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힐통령 182화
66장 The Rich(2)
지지직, 지지지지직.
은행 ATM 기계가 특유의 비프음을 토해냈다.
잠시 후 금액이 찍힌 통장이 나오자, 한정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나 부자네.”
물론 이전에도 가난했던 것은 아니다.
집안은 부유했으니까.
하지만 한정우 개인의 자산은 10억이 채 되지 않았다.
‘물론 내 나이에 비하면 말도 안 되게 성공한 건 맞지만…….’
그래도 스스로 부자라고 부르기에는 상당히 애매한 액수였다.
물론 그 고민도 오늘로 끝.
‘계약금을 6대 길드와 N분의 1로 나누고, 전쟁에 참여한 일반 유저들에게는 사비를 털어서 조금 나눠줬어.’
순수하게 계약금으로 받은 돈만 따지면 겨우 6억이 조금 넘었다.
하지만 시청률에 따른 인센티브 지급은 오직 자신만을 위한 조건.
“시청률이 60%가 넘게 나올 줄이야…….”
NET미디어도 웃고, 한정우도 웃는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요즘 세대에 불가능이라 불리던 시청률을 뽑아낸 NET미디어의 주가는 그 순간부터 상한가를 치는 중이었으니까.
게다가 인터넷을 통한 동시 중계로 전세계에 자신들의 이름을 알린 상태였으니, 지금쯤 계약을 따내지 못했던 경쟁 방송국들은 속이 쓰리다 못해 곪아갈 것이 분명했다.
“시청률 30% 이상일 때 1%당 1억이었으니까…….”
63.4%.
소수점은 제외하고 33%의 추가 시청률을 달성한 상태!
‘뭐, 그래서 이런 액수가 찍힌 거겠지.’
42억, 0이 몇 개인지 세어보아야 할 정도의 금액이 통장에 찍혀 있었다.
“미드 온라인 오픈 1년 만에 이 정도라…….”
태양의 사제로 전직을 하고 나서는 반년 정도밖에 안 지났다.
미드 온라인이 낳은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이 된 한정우는 통장을 챙기고는 은행을 나섰다.
그 길로 편의점에 들린 그는 간식거리와 음료수를 고르며 생각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좀 정리해 보자. 우선은…… 타이탄 녀석들이겠지.’
세계 10대 길드들은 그 무엇보다 이미지라는 것을 중시한다.
막 나간다는 검은 벌이나 타이탄마저 좋은 이미지를 가꾸려 노력했을 정도이니까.
자신이라고 다를 수는 없다.
‘호구라는 이미지가 잡히면 그때부터는 진짜 힘들어져.’
침공 이벤트 때 타이탄은 자신에게 잽을 날렸다.
물론 자신이 카운터펀치를 멋지게 꽂아 넣었다지만, 먼저 한 대 맞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10대 길드 쪽에 너무 만만하게 보일 거야.’
타이탄 길드가 딱히 두려운 것도 아니다.
굳이 아인종 세력을 일으키지 않아도, 자신은 개인으로 활동을 하면서 그들을 충분히 괴롭힐 수 있다.
‘좀 치사하게 들리겠지만, 타이탄 길드에 소속된 저레벨 유저들부터.’
비록 카오틱 딱지를 달 수는 있겠지만, 확실한 경고를 할 수는 있다.
‘타이탄 길드 마크를 가슴에 붙이고 있으면 나의 사냥감이 될 수도 있다. 이 사실부터 알려줘야지.’
자신도 놈들 때문에 침공 이벤트에서 7위를 한 것에 아직까지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더 신경 써야 할 건…….’
이제는 정말로 귀찮은 일이 자주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삑, 삐익.
물건을 계산하던 점원이 한정우의 얼굴을 힐긋힐긋 쳐다봤다.
현금을 받던 그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 혹시 언노운…….”
“사람 잘못 보셨어요.”
후드를 뒤집어쓴 한정우는 봉지를 집어 들곤 도망치듯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얼굴이 다 팔렸어.’
NET미디어의 계약 조건은 물론 카이의 얼굴 공개였다.
주인공 격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버리면 영상미가 뚝뚝 떨어지니까.
