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117화 (117/441)

# 117

힐통령 117화

47장. 권선징악(3)

카이는 멍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그의 머리는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저 남자가 무슨 말을 한 거지?’

국왕 폐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왕실을 방문한 준비를 하라.

분명 그렇게 말을 했다.

‘국왕…… 국왕…… 라시온의…… 국왕?’

국왕이라는 단어를 입 안에서 몇 번이나 굴린 뒤에야 천천히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

동시에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나더러 국왕을 만나러 가자고?’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

미드 온라인의 대륙에는 세 개의 왕국과 두 개의 제국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세력들의 주인을 만난 유저는 여태까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한 마디로 이번에 카이가 라시온 국왕을 만난다면, 7억 명 중에 최초라는 뜻!

‘당연히 기뻐. 기쁜데…….’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 하필 나지?’

뮬딘 교가 만들어낸 희대의 악몽, 푸른 역병의 아오사.

놈을 쓰러트린 건 분명 칭송받아야 마땅할 위업이다.

하지만 그게 국왕에게 직접 치하를 받을 정도의 일이냐고 묻는다면, 머뭇거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베이거스를 처치한 천화 길드조차 국왕의 부름을 받은 적은 없어.’

그런데 왜 자신일까?

카이가 골몰히 고민에 잠겨 있자 금발의 미청년이 그를 재촉했다.

“서둘러줬으면 좋겠군. 폐하께서는 기다림을 싫어하시는 성격인지라.”

“아, 죄송합니다. 그럼 잠시만…….”

진료소 내부로 들어간 카이는 곧장 블리자드를 소환했다.

“블리자드, 아야나 좀 지키고 있어. 아야나, 나는 잠깐 어디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저는 걱정 마세요. 블리랑 놀고 있으면 되니까요.”

“그럼 부탁한다.”

두 사람을 한 번씩 쳐다본 카이는 곧장 진료소를 나와 금발 청년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왕실까지는 어떻게 가실 생각입니까? 보시다시피…….”

고개를 돌린 카이는 폐허가 되어버린 시가지를 쳐다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저 작품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이런 말을 하니 머쓱할 수밖에.

하지만 남자는 태연한 표정으로 품 속에서 마법 스크롤을 꺼내들었다.

“텔레포트 게이트가 망가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올 때도 스크롤을 사용했으니 걱정 말도록.”

“텔레포트 스크롤이군요.”

“그렇다면 이제 뭘 해야 하는지도 알겠군.”

“예, 실례하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카이는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부우욱!

스크롤이 찢어지는 소리가 고막을 때리고, 동시에 시야가 뒤바뀐다.

지역이 한 번에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딩 창 따위는 뜨지 않는 미드 온라인!

카이는 바뀐 풍경을 천천히 둘러봤다.

‘라시온의 수도, 레이아크다.’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이미 영상을 통해 몇 번이고 봤던 장소였다.

잘 포장된 도로와 그 양 옆으로 빽빽하게 들어서있는 깔끔하고 정갈한 건물들.

거리를 돌아다니는 NPC들은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근심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쳐다보던 카이는 사제복의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왕궁을 방문하는 사실이 다른 유저의 눈에 들어가면 곤란하지.’

아예 사제복을 푹 뒤집어쓰고 있으면 태양교의 NPC인 줄 알 것이다.

“늦겠군. 서두르지.”

금발 청년은 빠른 보폭으로 왕궁으로 향했다.

그 때문에 카이는 왕궁의 모습을 가까이서 살펴볼 틈도 없이 안으로 들어가야했다.

‘심장이 왜 이렇게 떨리지.’

카이는 세차게 뛰는 자신의 심장을 억누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아오사를 눈앞에 두고도 긴장하지 않던 자신이건만, NPC를, 그것도 남자를 만나는데 이토록 긴장하다니!

“들어간다. 이제 모자를 벗도록.”

짧은 말을 남긴 청년은 화려한 용이 새겨져있는 황금의 문 앞에 섰다.

왕궁에서는 경박한 노크 따위가 울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이 어디까지 왔는지도 모두 보고되고 있었는지, 문은 자동문처럼 열렸다.

‘넓다.’

알현실은 일개 방으로 치부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크기를 지닌 공간이었다.

문에서 벽까지의 거리는 대략 30미터.

그 끝에는 몇 칸의 계단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위로 화려한 왕좌가 놓여있다.

“왔군.”

왕좌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 이끌린 카이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저 자가 라시온 왕국의 국왕…….’

그는 왕이라는 인물에 걸맞게 짙은 눈썹, 단단해 보이는 턱, 굳게 닫힌 입술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매를 닮은 눈매는 상대가 방심을 하는 순간 물어뜯을 것처럼 날카로웠다.

