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힐통령 065화
29장. 물의 현자, 타르달(2)
카이는 저택 내부의 서재로 안내되었다.
서재는 벽 한 면이 통짜 유리로 되어 있어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들어오는 장소였다.
그 공간에 위치한 원목 의자에는 70대 노인으로 보이는 백발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사라락, 사라락.
그는 카이가 도착했다는 시종의 안내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시종은 말을 마친 뒤 곧장 돌아갔고, 타르달의 주름진 손은 조용히 책장만을 넘겼다.
카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의 독서가 끝나기까지 기다렸다.
탁.
마침내 독서를 끝낸 타르달은 책을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콧잔등 위에 걸친 조그마한 돋보기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카이를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무심하면서도 공허한 눈빛.
카이는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카이라고 합니다.”
물의 현자, 타르달 에이수스.
전직 라시온 왕국의 재상이었던 자로서 수많은 귀족과 왕족들이 그의 든든한 배경이다.
카이도 이번에야 알게 된 인물로, 아는 사람만 알고 있는 네임드 NPC였다.
‘설마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수많은 귀족과 왕족은 그를 스승처럼 모시며 공경한다.
그런 이와 만나게 된 것은 카이로서도 크나큰 기회!
“…….”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카이를 응시하던 타르달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아르센의 소개로 왔다고.”
“예, 그렇습니다.”
“제법이군. 그 아이의 사람 보는 눈은 쓸만한 편이거든. 부정청탁을 받을 녀석도 아니고.”
“그, 그렇습니까?”
아르센 남작을 애처럼 취급하는 타르달!
그제야 카이는 자신이 어떤 인물을 눈앞에 두고 있는지 깨닫고 침을 꿀꺽 삼켰다.
“실력을 입증하겠다고 한 행동도 인상 깊군. 상당히 우수해.”
“기회가 된다면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카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만약 상대가 아르센 남작처럼 부드러운 인물이었다면 적당히 겸손을 부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점수를 따기 좋은 방법이니까.
‘하지만 타르달 같은 사람 앞에서는 내 성과를 깎아봤자 의미가 없지.’
아주 잠깐 봤을 뿐이지만 카이는 타르달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금세 파악했다.
‘그 무엇보다 결과를 중요시하는 사람.’
애초에 자신의 실력을 증명한 모험가들만 만난다는 것부터가 이를 뒷받침했다.
사고방식만 따져보면 현자보다는 고지식한 마법사가 더 어울렸다.
타르달이 특유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들었다.”
“아, 예! 이 물건의 정체를 알고 싶습니다.”
카이는 인벤토리에서 어둠의 정수 조각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타르달이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그렇군. 나를 찾아온 건 타당한 선택이었다.”
‘과연 물의 현자……!’
물건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체를 알아낸 것인가!
얌전히 설명을 기다리는 카이에게, 타르달이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전했다.
“하지만 맨입으로 말해줄 순 없다. 내 지혜를 빌리는 값은 저렴하지 않거든.”
“예……?”
카이가 눈을 깜빡였다.
이것을 물어보기 위해 아쿠에리아까지 왔으며, 인던 랭킹 1위를 기록했던 것 아니었는가.
“하, 하지만.”
“하지만. 내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다.”
타르달이 돌연 눈을 번뜩였다.
70대의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날카로운 눈빛이 카이를 관통했다.
[상대방의 위엄 수치가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상태이상 ‘위축’에 걸렸습니다.]
[강력한 마법저항력으로 인해 상태이상을 약소하게나마 저항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25% 하락합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마치 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빳빳하게 굳은 카이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단순히 위엄 수치가 차이나는 것만으로도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다시금 무심한 눈빛을 띄운 타르달은 느긋한 목소리를 뱉어냈다.
“자네가 실력을 입증한 건 내 앞에 서기 위함이 아니었나.”
“그 말씀은…….”
질문에 대한 값은 따로 지불해야 된다는 소리였다.
‘여기서 친근한 형제들을 써버릴까?’