‘이러다가 연예인 병이라도 걸리는 거 아닌가 몰라.’
집 밖은 위험한 법.
서둘러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온 한정우는 집 앞에서 대기 중인 남녀들을 발견했다.
“……그쪽은?”
경호원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맨 윗집 여자다.
‘저 여자가 왜?’
오늘도 멋진 패션이다.
한 겨울의 추운 날씨에 걸맞는 호피 무늬의 털 코트와 그 속에 입은 니트, 그리고 이와 대조되는 하얀 슬렉스 바지.
결정적으로 오늘도 쓰고 있는 커다란 선글라스는 그녀의 패션을 완성시켰다.
“……설마 이렇게 가까이 살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또각또각.
곧장 한정우에게 다가온 여인은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동시에 한정우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어? 설마…….”
“반가워요. 카이…… 아니, 한정우 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천화 길드의 마스터.
설은영이 그녀답지 않게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
“누추하지만 일단 앉으세요.”
“정말 누추하네요.”
“…….”
한정우의 원룸 오피스텔을 둘러보던 설은영이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경호원들은 모두 집 밖에서 대기 중인 상황.
물론 한정우가 그들을 껄끄럽게 여긴다는 걸 눈치챈 설은영의 지시 때문이었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하지만 어제 방송을 보고 바로 내려오고 싶었던 걸 나름대로 참은 거예요.”
“아, 예…… 감사하네요.”
한정우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생각해 봤다.
‘우선 나와 천화 쪽은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야. 오히려 좋다면 모를까.’
자신은 그들이 세계 10대 길드의 일좌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그들 역시 자신이 이번 비르 평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게끔 지대한 공헌을 해주었고.
한 마디로 그들은 상부상조하는 사이.
‘혹시 스카웃 제안인가?’
만약 그렇다면 거절할 생각이다.
현재의 자신이라면 굳이 길드에 묶일 필요가 없으니까.
“우선 어제 방송 잘 봤어요. 하룻밤 만에 세계적인 스타가 되셨네요.”
“감사합니다. 솔직히 아직 실감이 나지는 않지만요.”
“이제 곧 실감나기 시작할 거예요.”
설은영이 또 한 번 미소를 지으면서 대꾸하자, 한정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얼굴이 다 팔렸잖아요. 최고로 핫한 캐릭터이기도 하고. 각종 방송과 CF 섭외가 물밀듯이 흘러들어올 거예요.”
“에이, 무슨…….”
“농담 같나요?”
어깨를 으쓱거린 설은영이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했다.
“어, 난데. 알아보라는 거 알아봤지? 말해 봐.”
잠시 무언가를 듣던 설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거기까지. 끊을게.”
전화를 끊은 설은영이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리나셨네요. 전자 제품 쪽에서는 주력으로 밀고 있는 게이밍 마우스와 키보드, 컴퓨터가 브랜드 별로 홍보 모델을 제안할 생각이고, 방송국들 쪽은 더 난리예요. 그쪽을 메인으로 내세운 게임 방송과 예능들이 지난 밤 사이에 몇 개나 계획되었어요. 심지어 그 중에는 섬에 박혀서 물고기를 잡아야 하는 프로그램까지 있고요.”
“……정말입니까?”
“난 이런 걸로 거짓말 안 해요.”
남다른 프라이드를 갖고 있는 설은영이 팔짱을 끼며 단호하게 말하자, 신뢰감은 엄청났다.
‘확실히 설은영이 이런 거짓말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없지.’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녀가 이러한 사실을 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천화 그룹과 전속 계약을 맺어주세요. 일종의 매니지먼트라고 생각하셔도 돼요.”
그녀의 뜬금없는 제안에 한정우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한데 전 귀찮아서 그런…….”
“이야기 다 들어보고 결정 해주세요.”
한정우의 말을 끊은 설은영이 말을 이었다.
“그 어떤 활동을 하실 필요도 없어요. 한정우 님에게 제안을 넣는 프로그램, CF, 제안은 앞으로 모두 천화 그룹 선에서 정리해 드릴게요.”
“……그 대가로 제가 얻는 건?”
