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54화 (54/441)

# 54

힐통령 054화

25장. 죽음의 술래잡기(5)

시간은 5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허억, 허억…….”

카이의 입에서는 연신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 산소가 부족해진 뇌 때문에 흐릿해지는 시야.

게다가 웅웅거리며 소리까지 울려오기 시작했다.

하나만 있어도 악조건이라 칭할 만한 것들을 주렁주렁 매단 카이였지만, 그는 웃었다.

‘재미있다!’

오크 로드 우르간의 맹공을 열심히 피하면서 전투의 재미를 느껴버린 것이다.

남들과는 다른 변태적인 감성이었지만, 신기하게도 그 감성은 그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다음은 왼쪽으로 온다!’

카가가가각!

카이가 오른쪽으로 몸을 날린 직후, 우르간의 양날 도끼는 애꿎은 땅을 갈아버렸다.

“쥐새끼 같은 인…… 간……!”

우르간이 툭 튀어나온 어금니를 부들부들 떨어대며 카이를 저주했지만, 처음처럼 위협적이지는 않다.

그의 상태는 한눈에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 발은 후들후들 떨리고 있고, 아까부터 공격 명중률과 속도가 엄청나게 떨어졌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체력!

우르간의 체력은 어느새 5% 아래로 떨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중독이 되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거동이 불편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들어준 계기는 페르메의 독이었지만, 일등공신은 따로 있었다.

‘공격이 잘 보인다. 그냥 잘 보이는 게 아니라, 미치도록 잘 보여.’

카이는 새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눈을 깜빡였다.

전투 내내 우르간의 공격을 두 수, 세 수 먼저 예상하고 피할 수 있게 도와준 놀라운 눈이다.

‘그 재미없던 파티 사냥에 이런 보상이 있었을 줄이야.’

파티 사냥을 할 때 진형의 최후방에 위치하는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제다.

그들은 몬스터가 언제, 어떻게 아군을 공격할지 모르니 움직임을 항상 예의주시 해야 한다.

파티에서 가장 각광받는 사제의 조건은 과연 무엇일까?

높은 스킬 숙련도? 높은 신성 스탯? 고레벨 장비?

모두 틀렸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힐이 가장 필요하고, 버프가 가장 필요할 때 그것을 줄 수 있는 사제.

서포트가 가장 필요한 순간 그것을 해줄 수 있는 사제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제들은 항상 전장을 넓게 봐야 했다.

‘처음엔 적응하느라 힘들었지.’

가상현실게임을 처음 접한 카이는 더더욱 그랬다.

남들은 몬스터를 잡으며 쑥쑥 레벨을 올리는데, 자신은 언제 얻어맞고 죽을지 모르는 파티원부터 챙겨야 했다.

그때부터였다.

전장을 넓게 보는 습관이 생긴 것은.

‘이건 나뿐만이 아니야. 사제들이라면 대부분 갖고 있는 시야지.’

하지만 카이가 그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고작 하나지만, 그들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하나.

‘그 시야를 가지고 몬스터와 직접 싸우면…… 이런 일도 가능해지는구나.’

파티의 최후방, 그리고 지금과 같은 최전선.

두 개의 포지션 전부를 맡아본 자만이 터득할 수 있는 넓으면서도 촘촘한 시야!

그야말로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보는 만능의 눈이다.

“후우…….”

사제로서 게임을 플레이했던 나날이 하나둘 떠올랐다.

앞에서는 사제님이라고 말을 하면서도, 은연중에 얼마나 무시를 당했던가.

‘하지만 사제도 힘을 갖추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이었어.’

일반적인 사제는 평생 파티의 최후방에 위치한다.

최전방에 설 능력도 없고, 마음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전투 사제처럼 처음부터 최전방에 서는 클래스는 최후방에 설 이유가 없다.

궁수와 마법사 같은 경우도 다르다.

확실히 그들은 파티의 후방에 위치하지만, 아군과 적군을 포함해 전장 전체를 시야에 넣는 사제와는 보는 것 자체가 다르니까.

결국 카이는 자신조차 몰랐던 장점을 전투 중에 깨달은 것이었다.

“크하아!”

부웅, 부웅!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오는 양날 도끼!

한 대라도 맞으면 극심한 피해를 입을 치명적인 공격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단언컨대, 카이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몇 분 전만 해도 공격 한 번 피할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했는데…….’

보호만 받던 사제 시절 때는 파티가 전멸하지 않는 이상 느낄 수 없던 공포!

그 공포를 코앞에서 마주한 카이의 감각은 장인의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상태였다.

“이제 제발 좀 죽어라! 취이익!”

그런 카이를 상대하는 우르간의 목소리는 이제 분노보다는 호소에 가까웠다.

‘지금쯤 미치도록 답답하겠지.’

처음엔 한 끗 차이로 공격을 겨우겨우 피해 나가던 인간이, 점점 더 여유를 갖추고 있으니까.

