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164화 (164/441)

# 164

힐통령 164화

61장 전직, 태양의 사제!(5)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카이 님만 믿겠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무늬 하나 없는 정갈한 사제복을 입고 등장한 알버트.

그는 카이에게 정중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더니 자신의 자리인 상석으로 다가갔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행동이었지만, 주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버트 교황이 존댓말을 사용한다고? 저 사제가 누구기에?’

‘어제 같이 돌아온 걸 보니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 것 같던데…… 그래서 그런 건가.’

‘그나저나 오늘의 교황은 걸음걸이부터 자신이 넘치는군.’

‘설마 저 청년 사제를 믿고 콧대가 저리 높아진 건가?’

주교들 대다수가 눈빛으로 묻는 물음을 무시한 알버트가 자리에 앉았고, 카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 옆에 자리한 채 그를 보좌했다.

따듯하고 믿음직스럽다는 눈으로 카이를 한 번 쳐다본 알버트가 주교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들 앉으시게.”

안 그래도 조용하던 회의장이 침묵에 휩싸여 더욱 고요해졌다.

무의식적으로 서로의 숨소리마저 크게 들리지 않게끔 조심하는 주교들.

그것은 카이의 높은 위엄 스탯 때문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주교들은 당황했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지?’

‘……알버트 교황. 오늘은 무언가가 다르다.’

‘일단 몸을 사리는 게 낫겠어.’

정치판에서 구르고 구른 이들이 깨우칠 수 있는 동물적인 본능.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길게 설명할 것은 없을 것 같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다들 어제 일이 궁금한 것 같은데…….”

천천히 입을 연 알버트 교황은 거침이 없었다.

“버나드 추기경과 몰리온 추기경은 뮬딘 교와 손을 잡은 이교도였습니다. 마차의 목적지에는 뮬딘 교의 사제와 성기사들이 매복을 하고 있었고, 그들의 병력은 태양 기사단을 훨씬 웃돌았습니다…… 결국 기습을 당한 태양신의 어린 양들은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했지요. 모두 그들이 헬릭의 품으로 갔기를 기도합시다.”

평소 돌려 말하기를 즐겨 하던 모습과는 달리 매우 직설적인 언행!

게다가 뮬딘 교라는 이름이 나온 만큼, 평소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사제들도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됩니다! 이곳은 신성 왕국 라피스. 그런데 인근에 뮬딘 교의 군세가 있었다니요?”

“아니, 지금 그보다 먼저 대두되어야 할 건 두 추기경의 배신이 아니오?”

“허어…… 교단이 언제 이렇게 썩었는지…….”

“잠깐. 그럼 추기경들과 함께 움직이던 주교들도 의심해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힉스 대주교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힉스 주교는 평소에 두 추기경과 가깝게 지내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찔끔했지만,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쳤다.

“어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나도 그자들이 뮬딘 교의 끄나풀이었다는 건 이 자리에서야 알게 되었소!”

그는 이미 영향력을 잃어버린 두 추기경에게 예의를 갖춰줄 생각 자체가 없었다.

힉스가 얼굴에 철판을 깔고 강하게 나오자, 다른 주교들도 주춤했다.

‘옳지.’

눈을 반짝인 힉스는 그들이 주춤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태양신께서는 항상 저를 지켜보고 계시오! 나의 결백, 나의 순수. 나의 믿음! 헬릭께서 나의 무고를 증명해주실 거란 말이오! 뮬딘 교는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악 중의 악! 어찌 나에게…… 한평생을 태양교에 봉사해온 나에게 그런 말을 꺼낼 수가 있소!”

힉스의 얼굴 위로 떠오른 당당함과 억울함은 그를 몰아붙이던 주교들에게 생생하게 전해졌다.

“크, 크흠.”

“미안하게 됐소.”

“아니, 힉스 대주교가 그들과 결탁했다는 게 아니라…… 상황이 묘해서 그랬소. 표현이 과격했던 점은 사과하오.”

“……기분이 몹시 불쾌하오.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소.”

인상을 찌푸린 힉스는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것을 티 내면서 거칠게 자리에 앉았다.

얼굴은 잔뜩 찌푸려진 상태였지만, 그의 속마음은 달랐다.

‘후후후. 어리석은 녀석들. 어차피 헬릭은 나 하나를 위해 너희 따위에게 계시를 내릴 인물도 아니다. 신벌을 내릴 거라면 추기경들에게 진작 내렸겠지.’

