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힐통령 057화
26장. 토벌이 끝나고(2)
“둘 다 편히 앉게.”
긴 식탁의 상석에 아르센 남작이 앉았고, 그 왼쪽으로는 부인과 아들인 아도르.
반대쪽에는 카이와 의문의 여인이 앉았다.
아르센 남작이 와인 잔을 높이 들어 올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토벌대의 영웅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건배를 하지.”
“감사합니다.”
자신이 일궈낸 성과를 누군가 칭찬해 주면 기쁠 수밖에 없는 법!
아르센 남작과 그의 가족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카이의 칭찬을 입에 담았다.
“계속 그렇게 칭찬하시면 부끄럽습니다만…….”
“하하하! 자랑스러워하셔도 좋을 일입니다. 대체 어디가 부끄럽습니까?”
“아도르의 말이 맞네. 자네는 너무 겸손한 부분이 없잖아 있어. 좀 더 자신감을 가지게.”
“그래요. 아무리 겸손이 사제의 미덕이라지만, 그 정도가 과한 것도 좋지만은 않아요.”
“새겨듣겠습니다.”
토벌대의 승리를 이끈 주역들이 자리한 저녁 식사 분위기는 훈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카이의 시선이 자신의 왼쪽으로 향했다.
냠냠, 꼭꼭!
인형 같은 미모의 여인은 대화에 일절 참여하지 않은 채 조용히 음식을 먹는 중이었다.
정말 저녁 식사에 참여한 목적이 음식인 것처럼 보일 정도!
카이가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아르센 남작이 자신의 무릎을 쳤다.
“아차, 내 정신이 이렇다네. 아직 두 사람을 소개시켜 주지도 않았구만.”
얌전히 포크를 내려놓은 여인은 남작과 카이를 차례대로 쳐다봤다.
“이쪽은 카이. 매번 나와 영지에 도움을 주는 고마운 모험가일세. 이번에도 오크 로드와 오크 주술사가 그의 손에 마무리되었지.”
“…오크 로드?”
멈칫.
카이를 쳐다보던 여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뭐야, 갑자기 반응이 왜 저래?’
마치 끙끙 앓는 고양이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그녀!
태도만 보면 뭐가 되었든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 같아 보인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여인은 자네와 같은 모험가일세.”
“잠깐만요. 모험가라고요?”
이번에는 카이의 움직임이 멈췄다.
NPC인 줄 알았던 여인의 정체가 유저라고?
카이의 표정이 안색이 단번에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글렌데일의 성자라는 것과 오크 주술사, 오크 로드를 잡았다는 것도 전부 들었을 텐데?’
그렇다면 방금 그 반응도 이해가 된다.
사람들이 제법 궁금해하는 언노운의 정체를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예상치 못한 위기에 카이의 인상이 찡그려지는 순간, 아르센 남작의 말이 이어졌다.
“아 참, 그녀의 이름은 유하린이라고 하네. 같은 모험가이니 자네와도 통하는 것이 많겠지.”
‘잠깐만, 유하린?’
카이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혹시 내가 아는 그 유하린은 아니겠지?’
유하린.
그 단어를 떠올린 카이의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베이거스를 때려잡던 플레이어가 떠올랐다.
하지만 미드 온라인은 중복된 닉네임도 허용된 게임!
랭커들의 닉네임을 따라 하는 이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럼 이 사람도 단순한 유하린의 팬일까? 아니면…… 혹시 진짜?’
빠- 안.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카이의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유하린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물론 그 정도의 귀여운 저항에 물러설 카이가 아니었다.
“반갑습니다. 카이라고 합니다.”
“……유하린이에요.”
“…….”
“…….”
통성명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로 내려앉는 어색한 침묵!
그 모습은 마치 친구 여럿과 함께 몰려다닐 땐 서로 간에 대화도 곧잘 하지만, 두 명만 남게 되면 급격하게 서먹해지는 친구 사이를 연상케 했다.
이 답답한 광경을 보다 못한 아르센 남작이 끼어들 정도.
“그녀는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네. 그래도 심성이 착하다는 것만은 확실해.”
“……그렇군요.”
카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거두었다.
‘대놓고 묻기에는 그러니까…… 우선 좀 떠볼까?’
첫 만남에서 정보를 꼬치꼬치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닌 법!
적당한 화젯거리를 찾던 카이는 그녀의 접시 위에 남아 있는 마지막 한 조각의 스테이크를 쳐다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스테이크가 맛있으신가 봐요?”
“……!”
그 말에 유하린은 마치 도둑질을 하다가 걸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더니, 접시를 자신의 앞으로 확 당기며 카이를 경계했다.
