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힐통령 190화
69장 왕의 명령(2)
[영지 감찰]
등급 : B+
물의 도시라 불리는 아쿠에리아는 최근 폭풍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는 도시입니다.
라시온 왕국의 국왕인 베오르크는 아쿠에리아를 통치하는 바리탄 남작을 치하하며 승격을 시킬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영지를 감찰하여 그가 자작이 되기에 바람직한 인간인지를 확인하십시오.
퀘스트 보상 : 라시온 왕국 공헌도 15,000, 하인드 백작의 호감도 상승.
실패 페널티 : 하인드 백작의 호감도 하락, 명성 대폭 하락, 경험치 하락.
‘아쿠에리아?’
오래간만에 보는 도시의 이름에 카이는 눈만 끔뻑거렸다.
‘이곳이라면 분명 크라포드가 살던 곳이었지?’
그리고 자신의 기억이 멀쩡하다면 바리탄 남작은 크라포드의 연인이던 엘레느를 납치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런 녀석이 자작 승격이라, 배 아픈데?’
어렴풋이 미소를 짓는 카이에게 하인드 백작을 설명을 이어나갔다.
“대영주의 호칭은 권리만 있는 것이 아니네. 의무 또한 동반하고 있지. 나는 국왕 폐하의 신임을 받고 있는 상태로 그의 믿음에 보답할 필요가 있었네. 그것이 왕실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폐하의 눈과 발, 손이 되어 주는 일이었지.”
“베오르크 폐하가 원하는 일을 백작님이 대신 처리해 주는군요.”
“맞네. 애초에 그것 때문에 나에게 권력을 몰아주신 것이지.”
과연 국왕의 왼팔.
과거 전장을 휩쓸었다는 백전노장의 전사가 훌륭한 정치인으로 탈바꿈한 것에는 이런 비사가 숨겨져 있었다.
“그런데 감찰이라고 하면 그곳에 가서 무엇을 확인하면 됩니까?”
“형식적인 절차이니 그리 염려치 말게나. 그 도시의 전반적인 부분을 꼼꼼히 파악하여 폐하에게 알려드리면 되네. 본래라면 나의 기사들을 보낼 테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현재는 모두 영지를 재건하고 혹여나 다가올 몬스터들을 경계하느라 자리를 비울 수 없네.”
“물론입니다. 이런 일 정도는 당연히 저에게 맡겨주셔도 됩니다.”
카이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감찰사의 명패를 챙기며 눈을 빛냈다.
“아쿠에리아. 제가 한 번 탈탈 털어보겠습니다.”
* * *
“……이게 누구신가?”
오랜만에 보는 타르달이 그를 슬쩍 흘깃거리며 중얼거렸다.
“바빴던 일은 대충 마무리가 된 것 같군.”
“여전히 바쁘지만, 이제 인사를 드릴 정도의 여유는 있습니다.”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꾸하며 자리에 앉는 카이를 가만히 응시하던 타르달이 입꼬리를 올렸다.
“……강해졌군. 항상 느껴지던 애송이의 풋내가 자취를 감추었어.”
“하하. 아직 멀었습니다. 더욱 정진해야지요.”
가만히 앉아 차를 홀짝이는 카이의 전신에서는 무형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건 단순히 위엄 스탯이 올랐기 때문만은 아니다.
위엄은 오히려 강림 스킬을 사용하며 크게 떨어진 상태.
‘자신감 때문이려나.’
혼자서 10대 길드 중 한 곳을 무너뜨렸다는 자신감은 카이에게 강자의 여유를 선물해 주었다.
게다가 이전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지만, 검법 스킬이 고급 3레벨이 되며 바뀐 것이 또 하나 있었다.
‘설마 이런 효과까지 있을 줄이야.’
왜 이전에는 벨 수 없던 것을 지금은 벨 수 있을까.
카이는 그에 대한 고민을 골똘히 해보았다.
자신이 올라선 경지를 정확히 알아야만 다음 계단을 밟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은 꽤 단순했다.
‘몸의 균형이 놀랍도록 정교해졌어.’
몸의 균형이 완벽한 인간이란 없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습관이란 것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것은 몸의 균형을 해친다.
좌우 밸런스가 어긋나서 단순히 걸을 때조차 몸은 한쪽으로 기울게 된다.
하지만 현재 카이의 몸은 갓 조율한 피아노처럼 밸런스가 잘 맞춰져 있는 상태였다.
‘허리가 곧게 펴지고 어깨와 목도 바르게 교정되었어.’
체감상 키도 조금 큰 것 같은 느낌.
습관처럼 움츠리던 굽은 어깨가 펴졌고, 거북이 같던 목은 기린처럼 곧게 솟았다.
그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굉장한 신뢰감과 안도감을 선사해 주었다.
지금의 타르달처럼.