띠링!

[유일무이한 업적! 플레이어 중 최초로 일국의 수장을 만나셨습니다.]

[스페셜 칭호, ‘왕의 방문자’를 획득하셨습니다.]

자신이 최초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이미 예상한 결과였다.

카이는 즉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모험가 카이가 라시온의 유일한 하늘이신 베오르크 폰 라시온 전하께 인사를 올립니다.”

“형식적인 절차는 모두 건너뛰도록 하지. 내가 왜 자네를 불렀는지 아는가?”

베오르크는 생긴 것만큼이나 직설적인 성격이었다.

“아무래도 전날 밤 푸른 역병을 처치한 것 때문이 아닐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확하다. 듣기로는 자네가 아오사를 혼자서 처치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하늘이 도와주신 덕분에 혼자서 아오사를 처치할 수 있었습니다.”

“호오…….”

베오르크는 살짝 감탄을 한 듯한 얼굴을 끄덕이며 카이를 치하했다.

“잘 해주었다. 푸른 역병이 퍼트린 전염병은 나의 백성들을 고통받게 만들었지.”

“부족하지만 태양교의 사제인 몸, 백성들의 아픔을 지나칠 수는 없었습니다.”

미드 온라인에서 NPC를 상대하는 방법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바로 자신이 NPC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부분을 열심히 어필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베오르크는 그리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말은 잘하는군. 하지만 모험가들이 명예와 신의를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동시에 떠오르는 메시지 창.

[베오르크의 호감도가 감소합니다.]

“……?!”

카이가 깜짝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

여태껏 NPC를 위해 이렇게 열심히 움직였습니다! 라는 말을 했을 때, 이렇게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이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타르달도 약간 비슷한 태도였지만…… 결코 이 정도는 아니었어.’

그러고보니 타르달은 라시온 국왕의 스승이라고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청출어람이지 않은가!

‘깐깐함이 타르달을 뛰어넘을 줄이야!’

카이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자, 베오르크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

“본인은 이득에 따라 자신의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모험가들을 굉장히 싫어한다. 하지만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되어야 하는 법. 그대가 본인의 백성들을 구해주었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겠다. 그러니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을 해보아라. 그대의 공을 생각하여 특별히 이루어줄 테니.”

소원을 말해보라는 것도 아니고, 이루어준다고 하였다.

일국의 수장이 아니었다면 내뱉을 수조차 없는 광오한 발언!

“생각할 시간은 5분을 주겠다. 그 정도면 충분할 터, 여유롭게 생각하라.”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그 5분의 시간을 다른 용도로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카이의 뜬금없는 이야기는 베오르크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불쾌하다는 심정을 가감 없이 목소리에 담았다.

“무슨 뜻이지?”

“제가 원하는 것은 이미 정해져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바로 말씀드리면, 폐하께서는 제 생각과 마음을 의심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폐하가 주신 5분으로, 폐하를 설득할 생각입니다.”

“허, 나를 설득한다?”

베오르크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실상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을 터트린 정도였지만, 카이는 그 사실조차 만족스러웠다.

‘무거운 분위기보다는 훨씬 나아.’

본래 무겁고 딱딱한 분위기에서는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다.

카이는 우선 베오르크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성을 느꼈다.

“좋다. 이미 그대에게 허락한 5분이다. 그 시간 동안 나를 설득하든, 보상에 대해 고민하든, 마음대로 하도록.”

“감사드립니다. 그럼…… 폐하의 시간을 잠시만 빌리겠습니다.”

인벤토리에서 마법 수정을 하나 꺼내든 카이는 지체없이 그것을 재생했다.

베오르크는 처음엔 관심도 없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마법 수정에서 녹음된 음성이 흘러나오자 점점 표정이 굳어지고, 허리가 꼿꼿해졌다.

‘그들은 세금도 적게 내는 빈민가의 주민들 아닌가. 죄다 더러운 몰골을 하고 다니니 병도 생기고 그러는거니 씻고 다니라고 하게. 가만, 그런데 이것들이 제법 오랫동안 아픈 것 같은데 혹시 전염병은 아니겠지? 맞다면 이것들을 싹 다 도시에서 내쫓아야 할 텐데…….’

‘……곧 겨울이 다가옵니다. 지금 쫓겨나면 저들은 대체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그걸 왜 나에게 묻나? 세상에 태어났으면 몸 뉘일 자리 정도는 스스로 찾아야 하는 법일세.’

‘자네의 계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네. 그것은 바로 내가 돈을 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지!’

마법 수정구에서 흘러나온 것은 돼지 영주와 저녁 식사에서 나눈 대화였다.

