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힐통령 163화
61장 전직, 태양의 사제(4)
레벨 298.
미드 온라인 레벨 랭킹 1위.
세계 최초의 신화 등급 플레이어.
미드 온라인 커뮤니티의 영향력 랭킹 1위.
게이머즈 잡지에 선정된, ‘함께 사냥해 보고 싶은 플레이어’ 랭킹 1위.
대단하다는 말을 넘어, 존경심마저 들 것 같은 업적의 연속.
하지만 이 전무후무의 플레이어는 바짝 군기가 든 채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저…… 헬릭 님. 어떻게, 입맛에는 좀 맞으세요?”
“제법 맛있느니라.”
쪼로록.
검은색 기포가 톡톡 터지는 차가운 콜라를 마시고는 새침한 표정을 짓는 소녀.
10살 남짓의 이 소녀는 풍성한 금발이 바닥까지 흘러내린 상태였고, 머리맡에서는 이따금 광채가 번쩍였다.
그녀야말로 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태양교가 믿고 따르는 신 중의 신.
‘……맙소사.’
태양신 헬릭의 본 모습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그 알록달록한 것은 무엇이느냐?”
“이건 사탕이라고 합니다. 헬릭 님.”
“앗, 사탕! 가끔 인간계를 구경할 때 본 적이 있느니라. 어서어서 줘보거라.”
카이에게서 동글동글한 막대 사탕을 강탈한 헬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어떻게 먹는 것이냐?”
“그냥 입 안에 넣고 맛을 느끼시면 됩니다.”
“이허케 마이야?(이렇게 말이냐?)”
사탕을 입 안에 넣은 헬릭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맛있어! 맛있느니라!”
“예예, 많이 있습니다.”
카이는 피식 웃으며 인벤토리에 쌓인 사탕들을 탁자 위에 우수수 늘어놓았다.
화이트홀에서 아야나를 돌볼 때, 그녀를 달래주기 위해 사놓았던 사탕들이었다.
‘그곳을 떠날 때 모두 아야나에게 주기는 했지만…….’
그녀를 줄 때마다 자신도 하나씩 까먹은 것이 습관이 된 모양.
이후로 카이는 보급품을 채울 때마다 사탕을 한 무더기씩 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물론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카이의 허망한 눈동자가 눈앞의 소녀에게 향했다.
“대단하구나! 이런 맛은 처음이니라! 인간은 정말 대단해!”
태양신이라는 지고한 존재가 사탕과 콜라를 먹으며 칭찬하는 모습이라니…….
예상한 적도 없었고, 예상하고 싶지도 않았던 광경이었다.
“그것은 또 무엇이냐?”
헬릭은 눈을 반짝이며 카이가 들고 있던 알록달록한 과자를 탐냈다.
“아…… 이건 껌이라는 겁니다. 드셔보실래요?”
“흐, 흐응. 나의 충실한 종이 제물을 바치니 거부할 수가 없겠구나.”
누가 봐도 먹고 싶다는 표정을 드러낸 헬릭은 껌을 받아가더니 짭짭 씹기 시작했다.
“오오, 과일 맛이 나느니라!”
한참이나 껌을 맛있게 씹던 헬릭은 돌연 인상을 찌푸리더니 껌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너무 질기구나. 몇십 번이고 깨물어도 도저히 잘리지가 않아.”
“아…… 헬릭 님. 껌은 삼키는 것이 아닙니다. 씹다가 뱉으셔야 하는데…….”
카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자, 헬릭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삼키면 안 되는 음식인가?”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울상을 짓는 헬릭의 표정.
‘귀, 귀여워!’
마치 아기 고양이나 강아지를 볼 때와 같은, 심장이 간질거리는 기분!
장난기가 발동한 카이는 나라 잃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예…… 절대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인데…….”
“머, 먹으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바로 토해내야 합니다. 소화가 되지 않거든요.”
물론 거짓이다.
하지만 헬릭은 자신의 풍성한 금발을 쭈뼛 세우더니, 또다시 울먹거렸다.
“나, 나 신인데…… 신도 위험한 것이냐……?”
“크, 크으윽…….”