헬릭의 존재 유무는 이미 신성력의 발현으로 증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 인간계의 일에 개입을 하지 않았다.

무려 태양교라는 종교가 세워진 천 년 동안.

‘그나저나 두 추기경도 끝난 마당이니…… 나도 적당히 이곳 생활을 청산하고 은퇴나 해야겠군. 더 이상 돈을 빼돌릴 수 없는 건 아쉽지만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낫겠지.’

힉스가 입맛을 다시며 미래를 설계하는 순간.

알버트 교황이 입을 열었다.

“자자, 다들 조용히 해보시게.”

회의장이 조용해지고, 수백의 주교가 자신만을 쳐다보는 상황에서.

알버트 교황은 천천히 카이를 쳐다봤다.

“여기부턴 그대가 하겠나?”

“예.”

뒷짐을 진 채 무표정한 얼굴로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디딘 카이.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무수한 시선을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양교의 미래를 걱정하시는 분들. 더 이상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깨끗한 교단, 청렴결백한 교단으로 확실하게 컨설팅해 드릴 테니.”

“……뭐라고?”

“아니, 그보다 자네는 누구인가?”

“이의 있소!”

탕!

버나드와 몰리온 추기경을 따르던 주교 하나가 탁상을 강하게 내려치면서 일어났다.

그는 마치 선동이라도 하듯, 주변의 다른 주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오늘 이 회의는 주교급 이상의 사제만 참석할 수 있는 회의 아니었습니까?”

“맞소.”

“사실 나도 아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물꼬가 트이자 하나둘씩 새어 나오는 불만.

하지만 알버트 교황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상황을 지켜봤다.

그건 카이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이만이 보여줄 수 있는 행동.

물론 그 믿음의 출처는 다름 아닌 카이의 존재 때문이었다.

“기르얀 주교.”

카이의 입술 사이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그리 크지도 않은 음성이었건만, 듣는 이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만드는 힘이 있는 소리였다.

기르얀 주교.

카이가 이 자리에 있음을 못마땅하게 여긴 그는 대번에 노했다.

“감히 주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그의 호통을 가볍게 무시한 카이는 담담하게 자신의 할 말을 이어나갔다.

“뇌물 수수 27회. 헌금 횡령 12회. 신도 추행 14회. 태양교의 전유물인 성수를 외부에 반출 4회…… 더 이상은 구역질이 나서 읽기도 싫어.”

“……!”

카이가 늘어놓은 죄목을 들은 기르얀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전신을 움찔거렸다.

‘저놈이 어떻게……?’

그것은 자신이 태양교에서 행한 비리 내역들.

눈을 데굴데굴 굴린 그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표정 중 가장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큰소리쳤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청렴결백의 대명사인 나에게 그런 죄목들을 늘어놓다니……?”

“청렴결백?”

카이가 코웃음을 치자 기르얀은 본인의 신성력을 가득 끌어올렸다.

썩어도 준치라고, 희미한 신성력 전신에 두른 그는 올곧은 사제처럼 보였다.

“지금 그대가 무슨 말을 지껄인 줄 알고 있는가? 아무리 새파랗게 어린 사제의 치기 어린 말이라고 해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군.”

팔은 안으로 굽는 법.

두 사람의 대립에 주변 사제들은 기르얀 주교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하긴. 주교씩이나 되는 인물인데 그런 짓을 저질렀을 리가…….”

“그래도 소문은 조금 안 좋은 편 아니었나?”

“에이. 그래도 얼굴도 본 적 없던 사제에 비하면…… 믿음이 더 가는 건 사실이잖나.”

기르얀 주교는 다른 주교들이 자신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자 어깨에 힘이 실렸다.

“나는 태양교의 주교이자 태양신 헬릭의 뜻을 널리 퍼뜨리는 자. 이번에는 그대에게 묻도록 하지. 그대는 대체 무슨 자격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것이냐. 혹시…… 뮬딘 교의 끄나풀이 아니던가?”

“뮬딘 교?”

“가만, 확실히 태양교의 내부가 무너지면 가장 이득을 볼 수 있는 곳은 뮬딘 교…….”

주교들의 눈빛이 의심으로 물들었을 때.

가볍게 코웃음을 친 카이는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얼마나 믿음이 부족했으면 신성력이 어둡다 못해 누런색이 되는지…… 보아라.”

이어서 그의 손에서 터져 나오는 광채(光彩),

일찍이 헬릭에게 만들어진 태양이 뿜어내는 찬란한 빛이 회의실을 가득 물들였다.