“제 거예요.”
“…….”
순식간에 음식 강탈범으로 몰리게 된 카이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걸 누가 뺏어 먹는다고…….’
심지어 카이의 접시 위에는 손도 대지 않은 멀쩡한 스테이크도 있는 상태!
난생처음 받아보는 대접에 당황한 카이는 얼떨결에 자신의 접시를 내밀었다.
“빼, 뺏어 먹을 생각 없습니다. 혹시 스테이크 좋아하시면 제 것도 드실래요?”
말을 꺼냄과 동시에 아차 하는 마음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나 바보인가? 무슨 먹이로 동물 조련하는 것도 아니고, 유치원생들한테도 안 통할 방법으로 경계심이 풀릴 리가…….’
“그래도 돼요?”
‘있네!?’
어느새 경계 어린 눈초리가 사라진 그녀는 카이의 접시 위에 담긴 스테이크를 빤히 쳐다보더니, 그 큼지막한 눈망울을 들어 카이를 올려다봤다.
‘크윽!’
계속 보면 심장에 해로울 것 같은 치명적인 눈빛!
카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리며 접시를 내밀었다.
“드세요. 전 입맛이 별로 없어서.”
“그럼 잘 먹겠습니다.”
예의 바르게 고개를 꾸벅 숙인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한 조각 남은 스테이클 입안에 쏙 집어넣더니, 카이의 스테이크도 우아하게 썰어가며 먹기 시작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그녀가 식사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카이는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다는 기분을 실제로 느꼈다.
‘……잘 먹네.’
그냥 잘 먹는 게 아니라, 끝내주게 잘 먹는다.
다른 사람이 음식을 저렇게 빨리 먹으면 게걸스럽다는 느낌을 받을 텐데 그녀는 달랐다.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썰고, 포크로 고기를 찍어 입안에 가져가는 규칙적인 모습은 마치 대기업에서 톱스타 여배우를 주연으로 찍은 고깃집 광고 같았다.
‘물론 외모는 이쪽이 더…… 아,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그녀의 아름다움에 소기의 목적을 잊어버린 카이는 겨우 정신을 차리곤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저…… 혹시 직업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것도 인연인데 나중에 파티라도 한번 하고 싶어서요. 아! 참고로 전 사제입니다.”
우물우물. 꼭꼭. 꿀꺽.
입안의 고기를 목구멍으로 넘긴 유하린은 냅킨으로 자신의 입가를 닦더니 큼지막한 눈망울을 깜빡였다.
“전직은 아직 못 했어요.”
“그, 그러십니까?”
“네. 그리고 파티 사냥은…… 아무래도 레벨 차이가 많이 나서 무리일 것 같아요. 죄송해요.”
‘그럼 그렇지.’
후우, 카이의 입에서 진한 아쉬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애초에 길 가다가 유하린을 만나는 것도 로또라고 불리는데, 이런 곳에서 만날 리가 있나.’
솔로 플레이만을 지향하는 그녀는 도시에서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들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는 신비로운 인물!
‘자, 그럼 이제 내 정보를 소문내지 못하게만 하면 되는데…….’
카이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그가 처한 상황은 제법 심각했다.
만약 그녀가 자신에 대한 정보를 어딘가에 풀어버린다면?
과연 그의 게임 인생은 어떻게 될까?
‘당장 검은 벌 길드 놈들이 벌떼처럼 몰려오겠지.’
그때는 지난번과 같은 꿀벌들이 아닌, 말벌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 말벌들을 상대할 자신의 승률은 한없이 0%에 가까울 것이고.
‘그것만큼은 절대 안 돼.’
물론 쉬운 길도 있다.
바로 자신의 직업을 공개한 뒤, 세계 10대 길드 중 한 군데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최후의 최후까지 내몰렸을 때 사용해야 하는 방법이다.
‘애초에 세계 10대 길드 녀석들을 별로 안 좋아하니까.’
결국 모든 선택은 눈앞의 유하린에게 달려 있는 셈!
카이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냠냠, 꼭꼭.
그 집요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유하린은 꿋꿋하게 모든 고기를 먹어치웠다.
***
쿠웅.
저택의 대문이 굳게 닫히고, 그 앞에 선 카이와 유하린의 폐부로 시원한 밤공기가 스며들었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쉰 카이는 뭔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유하린 님.”
원래 아쉬운 놈이 먼저 우물을 파는 법이다.
카이가 자신을 부르자 유하린은 고개를 돌리며 왜요 라는 눈빛을 보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들으신 모든 정보, 제가 구매하겠습니다.”
