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힐통령 046화
22장. 하녹스의 시련(2)
“그렇군요, 그럼 어서 주시죠. 전 준비가 되었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마친 카이가 양팔을 쩍 벌리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뭘 말인가?]
“선배님께서 이곳에 계신 이유는, 4대째 태양의 사제가 될 사람에게 힘을 전해주기 위해서 아닌가요?”
[미안하지만 틀렸네. 비록 자아를 가진 채 그대와 대화를 하고 있다지만, 본질적으로 나는 사념의 파편. 그런 힘을 전해줄 능력도 없거니와, 전해줄 이유도 없다.]
“그럼…… 여기 왜 있으신 건데요?”
[기름진 고기를 먹여주는 것만이 선대의 의무는 아니지.]
“고기를 구하는 법을 알려주시려는 겁니까?”
[제법 이해가 빠르군. 맞다. 나는 그대가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이 시련을 만든 것이다. 알다시피 태양의 사제는 그 자체로도 강력하지. 하지만…….]
패트릭이 두 손을 활짝 펼쳤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고, 신성력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일련의 과정이 끝난 뒤, 그의 눈앞에는 세 개의 물건이 두둥실 떠올라있었다.
각각 반지와 한 벌의 옷, 그리고 현재 패트릭이 차고 있는 검의 모양을 지닌 물건들.
그것들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사로잡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선사했다.
[태양의 사제가 진정 무서운 점은, 선대에서 후대로 계승되는 힘 때문이다.]
“……!”
카이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선대에서 후대로…… 힘이 계승된다고?’
그 말은, 1대와 2대를 비롯해 태양교 역사상 최강의 성기사라고 불리던 패트릭의 힘까지 자신의 손안에 넣을 수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잔뜩 흥분한 탓인지 카이의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해졌다.
“대체…… 태양의 사제는 어떤 존재입니까?”
[좋은 질문이다. 태양의 사제란 구원의 상징. 절대 평화로울 때 나타나는 존재가 아니지. 우리가 나타난다는 건 머지않아 어둠이 도래한다는 전조이다. 그대가 지금 같은 시기에 사도가 된 것도 우연은 아닐 터. 하지만…….]
패트릭이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지금 그대의 힘은 너무나도 미약하구나. 부디 한시라도 빨리 강해져서 어둠에 맞설 힘을 길러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카이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숙였다.
패트릭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런 물건을 보여주지는 않았을 터.
아니나 다를까, 세 개의 물건이 차례대로 두둥실 떠올랐다.
[성환(聖環) 페트라, 성검(聖劍) 프리우스, 그리고 성의(聖衣) 니케.]
‘레어 등급일까? 아니면 유니크? 아니, 그 정도가 아니야.’
물건들은 신성력으로 모양만 흉내 냈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의 영혼을 사로잡을 것 같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저런 물건들의 가치가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될 리는 없을 터.
‘최소 레전더리 등급의 아이템이겠지.’
상상을 뛰어넘는 스케일에 카이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서, 설마 하녹스의 시련 보상이 저것 중 하나를 주는 건가!’
김칫국을 한 사발 시원하게 들이마신 카이는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입술을 핥았다.
[그대도 눈치를 챈 것 같으니 쉽게 설명하겠네. 그대는 지금부터 이 물건들을 찾아야 한다. 선대, 우리가 남긴 힘을 계승하기 위해서 말이지.]
“잠시만요. 하나는 여기서 보관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카이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묻자, 패트릭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안 봤는데, 제법 욕심이 과하군. 이 물건들은 하나라도 어둠의 군세에 넘어가면 끔찍한 악몽을 불러일으킬 교단의 성물들. 당연히 확실하게 검증된 이들에게 맡겨놓은 상태다.]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이들이라면…… 혹시 태양교의 본단에 보관되어 있습니까?”
[……안타깝지만, 그건 아니다.]
패트릭이 슬픈 음성으로 대꾸했다.
[나도 같은 신을 모시는 형제들을 믿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하지만 갈대처럼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을 믿는 것은 너무 안일한 처사라고 판단했지.]
“……그럼 어디에?”
카이가 살짝 불안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
그 물건들이 그 장소에 그대로 있다는 보장조차 없었으니까.
그런 카이의 불안이 얼굴 위에 떠올랐고, 패트릭은 카이를 안심시켰다.
[아, 물론 성물들은 안전하게 보관되고 있을 것이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10년이면 강산도 바뀌는 시간인데…… 벌써 수백 년이나 흘렀습니다만?”
[상관없네. 왜냐하면 수백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존재들에게 맡겨놓았기 때문이지.]
“……?”
[성물들은 각각 숲의 감시자와 바다의 보호자. 그리고 땅의 수호자에게 맡겨놓았다.]
“……맙소사.”
카이의 입에서 절망이 뒤섞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게임, 제대로 꼬였잖아.’
