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156화 (156/441)

# 156

힐통령 156화

60장 태양이 떠오르는 곳(2)

기독교의 성지라 불리는 예루살렘이나 바티칸을 방문한 이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그곳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이라고.

카이는 태양교 본단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그 이유를 깨달았다.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몸짓 하나하나에 경건함이 담겨 있는 사람들.’

그런 이들이 다수 모여 있는 곳이기에 빠름을 추구하는 타 도시와는 느낌부터가 다르다.

모든 이들이 헬릭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듯한 모습.

“이곳이 신성 왕국, 라피스.”

초대 교황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사제와 성기사들의 왕국.

비록 영토 자체는 타국의 대도시와 비교될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그 어떤 세력과 나라도 라피스 왕국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현재 태양교가 대륙에 끼치는 영향력은 말 그대로 사상 최고.’

그 어떤 세력이라 할지라도 라피스 왕국 내부에서의 무력 행위를 범할 수는 없었다.

그 말은 곧 두 개의 제국과 세 개의 왕국을 적으로 돌린다는 뜻이었으니까.

“역시 분쟁을 막는 최고의 방법은 힘을 갖추는 건가.”

그저 그런 수준의 힘은 안 된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힘.

그것은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이 분노를 잘 조절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마치 골리앗을 요리하던 바체처럼.’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카이는 걸음을 옮겨 언덕을 내려갔다.

제법 쌀쌀한 온도가 감도는 라피스 왕국의 성채는 순백색.

거기에 순금으로 각인된 태양교의 문양이 일정 간격으로 그려져 있어 신성함을 더해줬다.

“……후우. 저 개미 떼 같은 게 전부 줄이란 말이지.”

태양교이 본단은 순례를 도는 이들의 최종 목적지이자, 주민들도 기도를 올리러 오는 곳.

심지어 유저조차 이곳에서 헬릭에게 기도를 올려야 사제, 성기사로의 전직이 완료되었다.

당연히 성채 입장을 위한 줄은 여태껏 본 적 없을 정도로 길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더 길어진 것 같은데? 이제는 본단에 들어가려면 못해도 열 시간은 기다려야겠어.’

옅은 한숨을 내쉬며 줄에 참가한 카이는 사도의 진정한 힘에 대해 생각했다.

‘교황을 만나면 태양의 사제가 지닌 힘을 온전하게 사용할 수 있겠지.’

더군다나 반쪽짜리였던 직업이 완벽해지는 만큼, 새로운 칭호도 얻게 될 것이다.

‘최초의 신화 등급 플레이어 칭호를 주겠지.’

모르긴 몰라도, 부익부 빈익빈이 두드러지는 이 게임이니 그 효과만큼은 발군일 터.

‘그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스킬도 잔뜩 생겨날 거야.’

어찌됐든 지금보다 전투력이 확연히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카이는 그 사실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도 랭킹 1위인데 뭐…… 없어서 나쁠 건 없다. 이 정도 수준이지.’

현재 카이는 반쪽짜리 성능의 직업으로도 랭킹 1위를 찍은 상태.

결과만 보면 쉽게 보이지만 과정까지 쳐다보면 절대 쉽지 않은 길이었다.

‘아무튼 본단 방문이 끝나면 흑탑으로 찾아가서 코로나님에게 장비를 건네받고…… 아! 그 뒤에는 강민구 지부장이 말한 침공 이벤트가 열리는구나.’

카이는 턱을 쓰다듬었다.

‘본래라면 침공 이벤트에서 검은 벌의 이미지를 바닥까지 끌어내리려고 했는데…….’

이미 그들의 이미지는 시궁창에 처박힌 상태.

그뿐만이 아니었다. 검은 벌이 10대 길드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순간, 길드원들은 빠르게 길드를 탈퇴했다.

그들이 침몰하는 배의 최후를 함께해 줄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이제 제법 상황이 바뀌었지.’

자신의 이름값이 강남의 땅값마냥 치솟고, 견제하는 세력도 늘어났다.

게다가…….

