 도전을 기다렸던건 최근 돌아다니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대가 모험가들 중에서는 가장 강력한 존재라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맞습니다.”

“그렇다면 그 위치에 맞는 기개를 보이도록. ‘너의 검술’을 나에게 보여라.”

실망감을 느꼈지만 대련을 그만두지는 않겠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카이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바체는 검술의 달인이야.’

달인들이라면 대부분 그렇지만, 본인의 아이덴티티가 굉장히 강한 편이다.

그것은 바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터.

오히려 검술의 달인이기에 카이가 초심을 잃어버린 것을 곱게 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나에 대한 평가를 뒤집어야 한다. 이게 마지막 기회야.’

이 기회를 살리려면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한 수를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카이가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다.

자신의 최대 속도는 바체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잡힌다.

자신의 강한 힘마저 바체는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그 때 카이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여명의 검술관 관장, 후이의 가르침이었다.

‘검술의 기본? 당연한걸 묻는 군. 빠른 속도와 강한 힘, 지치지 않는 체력이지. 정교한 검술? 그런 것들도 전부 뿌리가 튼튼해야 그 위에 세워지는 법. 질퍽한 진흙 위에는 가옥이 아닌 황궁을 세워도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검술의 기본인 속도와 힘, 그리고 체력.

이 중에서 속도와 힘은 바체에게 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체력이라면?’

카이가 짤막한 탄성을 터트렸다.

‘바체는 나에게 ‘나의 검술’을 보여달라고 했어.’

하도 검을 휘둘러 대서 자신도 모르게 정체성을 착각하고 있었지만, 카이는 전사가 아니었다.

그는 바로 사제.

아군을 치료하고 축복하여 능력을 끌어올리는 데에 특화된 직업의 소유자였다.

‘사제면 사제답게.’

카이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동시에 바체의 입꼬리가 살포시 말려올라 갔다.

‘깨달았는가.’

애초에 그가 카이에게 대련할 기회를 줬던 이유는 진심으로 싸우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카이가 부족한 검술을 조금이나마 향상시킬 수 있도록 위함이었다.

그러자면 학생의 수준이 어떻고, 수업 진도는 얼마만큼 나갔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나의 가르침은 대련이 시작된 순간부터였다.’

사실 바체의 교육법은 매우 훌륭한 편이었다.

검을 고작 몇 번 나누고, 말을 두 어 번 건넨 것만으로도 카이가 초심을 되찾을 수 있게끔 만들었으니까.

심지어 지금은 카이로 하여금 자신의 힘이 통하지 않는 강력한 적을 만났을 때, 최소한 패배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중이었다.

“후우.”

짧은 호흡을 내뱉은 카이는 몸의 자세부터 바꾸었다.

‘이제 믿을 건 정말 체력뿐이야.’

만약 이곳이 적이 한가득인 전장이었다면 체력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도 없다.

카이는 적을 죽일 때마다 스테미너가 회복되는 스페셜 칭호, ‘전장의 화신’이 있으니까.

‘하지만 루시퍼, 지르칸과 싸울 때도 느꼈지만…… 일대일 승부에서의 스테미너 고갈은 아직까지 제법 심각한 편이지.’

이에 대한 해결책 따위는 당장 없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차선책’이 있기 마련.

‘최소한 소모되는 모든 스테미너를 내 지배하에 놓을 수 있어야 해.’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가계부를 적는 것처럼, 자신의 움직임이 소모할 모든 스테미너를 계산해야 한다.

이를 통해 카이는 자신의 움직임을 가장 효율적으로 바꿀 수 있을 터였다.

“이번에는 내가 가지.”

말을 마친 바체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깜빡.

카이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을 때, 시야의 정중앙에 있던 바체는 왼쪽 아래에 위치해있었다.

동시에 카이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두 발을 다시 위치하여 바닥을 단단하게 받치고, 허리를 숙여 아래에서 다가올 바체의 공격에 대비하고, 검을 들어올려 가드한다. 그 모든 행동의 스테미너 소모 값은…….’

전체 스테미너의 0.7%.

다음 순간, 바체의 검이 카이의 가드를 두드렸다.

까아아아앙!

압도적인 공격력!

카이는 무리를 하면 충분히 제자리에서 버틸 수 있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이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니까.’

상대방을 강자라고 인식한 이상, 그 공격을 버티지 못하는 건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후우웅.

카이의 몸이 바람결을 잘 탄 돛처럼 뒤로 훌쩍 날아갔다.

바체와의 격돌에서 발생한 충격을 거스르지 않고, 몸을 뒤로 날리며 그대로 흩어낸 것이다.

만약 카이가 오기를 부려서 바체의 공세를 제자리에서 버텼다면 상당량의 스테미너가 사라졌을 터.

“호오.”

한 마디를 던졌을 뿐인데 싸움에 임하는 태도부터 시작해 전투법까지 달라졌다?

“나름 가르치는 맛은 있군.”

바체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고, 다시 한 번 그의 검이 휘둘러졌다.

***

“……넌 정말 독한 놈이다.”

바체가 말했다.

“바체님도 생긴건 지적으로 생기셨는데, 정말 지독하시네요.”

이에 지지않고 카이도 대꾸했다.

물론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누군가가 들었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 분명했다.

너희 둘 모두 똑같은 독종이라고.

“간다.”

“오십시오.”

바체의 음성에서는 짜증이, 카이의 목소리에서는 여유가 묻어나왔다.

까드득!

분노가 서려있는 바체의 돌진에 연무장 바닥은 쩍쩍 갈라져나갔다.

‘온다.’

이제는 바체의 속도에 제법 익숙해진 카이.

카이는 곧 다가올 공격에 대비해 검을 들어올렸다.

쩌엉!

가볍게 검을 막아내는 카이.

그 움직임에는 단 한 톨의 군더더기도 없었다.

만약 이것이 스포츠였다면, 그 자리에서 기립 박수를 받았을 정도로 완벽한 폼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카이의 반격.

“이번엔 제가 갑니다.”

미드 온라인에는 스탯이 존재하고, 아이템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게임의 ‘공격력’이라는 개념은 저 두 가지를 베이스로 깔고 수치화된다.

그렇다면, 플레이어가 전력으로 휘두르는 검과, 대충 휘두르는 검의 공격력은 과연 똑같을까?

카이는 이 순간,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답할 수 있었다.

쩌어어어어어엉-!

그 둘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카이가 바체와 대련을 시작한 지 12일 만에 터득한 깨달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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