“크으윽…….”

“누, 눈이…….”

“우웁…… 우웨에엑!”

부정을 일삼던 자.

믿음이 부족하던 자.

뮬딘 교와 손을 잡고 태양교의 질서를 어지럽히던 자들은 그 빛을 쳐다보며 고통을 호소했다.

카이의 빛 앞에 기르얀 주교의 신성력은 흔적도 없이 소멸되어버렸다.

말 그대로 태양 앞의 반딧불이라도 된 것처럼, 조용하게.

“나는 헬릭에게 약속했다. 악(惡)에 고통받는 이들을 구하고, 악(惡)을 행하는 자들을 벌하고, 당신의 가르침을 이 땅에 널리 퍼뜨려 악(惡)을 근절할 것이라고.”

화아아아악!

카이가 뿜어내는 신성력이 한층 더 강해졌다.

그는 자신의 신성력에 신음하는 수십의 주교를 내려다보며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자격으로 그대들을 심판하냐고 묻는다면…….”

카이가 슬쩍 고개를 돌려 알버트를 쳐다보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선언했다.

“신성 왕국 라피스의 특별법 제 1조 1항. 태양신의 대리자인 사도, 태양의 사제는 교단 내에서 교황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된다.”

“태, 태양의 사제라고?”

“그럼 저 청년이…….”

“시미즈, 체란티아, 그리고 패트릭님의 뒤를 이어 수백 년 만에 나타난…….”

“태양신의 대리인. 사도다!”

뮬딘 교와 결탁한 주교들과는 달리, 항상 투명한 생활을 영위하던 주교들이 경악한 눈으로 카이를 쳐다봤다.

그들에게 있어서도 사도라는 존재는 문헌이나 기록에서만 볼 수 있던 전설이었으니까.

***

“정말 고맙습니다.”

카이가 몇 번이나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알버트 교황은 그가 헬릭을 만나고 온 순간부터, 존경이 담긴 경어를 사용했다.

“아니요. 사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빙그레 미소를 지은 카이는 현재 교황의 집무실에서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본단 내부의 주교 중 3할이 넘는 이들이 부정을 일삼거나 뮬딘 교와 손을 잡은 상태였지만, 완전한 사도로써 각성한 카이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홀짝.

머리를 맑게 해준다는 아가릿 티를 홀짝인 교황이 운을 띄웠다.

“이제 카이 님은 태양교에서 저와 동등한 위치에 서 계신 존재. 당연히 하시는 일을 도와드릴 인력을 따로 편성해 드려야 하는데…… 끄응. 이번에 태양 기사단의 전력이 누수되었고 부패한 주교들이 대량으로 검거되며 본단 개편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아무래도 시일이 걸릴 것 같습니다만…….”

그 말에 카이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 혹시 그 인력 편성…… 제가 원하는 사람들로 골라도 됩니까?”

“……그거야 뭐. 상관없습니다만. 혹시 본단에 알고 계신 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네. 무척 잘 알고, 절 잘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아주 친하거든요.”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이름들이 어떻게 되지요?”

“아. 제가 원하는 건 한 명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적당히 꾸려주세요.”

“한 명이라…… 말씀해 주시지요.”

알버트의 물음에 카이는 기분 좋은 듯, 입꼬리를 길게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이름은 미네르바. 모험가 미네르바입니다.”

성기사와 사제들이 대거 소속된 세계 10대 길드, 프레이 길드의 마스터이자.

영웅 등급 직업인 성녀 클래스를 획득한 세계적인 플레이어.

카이가 원하는 것은 그녀와 그녀가 지닌 세력이었다.

‘뭐, 그녀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겠지만…….’

어쩌겠는가.

현재 알버트 교황은 부패한 주교들과 신자들을 대거 몰아내며 위엄을 되찾은 상태.

그런 이의 명령을 거절하면 미네르바의 교단 내 입지가 위태로워질 터.

“아! 그녀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카이 님을 지원할 수 있도록 바로 조치해 놓지요.”

“교황 성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일사천리로 이어진 거래!

같은 시각, 미네르바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오한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음? 미네르바 님. 감기라도 걸리셨습니까? 그런 거라면 일찍 로그아웃하시죠.”

“아니요. 몸은 멀쩡해요. 다만…….”

길드의 부마스터가 건넨 질문에 미네르바는 팔등의 닭살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뭘까요…… 어딘가에 코가 꿰인 듯한 이 불길한 기분은…….”

그녀는 감이 좋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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