“후우.”

카이는 큼직한 두 손으로 지친 표정의 얼굴을 세수하듯 쓸어 넘겼다.

‘도전자들 때문에 미치겠네.’

몸을 부르르 떤 카이는 쓰고 있는 후드를 더욱 깊숙하게 눌러썼다.

현재는 랭킹 2위로 밀려난 유하린.

근래에 그녀에게 도전장을 내놓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야 유하린은 랭킹 1위를 몇 달이나 수호한 챔피언이었으니까.

그녀를 잡고 명성을 올리려는 이들은 진작 도전하고, 패배했으며,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유하린에게 도전하는 이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도 않았어. 첫 등장부터 압도적인 포스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랭킹표를 손쉽게 역주행해 버렸지.’

하지만 카이는 아니었다.

첫 동영상의 언노운은 모든 방면에서 서툴러 보였으니까.

‘그야 유하린과 비교하면 내가 만만히 보이는 게 무리는 아니지만…….’

커뮤니티에 등록된 랭커들의 도전장만 수백여 개!

물론 그들 중에서 순수하게 명성을 좇는 이들은 몇 없을 것이다.

‘대부분은 다른 10대 길드 놈들에게 사주를 받은 거겠지.’

만약 그들 중 누군가가 성공하면, 10대 길드 입장에서는 엄청난 이득이다.

겨우 돈 몇 푼으로 랭킹 1위의 플레이어를 사흘 동안 접속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뮬딘 교의 암살자들에 이어 랭커들의 도전이라…….’

카이라는 얼굴을 드러낸 것이 후회가 될 정도.

‘이래서 부모님이 함부로 얼굴 팔고 다니지 말라고 하셨구나.’

들어서 손해 볼 것이 없는 부모님의 말씀!

그 와중에도 줄은 점점 줄어들었다.

‘이 정도 속도라면 7시간 후면 들어갈 수 있을지도.’

카이가 긍정적인 생각으로 앞줄을 쳐다보던 그때.

다그닥, 다그닥.

“비켜라, 비켜!”

한 대의 마차가 줄을 스쳐지나 성채의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카이는 그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어딜 가나 저런 놈들은 있구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긴 태양교의 본단.’

몇 달 전.

아니, 이제 게임 시간으로는 2년이 넘어가는 시간이지만 그때도 저런 이들이 있었다.

바로 본인의 부와 명예를 앞세워 줄을 서지 않으려는 자들이다.

‘하지만 모두 입구 컷을 당했지.’

태양교의 성지인 라피스 성채를 넘으려면 기다란 줄을 기다리며 헬릭에게 그 경건한 마음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것이 이 지루하고 긴 줄이 ‘증명의 길’이라는 되도 않는 호칭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저 마차를 탄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본단 방문이 처음인 모양이야. 제법 창피하겠어.’

피식 웃음을 지은 카이가 신경을 끄려던 찰나. 그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했다.

바로 마차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라피스의 성채를 넘어간 것!

“무, 무슨?”

깜짝 놀란 카이는 함께 줄을 서고 있던 사제에게 질문했다.

“저기. 형제님. 저들은 대체 누구길래 라피스의 성채를 저리 쉽게 넘을 수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 증명의 길을 건너지 않은 이들은 절대 입구를 들어갈 수 없는데…….”

그 질문을 받은 사제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형제님은 본단을 방문하는 게 얼마만이십니까?”

“거의 이 년 만입니다.”

“역시…… 그렇다면 모를 만하겠네요. 그 시간 동안…… 음. 변화가 좀 있었습니다.”

“변화라면?”

그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현재 태양교를 이끌고 계신 알버트 교황 성하가 실권을 잃었다는 소문이 일 년 전부터 신도들 사이에서 은밀히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설마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절대…….”

“하지만 쨔잔. 절대라는 것은 없더군요.”

사제는 한 손으로 라피스의 성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지난 일 년간 태양교의 성세는 말도 안 되게 강해졌지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야…….”