녹음된 음성은 5분을 훌쩍 넘겼지만, 베오르크는 녹음이 끝날 때까지 눈을 감고 경청했다.

뚝.

“여기까지입니다.”

녹음된 음성이 모두 끝나자, 카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베오르크를 올려봤다.

‘내 예상이 맞다면, 베오르크는 자신의 백성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인물이다.’

모험가들을 수도 없이 도륙한 베이거스가 잡혔을 때도 천화 길드를 부르지 않았던 그가,

푸른 역병에 중독된 백성들을 구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을 호출해 보상을 내리려 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베오르크의 성품이 올곧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긴, 그 깐깐하고 고지식한 타르달이 스승이었으니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

그런 이에게 영지민을 길거리의 개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영주의 녹음을 들려준다면?

‘내 예상이 맞다면…….’

그는 돼지 영주를 벌하는데 힘을 실어줄 것이다.

카이는 마치 대학 발표 결과를 기다리는 학생처럼 타들어가는 갈증을 꾸욱 참아냈다.

잠시 후, 베오르크의 감겨져있던 눈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그 눈을 본 순간, 카이는 확신했다.

‘됐다!’

그의 눈에 담겨 있는 것은 지독한 분노와 불쾌였다.

그는 무서운 눈으로 카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라시온의 국왕, 베오르크 폰 라시온의 이름으로 묻겠다. 그 마법 수정구에 담겨 있는 내용은 한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인가?”

“태양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모두 사실입니다. 원하신다면 가져가셔서 검증을 해보셔도 좋습니다.”

“…….”

베오르크의 두 눈이 카이를 직시했다.

그 눈빛을 받은 카이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이 기분…… 이미 한 번 느껴본 적이 있다!’

태양의 사제로 전직을 할 때와 마찬가지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듯한 기분.

[베오르크가 절대자의 시선을 사용합니다.]

[베오르크가 당신의 말에 대한 진위 여부를 파악합니다.]

[베오르크는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군. 모두 사실이군.”

베오르크의 목소리는 분노와 흥분에 먹혀 요동치거나,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1+1이 2라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처럼, 아주 담담하고, 고요했다.

고요한 분노.

베오르크는 카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그대의 소원은 무엇인가.”

“화이트홀의 영주와 그의 동생의 부패는 도시를 좀먹고 있습니다. 부디 그들에게 정의의 철퇴를 내려 고통받는 영지민들을 구해주시옵소서.”

“…….”

가만히 카이를 내려다보던 베오르크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입구에서 대기하던 금발의 미청년이 순식간에 다가와 그 앞에 부복했다.

“준비를.”

“명을 받들겠습니다.”

금발의 청년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다시 일어나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대체 뭐야, 방금 그 대화는?’

두 사람이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알 수 없던 카이는 눈만 깜빡였다.

그런 카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베오르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지?”

“……예?”

“나는 분명 자네의 소원을 말하라고 하였을 텐데? 왜 굳이 이런 선택을 한 거지?”

“이야기가 제법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만.”

“상관 없다.”

베오르크의 허락이 떨어지자, 카이는 자신이 화이트홀을 처음 방문하던 순간부터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통받는 화이트홀의 주민들, 부모님이 보고싶어 이불 속에서 울다 잠드는 소녀의 이야기였다.

“……별다른 이유는 없지만, 굳이 이유를 꼽으라면 아야나에게 부모님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

모든 이야기를 듣게 된 베오르크가 다시 한 번 카이를 직시했다.

[베오르크가 절대자의 시선을 사용합니다.]

[베오르크가 당신의 말에 대한 진위 여부를 파악합니다.]

[베오르크는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오르크가 다시 한 번 의심합니다. 절대자의 시선이 재사용됩니다.]

[베오르크는 다시 한 번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베오르크는 혼란에 빠졌다.

그가 알기로 모험가들은 모두 제 잇속을 챙기느라 바쁜 이들 뿐이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동료들을 배신하고, NPC에게 피해를 입히는 백해무익한 존재들.

‘하지만…… 이 모험가는 다르다는 말인가?’

타인을 위해 자신의 기회를 희생할 용기가 있다.

그것이 다른 모험가와 눈앞의 모험가. 카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베오르크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재미있군.”

그가 웃었다.

아까처럼 카이를 비웃은 것이 아니다. 정말 즐거워서 띄운 미소였다.

‘모험가 중에서도 이런 자가 있었는가.’

마치 진흙 속에 파묻힌 진주를 발견한 기분이다.

게다가 이 자는 최근 스승님께서 관심있게 지켜보는 모험가가 아닌가.

‘정말 재미있군.’

카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든든한 배경을 얻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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