잠시 고민이 되었지만 이내 고개가 저어졌다.
비장의 한 수라면 마지막을 위해 남겨놓는 것이 좋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이해력이 빠르군.”
휘익.
타르달이 조그마한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그것을 집어든 카이의 눈이 반짝였다.
띠링!
[타르달의 시험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타르달의 시험]
난이도 : 없음
30일 안에 자신이 직접 사냥한 몬스터의 비늘을 가져오십시오.
퀘스트 보상 : 타르달에게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음. 연계 퀘스트 획득.
실패 페널티 : 타르달의 호감도 대폭 하락.
‘살벌한 퀘스트구만.’
타르달은 지금도 특유의 깐깐한 성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호감도가 대폭 하락한다면?
그건 그냥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생각보다 훨씬 거대한 실패 페널티.
하지만 무엇보다 카이를 당황하게 한 건 퀘스트의 내용이었다.
“저…… 타르달 님. 어떤 비늘을 가져오라는 것인지 안 쓰여 있습니다만?”
“자네가 가져올 수 있는 것 중 최고.”
타르달의 대꾸는 간단했다.
그의 대답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철저하게 평가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카이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지금 내 레벨 대에서 잡을 수 있는 몬스터 중에서 비늘을 드랍하는 애들이…….’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들이 떠올랐지만 카이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런 일반 몬스터들의 비늘을 구해 와봤자 결과는 뻔하겠지.’
이 퀘스트는 자신의 수준을 가늠하는 시험이었다.
무엇이 되었든, 타르달의 예상을 뛰어넘을 만한 비늘을 가져와야 했다.
거기다가 30일이라는 시간 제한까지!
하지만 카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뿐이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지켜보지.”
타르달과의 대화를 마친 카이는 저택을 나섰다.
‘100레벨 이하의 몬스터 중 비늘을 드랍하는 몬스터.’
그 정보를 찾기 위해 카이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도서관이 아닌 정보 길드였다.
***
미드 온라인에서의 정보 길드는 기본적으로 음지에 속해 있는 단체였다.
대륙의 왕국과 제국에 막대한 세금을 지불함으로써 공식적인 단체로 인정을 받았다지만, 그 근본이 어디에 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실제로 현재 카이를 담당하고 있는 사내도 껄렁해 보였다.
“비늘을 드랍하는 몬스터를 찾고 싶으시다고?”
“예.”
“잠깐 기다리고 있어 봐요.”
사내가 말한 잠깐은 정말 잠깐이었다.
3분이 채 넘어가지 않았으니까.
쿠웅!
“…….”
그리고 그 잠깐 사이에 가져온 서류의 양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카이가 서류를 향해 손을 뻗자, 사내가 서류 더미를 끌어당겼다.
그는 손으로 돈 모양을 만들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보 길드 처음 오시나? 여기는 항상 선불입니다만.”
“얼마죠?”
“5골드.”
“괜찮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는 카이의 목소리에는 있는 자의 여유가 묻어나왔다.
‘젠장, 좀 더 비싸게 부를걸.’
속으로 투덜거린 정보 길드의 도적은 5골드를 건네받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뭐 다른 건 궁금한 거 없슴까? 지금이라면 좀 싸게 드릴 수도 있는데.”
“지금은 없습니다.”
짤막하게 대꾸한 카이는 정보 길드를 나오며 고개를 저었다.
‘눈 감으면 코 베어 갈 듯한 장소네.’
저런 곳이 어떻게 공식 기관으로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아쿠에리아의 외곽.
해변가의 바위에 걸터앉은 카이는 구매한 서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웜 리자드, 하피, 와이번, 블러드 스네이크…….’
서류에는 비늘을 드랍하는 몬스터들의 외형과 특징, 그리고 레벨과 서식지까지 표기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일 처리는 깔끔하게 잘하네.’
정보 길드를 재평가한 카이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근처에서 잡을 수 있는 것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건…… 강철 거북이인가.’