“마침 추적자들이 애를 먹고 있는 일이 하나 있었는데, 자네가 가주면 될 것 같군.”
“예. 오늘은 인사차 들린 거지만, 이번 일이 끝나는 대로 다시 오겠습니다. 그런데 무엇과 관련된 일이기에 추적자들이 애를 먹고 있습니까?”
“후우. 우리 왕국의 북쪽은 하비에르 왕국과 이어진 것을 알고 있겠지?”
“예. 사막 왕국으로 유명하죠. 하비에르는.”
“맞네. 그곳과 이어진 덕분에 우리 왕국의 북부는 따뜻하네. 하지만 북서쪽은 그렇지않지.”
“북서쪽이라면…….”
잠시 대륙의 전도를 떠올린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시온 왕국의 북서쪽은 설산의 끄트머리와 연결된 곳이잖습니까.”
“그래. 이번엔 설산이 말썽일세.”
“혹시 설산의 야만 부족들 때문입니까?”
“겨울만 되면 식량을 약탈하러 내려오는 설산의 야만 부족들도 문제지만…… 그들은 사람들을 죽일지언정 먹지는 않네.”
그 한 마디에 카이의 눈빛이 바뀌었다.
“설산에 사람을 먹는 몬스터가 나타난 겁니까?”
“맞네. 게다가 보통 존재가 아니야. 추적자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에 따르면 거대한 와이번이나 드레이크로 추정되네. 재수가 없으면…… 해츨링일지도 모르지.”
“해츨링이라면 설마 드래곤?”
“태어난 지 500년이 채 되지 않은 어린 드래곤을 해츨링이라 부르지.”
비록 해츨링이라지만 무려 드래곤이 관계되어 있는 퀘스트!
카이는 주먹을 꾸욱 쥐며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거지. 판타지 게임이라면 당연히 드래곤 정도는 나와줘야지!’
타르달의 말에 진한 로망을 느낀 카이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의뢰, 제가 찜해놓겠습니다. 절대 다른 누군가에게 줘서는 안 됩니다.”
“글쎄. 피해가 점점 커지는데 자네가 늦는다면 어쩔 수 없겠지. 일주일 안에 오게.”
“일주일. 알겠습니다.”
반드시 일주일 안에 감찰 퀘스트를 끝내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카이는 타르달의 저택을 나섰다.
‘좋아. 우선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겠지.’
카이는 슬쩍 고개를 돌려 아쿠에리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 * *
“아이고! 감찰사 나으리께서 이렇게 젊은 모험가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하!”
살이 뒤룩뒤룩 찐 돼지가 이마를 반짝거리며 아부를 늘어놓았다.
‘이 녀석이 바리탄인가.’
크라포드와 엘레느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카이는 아니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속내를 숨긴 카이는 입가에 밝은 미소를 걸치며 입을 열었다.
“예. 제가 이번에 도시를 감찰하게 됐어요. 감찰을 시행하는 이유는 아시겠지요?”
“흐흐흐. 물론입니다.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승작을 위한 절차이지요?”
“맞습니다. 물론 영지의 치명적인 결함이 발견되면 물 건너가겠지만.”
“어이쿠! 저희 영지는 꿈과 사랑, 우정이 가득한 곳이랍니다. 얼마든지 둘러보십시오.”
카이의 뒤꽁무니에 따라붙은 바리탄 남작은 쉴 새 없이 떠들며 아부를 늘어놓았다.
“감찰사님의 명성이 왕국을 진동시키고 있습니다. 화이트홀에서부터 내려오는 영웅담은 벌써 왕국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상태이지요. 거기다 이번에 비르 평야에서 뮬딘 교들의 대군을 무찌른 일화는 정말이지!”
사르르륵.
그의 아부에 적절히 맞장구를 쳐주던 카이는 감찰사에게 주어지는 서류를 뒤적이며 물었다.
“몇 년 사이에 영지의 매출이 세 배나 뛰었네요. 어떻게 된 일인가요?”
“모험가들 덕분이지요. 아시다시피 저희 도시는 아름답기로 유명해서 연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입니다. 모험가들이 자주 와서 돈을 물처럼 써주니 자연스레 매출이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흠…….”
3년이라.
미드 온라인이 오픈한 지 1년 정도가 되었으니 게임 시간으로는 딱 일치하는 시간이었다.
‘확실히 모험가들이 돈이 되기는 하지.’
자신의 영지인 리버티아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다 주고 있는지를 떠올린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터넷에서 입소문이 퍼지는 리버티아는 현재 최고의 관광 명소로 꼽히는 중이었으니까.
‘드워프들까지 데려오면 난리가 나겠어.’
서류를 훑고, 바리탄의 안내를 받아 도시를 돌아본 카이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훌륭한 도시입니다. 폭풍적으로 성장한 아쿠에리아를 보니, 영주님의 능력은 안 봐도 뻔한 것 같습니다.”