카이는 당연히 유저, 그러니까 플레이어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유저들이 퀘스트를 통해 태양교의 임무를 수행하고, 뮬딘 교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말인가?’

찌푸린 카이의 얼굴은 사제의 말이 이어질수록 더욱 일그러졌다.

“예전에도 부패한 신관들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면전에서 대놓고 활약하는 일은 없었지요.”

“하지만 지금 꼴을 보면 면전에서 대놓고 활약하는 것 같습니다만.”

“예. 교황 성하의 권력이 줄어든 자리를 두 명의 추기경과 대주교들이 차지했으니까요.”

“하지만 추기경은 새롭게 선출된 교황이 선출하는 이들 아닙니까? 모두 교황 성하의 수족들일 텐데…….”

“맞습니다. 과거에는 그랬지요.”

“과거에는?”

카이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묻자, 사제가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시 그들은 일개 주교였고, 기적적인 표 뒤집기로 교황의 자리에 오른 알버트 성하에 의해 추기경이 되었지요. 그것이 벌써 12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12년.

강과 산의 모습이 바뀌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사람의 마음 정도는 바뀌려면 수백 번도 더 바뀔 수 있는 시간.

“처음에는 그들도 추기경의 자리에 걸맞은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권력이 주는 달콤함을 거부하지는 못했나 봅니다.”

“……그들의 뒤를 봐주고 있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추기경과 대주교들만으로는 수백만 신자들의 지지를 받는 알버트 교황을 뒷방으로 밀어낼 수 없었을 겁니다.”

“제가 그걸 알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허탈한 미소를 지은 사제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헬릭께서는 자신의 어린 양들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시련만을 내려주신다고.”

“으음…….”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던 카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제가 멀쩡히 살아있는걸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하아, 부럽습니다. 솔직히 요즘 저는 너무 지쳐요. 저뿐만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으로 헬릭을 대하는 일반적인 신도들은 날이 갈수록 지쳐 가는 중입니다. 정말로 저희가 이 시련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면…… 헬릭께서는 저희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신도들끼리 모여서 투서를 날려보는 건 어떻습니까?”

카이의 질문에 사제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하하, 투서요? 의도는 좋지요. 하지만 투서를 쓴다한들 대체 누구에게 날린단 말입니까? 두 개의 제국과 두 개의 왕국이 신성 왕국 라피스의 우방국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상대할 힘이라도 있지 않는 이상, 이 체제를 뜯어고칠 수는 없습니다.”

“…….”

말을 마친 사제는 상처 입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카이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했다.

‘헬릭은 왜 이 모습을 그냥 방치해 두는거지?’

그는 신이다.

자신을 믿는 사제와 성기사들에게 아낌없이 신성력이라는 힘을 내려줄 수 있는 신.

당연히 그 힘 또한 말도 안 되게 강력할 터였다.

‘헬릭의 여린 감수성을 생각하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좋아할 리는 없어.’

오히려 누구보다도 슬퍼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이 꼴을 지켜보기만 하는 걸까.

카이가 어지러운 생각을 이어갈 때, 마침내 기나긴 줄이 끝났다.

“일반 사제를 증명하는 패이군요. 카이님. 본단의 방문은 2년 만이구요. 들어가십시오.”

카이는 입구를 지키는 성기사에게 전직 시 건네받은 패를 돌려받았다.

처음 전직을 하면 받게 되는, 라피스에 존재하는 패 중에서 가장 낮은 등급의 패.

아마 교황을 방문하면 더 높은 등급의 패로 바꿔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는 곧장 교황을 찾아가지 않았다.

‘신성 왕국 라피스. 2년 전에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던 장소.’

자신처럼 보상이 좋아서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선행을 일삼는 자들이 모여 있던 곳이었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겠어.”

부디 자신이 실망하는 일이 없기를.

부디 자신이 동경하던 이 도시가 부패하지 않았기를.

함께 줄을 섰던 사제가 무언가 잘못 알고 있던 것이기를.

차갑게 내려앉은 카이의 눈동자가 그리 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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