실제로 우르간의 눈동자 속에서는 감출 수 없는 동요가 엿보였다.

‘취이익! 말도 안 되는 인간! 대체 정체가 뭐지?’

상식을 벗어난 괴물, 그것이 현재 우르간의 눈에 보이는 카이라는 존재였다.

기본적으로 사람의 성장은 급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걸음, 한 걸음.

마치 계단을 오르듯이 하루하루 노력을 하고, 그 시간들이 쌓이고 쌓이면 어느 순간 자신이 성장했음을 깨달을 수 있다.

하지만 눈앞의 검은색 전사는 달랐다.

‘이 싸움을 통해…… 성장을 한다고? 취이익! 감히 나, 거친 부족의 족장인 우르간을 발판으로 삼는다는 것인가?’

수천 마리의 오크들을 다스리며 오크 로드라 불렸던 우르간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상처 입은 맹수는 난폭한 법이다.

“크허허허헝!”

마치 사자가 울부짖는 것처럼 동물적인 소리를 뱉어내는 우르간!

동시에 카이의 몸이 움찔거렸다.

“뭐, 뭐야.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깜짝 놀란 카이의 몸이 흐트러지는 순간!

우르간의 공격은 그 빈틈을 가차 없이 비집고 들어왔다.

여태까지의 베기와는 달리 아늑한 빠르기의 찌르기!

“도끼로 찌르기라고!? 반칙이잖아!”

도끼를 사용하는 정석적인 방법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공격!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고, 그랬기에 반응이 한 박자 느려질 수밖에 없는 회심의 한 수였다.

그 순간 카이의 사고가 빠르게 돌아갔다.

한바탕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뜨거워지고, 주변의 시간이 느려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이미 피하기엔…….’

늦었다.

신성 폭발을 비롯해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수십 가지의 움직임이 머릿속으로 떠올랐지만, 저 찌르기를 피할 수 있다는 견적은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피할 수는 없지만…… 안 피하면 방법은 있다.’

카이의 눈에서 열망이라는 불똥이 튀어 올랐다.

전투가 이어지면서 싹을 피우기 시작한 욕망, 그것을 시험해 볼 좋은 기회였다.

‘지금의 나는 이 녀석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까?’

여명의 검술관에서 배운 검의 기초.

그리고 거미의 숲에서 터득한 사냥의 기초.

마지막으로 붉은 주먹 길드원들을 쓸어버리면서 경험한 전투의 기초.

그 모든 것들을 이번 한 수를 통해 전부 쏟아낼 생각이었다.

“흐으읍!”

카이의 오른손이 섬광처럼 빠르게 움직였고,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까아아아아앙!

냉병기들의 격돌에 주변의 공기들조차 휩쓸려 나갔다.

힘과 힘의 격돌이 끝나면 웃는 자와 우는 자가 남는 법!

그렇기에 카이와 우르간의 희비도 엇갈렸다.

“이게 대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는 우르간!

그 얼빠진 표정을 재미있게 감상하던 카이는 몸을 숙여 앞으로 튀어나가며 녀석의 귓가에 속삭였다.

“말했잖아, 전사의 신성한 결투니 뭐니 하는 거, 난 모른다고.”

다음 순간, 우르간의 도끼는 새하얀 검신을 미끄럼틀처럼 타고내리며 죄 없는 허공을 찔렀다.

전문용어로 헛방!

‘당했다!’

우르간의 툭 튀어나온 어금니가 부들부들 떨렸고,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드드드득!

바로 카이의 무릎과 우르간의 명치가 맞닿으며 이뤄낸 멋들어진 합주!

물론 우르간의 입장에서는 불협화음이나 다름없는 소리였다.

중요한 건 전투 시작 이래, 카이가 처음으로 우르간의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낸 뒤 유효타를 먹였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은 우르간은 물론이고, 카이에게까지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정말 이 인간에게 공격을 허용한 건가?’

‘내가 정말 이 오크에게 공격을 성공시켰다고?’

카이는 멍한 얼굴로 명치를 감싸며 뒤로 물러나는 우르간을 쳐다봤다.

사실 우르간의 공격을 흘려보낸 건 순간적인 발상이었다.

쇼팽의 즉흥 환상곡은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곡이 아니었지만, 카이의 이 묘기와도 같은 한 수는 즉흥적인 움직임이 확실했다.

‘와, 그런데 이게 통했다고? 말도 안 돼.’

물론 상대방의 공격을 끝까지 주시하는 눈도 눈이었지만, 천운이 뒤따랐기에 가능했던 일!

동시에 우르간의 새빨간 체력이 눈에 들었다.

‘남은 체력은…… 고작 2%!’

깨달은 자의 롱소드를 잡고 있는 카이의 손아귀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그래, 단순히 도망만 치면 재미가 없겠지.’

어느 시대에도 그랬지만,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은 항상 반전을 원한다.