“오오오, 그 말씀은……?”
“영지의 감찰은 이것으로 마쳐도 될 것 같아요.”
탁.
말을 마치고 서류철을 덮는 카이의 행동에 바리탄 남작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예……? 감찰은 보통 일주일에서 길면 한 달까지 제법 디테일하게 행해진다고 들었습니다만…….”
“모험가들은 ‘빨리, 빨리’가 모토입니다. 특히 제 고향은 더 그렇습니다.”
땅덩어리가 좁고 인구가 밀집된 지역은 한정되어 있다.
당연히 주변의 모두가 경쟁 상대!
같은 물건을 지니고 있다면 먼저 제공하는 것이 성공을 위한 지름길이었다.
물론 그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바리탄 남작은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저어…… 정말 감찰을 이것으로 끝내셔도 되는 겁니까? 혹시 평가에 뭔가 불이익은…….”
“절대 없을 겁니다. 절 믿으세요.”
애초에 카이는 이런 영지에서 한 달이나 썩고 있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일주일 안에 돌아가지 못하면 드래곤 퀘스트가 물 건너가. 그런데 여기서 느긋하게 감찰이나 하고 있으라고?’
차라리 영주를 모르는 곳이라면 신경이라도 더 써줬을 터.
하지만 다행히도 이곳의 영주에 대해서는 카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이틀 뒤 폐하에게 보고를 올릴 테니 아침까지 왕성으로 와주십시오.”
“오, 오오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바리탄 남작의 얼굴에선 광대인지 볼살인지 지방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승천하듯 위로 솟아올랐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카이는 말없이 웃었다.
* * *
이틀 후 아침.
카이는 오랜만에 방문한 왕실의 팽팽한 긴장감에 미소를 지었다.
‘역시 왕성의 분위기는 마음에 들어. 고결한 기분이 든다고나 할까.’
항상 시끌벅적한 도시의 번화가나 볼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냥터와는 다르다.
사람도 많고 눈을 사로잡는 건축물이나 예술품이 끝내주도록 많지만, 고요한 곳.
그것이 바로 왕이 거주하는 왕성의 위엄이었다.
“카이 님. 베오르크 국왕 폐하께서 알현을 허하셨습니다.”
“그럼 바로 들어가지요.”
카이가 슬쩍 고개를 돌려 바짝 얼어있는 바리탄 남작에게 눈짓했다.
“따라오십시오.”
“네, 네…… 그런데 이쪽 분은 누구십니까?”
“제 수행원입니다. 신경 끄시고 알현실로 입장하지요.”
카이는 두툼한 로브를 덮고 있는 사람의 어깨를 두드리며 알현실로 들어갔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머리를 푹 숙이곤,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들라.”
알현실에 울려 퍼지는 낮고 육중한 베오르크의 목소리.
그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카이의 귓가를 울렸다.
“감찰사 카이에게 묻는다. 그대가 보기에 아쿠에리아의 눈부신 발전에는 일절 거짓이 없었더냐.”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왕의 눈이 빛난다.
“예. 아쿠에리아의 성장에는 그 어떤 조작이 없었습니다. 눈부신 성장은 사실입니다.”
“그곳의 백성들은 면면에는 항상 웃음이 걸려 있더냐.”
“제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랬습니다.”
“호오.”
고작 남작을 자작으로 승작시키는 일이다.
베오르크 국왕에게는 이보다도 더 중대한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때문에 그는 카이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손을 휘저었다.
“이 시간부로 바리탄의 품계를 남작에서 자작으로 승작시킨다.”
그의 성정과 딱 걸맞은 깔끔하고 쾌속한 진행!
바리탄의 입은 누가 봐도 귀에 걸릴 정도로 올라갔다.
“가, 감사하옵니다. 폐하! 저 바리탄, 이 한 몸을 바쳐 폐하게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
“그런데 국왕 폐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바리탄 남작이 자작이 된 감동적인 순간, 카이가 그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이에 베오르크 국왕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흐음. 무엇이 궁금하지?”
“제가 알기로 라시온 왕국에는 아인종을 노예로 삼는 것이 불법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닙니까?”
“물론이다. 아인종들은 대륙의 위기 때마다 우리 인간을 도와주었던 고마운 전우들. 외모가 아름답다는 이유로 그들을 노예로 삼는 것은 국법 위반이다. 그건 갑자기 왜 묻지?”
베오르크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답을 얻어낸 카이가 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 로브를 벗고, 얼굴을 공개해주십시오.”
그 말에 카이가 수행원이라고 데려온 인물이 천천히 로브를 벗었다.
로브 아래에서 드러난 것은 아름다운 미녀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인간 왕국의 왕이시여.”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 엘레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