등에는 강철로 이루어진 껍질을 덮은 채, 팔과 목에는 단단한 비늘을 두르고 있는 녀석이다.
그 존재 자체가 상당히 희귀한 녀석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서류에는 녀석을 불러내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거북이를 잡겠다고 낚시를 해야 한다니.‘
강철 거북이는 2레벨 몬스터인 블러드 웜을 가장 즐겨 먹는다고 쓰여있다.
카이는 튼튼한 낚싯대와 블러드 웜을 구매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강철 거북이는 레어 몬스터. 30일을 이 녀석만 바라고 허비할 수는 없어.’
딱 일주일.
그 안에 강철 거북이가 나오지 않으면 미련 없이 포기하겠다.
그것이 카이가 세운 결심이었다.
***
“……솔로천국, 커플지옥.”
뚱한 표정을 지은 카이는 자신의 키보다 길쭉한 낚싯대를 짊어진 채 해변가를 걸었다.
“꺄르륵, 자기야! 나 잡아봐라!”
“후후, 우리 자기 너무 빠른데?”
“자기야, 사랑해.”
“아잉!”
“으으으으.”
듣기만 해도 손과 발이 배배 꼬이는 낯간지러운 문장들!
그 유해한 문장들을 속삭이는 건 아쿠에리아의 해변에 위치한 연인들의 혓바닥이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들의 애정행각을 쳐다본 카이는 크게 부러워…… 아니, 분노했다.
“하라는 게임은 안 하고 연애질을……! 그러라고 사준 캡슐이 아닐 텐데!”
게다가 둘만의 장소도 아닌 공공장소에서 저렇게 부러운…… 아니, 부끄러운 짓들을 하다니!
‘내가 언젠가 꼭 똑같은 짓을 해서 복수해 주겠어.’
복수를 다짐하며 해변가를 뒤로한 카이는 바닷가의 외곽 지역으로 향했다.
길을 걸어가기를 30분.
더 이상 플레이어들은 물론이고 NPC들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쿠에리아의 새하얗고 깨끗한 건물들은 외곽 지역으로 갈수록 허름해지더니, 종래에는 판잣집만이 눈에 들어왔다.
“흠. 이쯤이면 적당하겠어.”
터가 좋다!
카이는 그런 느낌이 팍팍 드는 바위에 걸터앉아 낚싯대에 블러드 웜을 매달았다.
“자, 강철 거북이를 유인해오너라.”
힘차게 낚싯대를 던진 카이는 신경을 집중했지만, 낚시찌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긴, 강철 거북이가 무슨 사흘 밤낮을 굶은 거지도 아닐 테니까.’
낚시란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세월을 낚는 것이다.
낚싯대를 고정시킨 카이는 심심한 마음을 달래고자 인벤토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건 버리고…… 와, 슬라임의 핵 이건 대체 언제 적 거야?”
시험 기간에 청소를 하면 재미있듯, 입질을 기다리면서 하는 인벤토리 청소도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응?”
한창 인벤토리를 청소하던 카이의 손에 책 한 권이 잡혔다.
“그러고 보니…….”
로디의 가족을 구해준 뒤 데바에게 보상으로 받은 동화책!
언젠가 한 번 읽겠다고 다짐은 했지만, 막상 게임에 접속하면 할 일이 많아서 책을 읽을 여유가 항상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도 좀 있고…… 마음의 양식이나 좀 쌓아볼까?’
툭, 툭.
“후우!”
책을 뒤덮고 있는 먼지를 털어낸 카이는 책의 제목부터 확인했다.
[인어들의 고향]
“인어에 관련된 동화책인가…… 그립네.”
어린 시절, 인어 공주라는 동화책을 읽어본 기억이 있던 카이가 미소를 지었다.
이 나이에 동화책을 읽는 것이 조금 유치하기는 하겠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시간 죽일 일이 필요했으니 간만에 동심 충전이나 해볼까.’
사르륵.
첫 페이지를 펼친 순간, 삽화 한 장이 카이의 시선을 강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