“돈과 시간.”
“반대로 묻죠. 그 대가로 천화 길드가 얻는 건 뭡니까?”
“당신이 게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 정도?”
“허…….”
불공정 계약이나 다름없다.
물론, 자신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불공정 계약이지만.
“앞으로 귀찮아지실 거예요. 그 모든 귀찮음을 천화에서 도맡아 드릴게요.”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설마 제가 게임에서 천화를 도와줘야 하는 겁니까?”
한정우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녀의 목적이 자신을 구속하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 때문이었다.
물론 설은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붕붕 저었다.
“전혀. 그런 부담감 가지실 필요 없어요. 다만…….”
“다만?”
설은영이 그녀답지 않게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그쪽도 사람인데, 저희가 이렇게 잘해주면 천화 길드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한 번 정도는 도와줄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아하. 그런 속셈이셨구만.”
그녀의 귀여운 속셈을 알아챈 한정우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나쁘지는 않아.’
사실 그녀가 말한 것의 절반만 진실이라고 해도 귀찮다.
나중에 자리가 잡히면 모를까, 등 뒤에 추격자들이 득실거리는 지금 상황에서는 더더욱.
‘온전히 게임에 전념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마음에 들어.’
결정을 내린 한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올 때는 계약서 챙겨서 와주세요.”
“그럴 필요 없어요. 이미 챙겨왔으니깐.”
설은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그녀의 치밀한 준비성에 혀를 내두른 한정우는 계약 조건을 잘 살펴봤다.
‘확실히 그녀가 말한 대로야. 너무 단순해서 무서울 정도.’
특히 달마다 전속 계약금 500만원이 지급 된다는 부분에서는 이것이 신종 사기가 아닌지 덜컥 겁이 날 정도.
한정우가 시원하게 사인을 하자 설은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좋은 거래였어요.”
“네, 좋은 거래였죠.”
악수를 나눈 설은영은 시계를 슬쩍 쳐다보더니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가봐야겠네요.”
“약속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네. 길드원들이랑 새로 발견한 던전 돌기로 했는데. 이러다가 늦겠어요.”
“…….”
서둘러 짐을 챙기는 설은영을 마중까지 나가 보내자, 귀신같이 전화가 울렸다.
[민수]
용건은 안 봐도 뻔하다.
“여보세…….”
[야!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방송 봤냐?”
[봤으니까 전화하지! 내가 그동안 언노운 좋아하는 거 그렇게 티를 냈는데 어떻게 나한테까지 숨기냐?]
“야, 부모님이랑 누나도 모르거든?”
[아으, 그렇게까지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서 그거 따지려고 전화한 거냐?”
[크흐흠. 그건 부가적인 거고… 친구야. 내가 평소에 언노운 광팬이었던 거 알지?]
“굉장히 알기 싫지만…… 알지…….”
연락을 할 때마다 언노운 영상을 보고 있네, 벌써 몇 번을 봤네 떠들어대던 녀석이다.
심지어 비르 평야 전투는 절대로 놓쳐선 안 된다고 하루에 한 번씩 문자를 보내기까지 했다.
[나중에 팬클럽 사인회 한 번만…….]
“생각해보고.”
[지, 진짜다? 생각해 본다고 했다?]
“어. 진짜 겁나 진지하고 오랫동안 생각해볼게. 한 달 정도 생각해 보고 연락 줄게.”
[고맙다! 나중에 사냥 한 번 더하자! 휘몰이 길드원들이 너한테 사인 못 받았다고 칭얼거려서 죽겠다 야.]
“사인은 무슨…… 끊는다.”
[이 형님이 항상 응원하는 거 잊지 말고.]
“게임이나 해.”
통화를 종료한 한정우는 친구의 귀여운 행동에 웃음을 흘렸다.
“가족들은 게임 쪽으로는 소식이 어두우니 하루이틀 후에 연락이 오려나…….”
그 정도 시간이면 딱 좋다.
‘우선 침공 이벤트. 그 보상부터 확인을 해야지.’
과연 공적치 랭킹 7위에게는 어떤 보상이 내려질지.
벌써부터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