카이가 선택한 것은 바로 정공법!
시간을 질질 끌수록 그녀의 생각은 길어질 테고, 그럼 지불해야 할 금액이 커질 수도 있었다.
“정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녀가 아. 하는 조그마한 중얼거림과 함께 입을 열었다.
“혹시 카이 님이 글렌데일의 성자이며, 이번에 오크 주술사와 오크 로드를 처치한 언노운…….”
“자, 잠깐! 잠깐만요!”
순간적으로 당황한 카이는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손을 뻗었다.
휙.
카이의 손길을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난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피해버린 유하린!
‘뭐, 뭐야. 반사신경이 왜 이래?’
그 깔끔한 백스텝에 감탄한 카이였으나,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무례를 깨달은 카이는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마음이 너무 급했네요. 그 정보가 퍼지면 여러모로 곤란해지거든요.”
“…….”
잠시 눈을 깜빡거리며 가만히 카이를 쳐다보던 유하린이 돌연 자신의 고개를 붕붕 저었다.
동시에 카이의 심장도 철렁 내려앉았다.
‘서, 설마 협상 결렬인가? 대가고 뭐고 그냥 내 정보를 퍼뜨리겠다는 건가? 그런 건가?’
하지만 카이의 걱정과는 다르게, 유하린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에게 긍정적이었다.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진심이세요?”
대체 왜?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이해를 못 한 카이가 머뭇거리자, 유하린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오크 로드…… 죄송하니까…….”
“예? 죄송한데 잘 안 들렸어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녀가 고개를 흔들면서 아무 말도 안 했음을 강력히 주장하자, 카이도 마지못해 인정했다.
납득이 되지는 않았지만, 당사자가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리고 남한테 말을 안 하겠다는 것도, 솔직히 믿을 수가 없어야 정상인데…….’
저 얼굴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 놀랍게도 신뢰도가 높아지는 기분!
만약 그녀가 다단계나 사이비 교주가 되었다면 지금쯤 빌딩을 몇 채나 세웠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저 말 하나만 믿고 가기엔 또 불안하고, 미치겠네.’
하지만 여기서 계속 말을 이어붙여 봤자, 결국 그녀를 못 믿겠다는 소리밖에 안 된다.
카이가 끙끙거리고 있자니, 그녀는 몸을 가볍게 떨며 자신의 한쪽 팔을 감쌌다.
입에서는 연신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니, 확실히 밤공기가 쌀쌀하기는 하다.
‘그러고 보니 입고 있는 장비가…….’
현재 그녀는 허름해 보이는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를 막아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의복!
‘쯧, 저러니까 진짜로 나 초보자 시절 때가 생각나잖아.’
춥고 배고프고 서럽던 시절의 연속이었다.
그때의 카이도 밤만 되면 추위를 막지 못하는 얇은 의복 때문에 제법 고생을 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보인 카이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오크 가죽 두 장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것은 거래를 할 때의 기본!
“일단 이거라도 걸치세요. 옷은 아니지만 걸치면 제법 따뜻할 겁니다.”
“……?”
“아!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그렇게 비싼 건 아니에요. 잡화점에 팔아도 개당 2실버 정도밖에 안 되니까요.”
물론 초보자 시절의 2실버짜리 가죽 두 장은 제법 클 수도 있다.
유하린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히 잘 쓸게요.”
자신의 어깨 위에 오크 가죽 두 장을 얹은 유하린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이의 표정도 풀렸다.
‘와, 어떻게 오크 가죽을 걸쳤는데도 그림이 되지……?’
드레스라도 입혀놓으면 안구 정화 수준이 아니라 시력이 올라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
카이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지나가듯 말했다.
“험험. 제가 유하린 님을 못 믿어서 점수 따려고 드리는 거 아닙니다. 저도 초보자 시절에 그 혹독한 추위를 겪어봤거든요. 그래서 드리는 거예요.”
“아…… 고마워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설마 정보를 퍼트리진 않겠지?’
가장 확실한 건 자신의 레벨이나 능력치를 앞세워 초보자인 그녀를 협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쓰레기들과 똑같은 사람이 될 뿐이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애초에 이 일도 누구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르센 남작도 나쁜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는 유저들 사이에서 떠도는 언노운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몰랐을 뿐이니까.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은 카이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끄덕끄덕.
카이는 그녀에게 짧은 인사를 남긴 채 언덕길 아래로 내려갔다.
자리에 홀로 남게 된 유하린은 어깨 위에 걸진 오크 가죽 두 장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마치 타인의 호의를 처음 받아보는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