두 손을 꼬물거리며 중얼거리는 헬릭의 모습은 심장에 해로울 정도로 귀여웠다.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억누른 카이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껌을 삼키는 건 신조차도 위험한 행위입니다만…… 제가 고쳐드릴 수 있습니다.”
쓰담쓰담.
“……?”
헬릭은 자신의 정수리를 쓰다듬는 카이의 손을 보더니, 머리를 갸웃거리며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냐?”
“이렇게 머리 부분을 문질러 주면 괜찮아질 겁니다. 하지만 계속 껌을 삼키시면 몸에 정말 위험하니 절대로 다시 삼키시면 안 됩니다.”
“응응, 절대 안 삼키겠느니라.”
[헬릭의 호감도가 상승하였습니다.]
“…….”
거짓말을 한 것 같아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는가.
특히 헬릭의 머리는 강아지의 배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쓰다듬기가 무척이나 좋았다.
하루 종일 쓰다듬고 싶은 감촉이랄까.
“아무튼 카이여. 사실 태양신이 어린 소녀라는 말은 어디 가서 절대로 하면 안 되느니라.”
“물론입니다. 당신의 충실한 종이자 사도로서 그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음. 믿겠느니라. 내가 어린 소녀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아무도 나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카이는 만약 헬릭의 모습이 공개된다면 그녀의 팬클럽이 생길 것이라고 확신했다.
물론 그러한 생각을 알 리 없는 헬릭은 팔짱을 끼며 흡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 스스로도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있고, 신에게 사죄의 제물도 바쳤으니 오늘은 특별히 용서해 주겠느니라.”
언제부터 사탕과 과자, 콜라와 껌이 사죄의 제물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선과 자비를 관장하는 신 다우신 면모입니다. 헬릭 님의 자비에 탄복하였습니다.”
“헤헤.”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린 헬릭이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럼 이만 내려가 보거라! 알버트가 아까부터 널 기다리고 있는 것 같구나.”
“알버트 교황 성하께서요?”
“응. 그리고 어젯밤 녀석의 꿈을 통해 계시도 내려놨으니,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계시를 무슨 문자 메시지 놓은 것처럼 말하는 게 제법 우습지만 나쁜 소리는 아니었다.
‘교황 성하에게 이것저것 받을 게 많겠구나.’
일을 끝낸 카이는 헬릭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건강하시길.”
“응, 잘 가거라…… 앗!”
말을 하다말고 화들짝 놀란 헬릭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양한 과자와 콜라, 사탕 등이 놓여진 탁자 위.
헬릭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새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가, 가끔씩 심심하면 찾아와도 되느니라.”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본단에 자주 들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헬릭이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튕기자, 귓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띠링!
[스킬-신출귀몰을 터득하셨습니다.]
[귀환할 수 있는 포인트에 천상의 정원이 등록되었습니다.]
“오오오……?”
뜬금없이 새로운 스킬을 획득한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킬 정보를 확인했다.
[신출귀몰]
등급 : 유니크
신성력 1,000을 소모하여 한 번 방문한 장소로 이동할 수 있다.
(재사용 대기시간 : 5분)
자연스럽게 쩍 벌어지는 입, 커져가는 동공!
‘귀, 귀환 스킬!’
카이가 놀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미드 온라인에서는 마법사가 아닌 이상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비싼 돈을 주고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거나, 귀환 주문서를 사야 한다.
그 귀찮고 번거로우며 지갑 사정이 우려되는 일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바로 귀환 스킬을 배우는 것.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귀환 스킬북만 해도…… 최소 레어 등급 스킬이잖아.’
최소 수백만 원짜리 스킬이다.
그런 주제에 재사용 대기시간은 몇 시간이나 되고, 터무니없이 많은 마나와 신성력이 요구된다.
심지어 몇몇 도시나 마을은 귀환 장소로 등록할 수도 없고, 등록할 수 있는 장소는 고작 10개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신출귀몰에는 그런 제약이 없어 보이지?’
잭팟 중의 잭팟.
카이는 눈앞으로 777이라는 숫자가 아른거리는 것 같은 기분마저 느꼈다.
무엇보다 카이는 이런 득템을 기대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본래 선물이란 갑자기, 예상조차 못했을 때 받아야 감동과 고마움이 배가 되는 것!
“정말 감사합니다. 헬릭 님. 정말 감사해요!”