그것도 자신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일수록 더욱 열광하고 환호한다.

‘그건 아마 이 영상을 보게 될 사람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언노운이라는 존재에게 특별한 무엇인가를 원할 터!

그렇기 때문에 카이는 칠흑의 놀 투구 아래에서 미소를 지었다.

‘원하면 줘야지. 특별한 무언가를.’

지금 이 순간, 끝내주는 시나리오가 생각났으니까.

처억.

카이가 검을 들어 우르간을 겨눴다.

때마침 불어온 한 줄기 바람은 장미 문양이 새겨진 망토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그렇게 술래가 바뀌었다.

***

쿠우웅!

카이가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한 지 겨우 30초.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 같던 우르간의 두 무릎은 바닥과 맞닿았다.

이윽고 반짝거리는 폴리곤이 되어 흩어져가는 우르간.

녀석을 쳐다보던 카이는 아쉬움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뭐, 결국 검으로는 데미지를 주지도 못했나.’

사실 피를 깎은 건 대부분 페르메의 독이었다.

그럼에도 카이가 위험을 무릅쓰고 검을 휘두른 건 단순한 ‘연출’때문이었다.

자신이 오크 로드와도 이렇게 팽팽한 대결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쇼!

‘후, 영상 한 번 찍는 것도 힘드네.’

아쉽지만 이대로 퇴근을 해도 되는 건 아니었다.

아직 오크 주술사와 검은 벌들이 남아있었으니까.

하지만 가장 큰 고비는 넘겼다고 봐도 좋을 터!

[토벌 포인트가 500점 상승했습니다.]

[무모한 도전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스페셜 칭호, ‘용맹한 전사’를 획득했습니다.]

[명성이 2,000 상승하셨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스탯 포인트를 5개 획득하셨습니다.]

카이는 쓰디쓴 사탕을 먹은 것처럼 입맛을 다셨다.

“쩝, 아쉽네.”

만약 다른 유저들이 봤다면 미친 거 아니냐고 까무러칠만한 반응!

하지만 카이도 할 말은 충분히 많았다.

‘다른 유저들이 피를 많이 깎아놔서 그런지, 경험치도 생각보다 적게 들어왔어.’

90레벨의 레이드 보스 몬스터를 잡았음에도 올라간 레벨은 고작 하나.

카이의 입장에서는 아쉬울 만도 했다.

‘그리고 스페셜 칭호? 별미도 가끔 먹어야 별미지. 자주 먹으니까 별 감흥도 없다고.’

마치 스페셜 칭호를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간식처럼 취급하는 카이!

하지만 가장 큰 아쉬움은 다른 곳에 있었다.

“아쉽다. 오크 로드 슬레이어 칭호를 딸 수도 있었는데.”

자신이 페르메를 최초로 잡고 ‘여왕 살해자’를 획득했듯이, 오크 로드를 처음으로 처치했다면 분명 그에 상응하는 칭호가 반드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나오지 않았다는 건 그보다 먼저 오크 로드를 죽인 사람이 있다는 뜻!

그리고 카이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유하린…… 역시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예전에 커뮤니티에 한 가지 루머가 퍼진 적이 있었다.

유하린의 레벨이 120 정도였던 시기였는데, 그녀가 글렌데일에 나타났다는 소문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랭킹 1위의 고수가 뭐가 아쉬워서 글렌데일에 오냐며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때 누가 댓글로 그랬지. 그녀가 오크를 전부 잡으면서 부락으로 뛰어가는 걸 봤다고.’

그 소문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되며 당시에는 큰 신빙성을 얻지 못했다.

기사를 보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건 카이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게 진짜였다니.”

그녀가 아니라면 딱히 오크 로드와 관련된 랭커는 생각나지 않았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만약 오크 로드가 웜 리자드처럼 단순한 필드 보스였다면 유하린은 슬레이어 칭호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스페셜 칭호는 플레이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할 때만 부여되니까 말이지.’

하지만 오크 로드는 무려 레이드 급의 보스 몬스터.

레벨 차이가 얼마나 나든 간에 퍼스트 킬을 기록하면 스페셜 칭호가 따라올 수밖에 없다.

“후우…….”

그래서 더 아쉬웠다.

만약 오크 로드보다 레벨도 낮은 카이가 슬레이어 칭호를 획득했다면, 추가 옵션도 주렁주렁 달렸을 테니까.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그녀는 오크 로드와 결투를 치르지 않았다는 점인가.’

그녀는 오크 로드와 말조차 섞지 않고 목을 따버린 듯하다.

덕분에 자신은 무사히 우르간과 결투를 성립시켰고, 용맹한 전사라는 칭호를 손에 넣었다.

“칭호 도감.”

카이가 얻지 못했던 칭호를 그녀가 가져갔듯이, 그녀가 얻지 못한 칭호는 카이의 반짝거리는 도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