덥석!
헬릭의 앙증맞은 손을 부여잡은 카이가 몇 번이나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으으으…… 가, 갑자기 손을 잡으면…….”
얼굴이 확 붉어지는 헬릭.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카이는 곧장 그녀의 손을 놓으며 뒤로 물러섰다.
“이런, 죄송합니다. 순간적으로 너무 기뻐서…….”
“으, 으흠! 괘념치 말거라.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건 오랜만이라 서투른 것뿐이니까.”
고개를 휙 돌린 헬릭은 용무가 끝났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이제 정말 가보거라. 늦겠구나.”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다음에 올 때는…… 초코 케이크를 사오겠습니다.”
“……맛있는 것이냐?”
“오늘 드린 것보다 100배는 더 맛있을 겁니다.”
“내일 오너라.”
“내일은 조금 무리지만, 근시일 내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이만.”
소녀의 모습을 한 채 어른의 말투를 구사하는 독특한 신.
헬릭에게 작별을 고한 카이의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본래 있던 장소로 귀환하시겠습니까?]
“그래.”
***
“주교급 이상의 사제들만 모이라니. 이런 적은 처음 아니오?”
“맞소.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무언가 믿는게 있으니까 이렇게 강하게 나오는 것 아니겠소?”
“확실히 그건 그렇군. 게다가 버나드 추기경께서는 신성 감옥에 갇히시고, 몰리온 추기경께서는 행방이 묘연하오. 그 분들만 믿고 있던 우리는 어찌 되는 것인지…….”
“자자, 확실한 건 곧 교황 성하께서 직접 말해주시지 않겠소.”
마치 회의장이 자신들의 안방이라도 된 것처럼 편안하게 행동하는 사제들.
그들은 버나드와 몰리온과 뜻을 함께하는 태양교의 주교들이었다.
“으음…….”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들과는 달리, 대주교 힉스의 눈알은 데굴데굴 굴러갔다.
‘분명히 어제는 거사가 치러졌어야 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버나드 추기경은 물론, 모라크 주교까지 신성 감옥에 갇히다니…… 대체 어떻게?’
힉스는 두 명의 추기경을 포함하여 모라크에게 직접 포섭당한 몇 안 되는 대주교였다.
평소 신앙심보다는 재물과 명성에 더 큰 욕망을 가지고 있던 그는 뮬딘 교에서 은밀히 건넨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어차피 태양교는 지는 해였다. 어제의 일만 잘 끝났으면…….’
타락한 교황이 신도들을 학살하고 나아가 대륙의 주민들을 공포에 빠트렸을 터.
하지만 어제 확인한 알버트 교황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쯧,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군. 적당히 꼬리를 잘라야겠어.’
신성 감옥에 수감된 두 사람을 어떻게든 처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힉스는, 고민이 끝나자 오히려 속이 후련해졌다.
‘어차피 당장은 교황도 날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교황 직에 오른 뒤 교단이 몰락해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내가 뮬딘 교와 손을 잡은 걸 알고 있지는 않았겠지.’
그는 어제 외출에서 돌아온 후, 아직까지 신성 감옥에 방문하지 않았다.
당연히 뮬딘 교와 손을 잡은 주교들의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을 터.
힉스가 마음을 편하게 먹고 있을 때,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음?”
알버트 교황이 입장할거라는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문지방을 넘어선 건 앳된 사제였다.
‘저자는 분명…….’
‘어제 교황과 함께 본단으로 돌아왔던 청년 사제다.’
‘오늘 회의는 분명 주교 이상 급의 사제만 참석 가능한 자리일 텐데?’
주교들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때.
“어디 보자…… 오, 진짜 보인다. 보여.”
마치 어떤 사과가 싱싱한지 고르기라도 하듯.
회의실로 들어온 카이는 그곳에 빼곡히 모여 있는 주교들을 꼼꼼히 살펴봤다.
“어떤가? 정말로 구별할 수 있겠나?”
뒤이어 청년 사제의 뒤에서 들려오는 중후한 알버트의 목소리.
이에 카이는 싱긋 웃으며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구별이 잘 되네요. 아주 소름이 끼칠 정도로.”
카이의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마주보던 몇몇 사제들은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