머리가 어지러워진 카이는 찌푸려진 미간을 꾹꾹 눌렀다.
순식간에 3주 정도는 늙어 보이는 얼굴!
그가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숲의 감시자라면 하나밖에 없잖아.’
바로 판타지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주역.
엘프가 바로 그 주인공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카이를 절망적으로 만들었다.
‘엘프의 숲이 있는 곳 레벨 제한이…… 몇이더라?’
자신의 기억이 온전하다면, 엘프의 숲 근처에 나타나는 몬스터들은 레벨이 최소 200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게임이 오픈된 지 이제 겨우 5개월 차인 현시점에서, 엘프의 숲은커녕 그 근처에 다가간 유저조차 없었다.
“후우. 뭐, 좋습니다. 엘프는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두 종족은 대체 뭡니까?”
[머메이드와 드워프들이다. 세 종족 모두 기본적인 수명이 천 년은 가는 존재들이지.]
“끄응.”
엘프 하나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드워프와 머메이드란다.
물론 몇몇 드워프 같은 경우는 제국의 공방에서 일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어본 적은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성물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
결국 그들이 기거하는 왕국으로 가야 할 터.
당연한 말이지만, 그 왕국이 어디 붙어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카이는 그에 대해서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뭐, 그건 패트릭이 가르쳐주겠지.’
카이는 얌전히 입을 다문 채 이어질 패트릭의 설명을 기다렸다.
[…….]
“…….”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던 두 사람 사이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결국 참다못한 카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설명 더 안 해주십니까?”
[음? 설명은 이미 다 해줬다만…… 혹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라도 있었나?]
“……!?”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커녕, 이해를 할 부분조차 찾을 수 없었건만!
“아니, 그…… 물론 엘프야 엘프의 숲에 있겠죠. 그런데 머메이드와 드워프는 어디에 사는지 모르겠는데요?”
[머메이드는 해저왕국인 아쿠아베라에 살고 있고, 드워프는 지하도시인 잉가르트에 살고 있네. 다만 머메이드의 왕국은 24시간 이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한 장소를 찍어주는 것이 불가능하지.]
“그럼 잉가르트는요?”
[드워프들은 조심성이 굉장이 많은 존재들일세. 그 때문인지 5백 년에 한 번씩 본인들의 왕국을 다른 곳에 새로 만든다고 알고 있네.]
“……그러니까 지금 드워프와 머메이드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계신다는 말이죠?”
[정확하네.]
“진심?”
[진심이네.]
“…….”
할 말을 잃은 카이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속에서부터 서서히 뻗쳐오는 활화산 같은 분노!
심호흡으로 겨우 심신을 안정시킨 카이는 다시 질문했다.
“그래도 그들을 찾을 방법 정도는 있겠죠?”
[으음. 이종족들은 기본적으로 인간들을 배척하지만, 서로 간의 교류는 열심히 하고 있다고 들었네. 그러니 엘프의 숲에 가서 물어보는 게 어떤가?]
부패한 공무원처럼 모르쇠로 일관하는 패트릭!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한 마디로 지금 당장 강해지기는 글렀다는 소리다.
‘괜히 좋아했네.’
물론 아쉬움은 남았지만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확실히 저런 아이템들을 초반부터 퍼주면 게임의 밸런스가 산으로 갈 것이 분명했으니까.
“알겠습니다. 아무튼 시간이 걸리더라도 세 개의 성물은 제가 꼭 모아볼게요.”
[좋은 자세일세.]
“그런데 저 세 개의 성물을 모두 모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걸세.]
”그렇군요.“
대화가 끝나자 카이는 패트릭을 가만히 응시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가?]
“……아니, 그럼 이제 하실 말씀 다 끝나신 거 맞죠?”
[맞네.]
“혹시 까먹고 뭐 안 주신 거 없나요?”
[없네.]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그럼 잠시만 시간을 주게.]
잠시 턱을 어루만지며 뭔가를 골몰히 생각하던 패트릭이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없군.]
“……그럼 저 가볼게요.”
[그대가 걷는 길에 빛이 있기를 기도하지.]
웅장한 목소리로 기도를 올린 패트릭의 몸이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패트릭.
카이는 그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도 성불하셔서 좋은 곳 가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고맙네.]
광휘로 물들었던 방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 카이는 열린 상자 안쪽을 쳐다봤다.
“……진짜 개털이네.”
마치 과자 봉지처럼 과대 포장이 되어 있는 찬란한 상자!
게다가 카이의 퀘스트는 여전히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이유는 하녹스의 시련을 정상적으로 클리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앞선 방에 있던 기사들을 언젠가는 모두 잡아야 한다는 소리.
“나중에 여길 또 와야 한다는 소리네.”
고생만 실컷 하고 건진 건 없는 카이는 우울한 걸음걸이로 던전을 나섰다.
***
돌아온 글렌데일에서는 토벌대의 모집이 한창이었다.
토벌대에 관한 정보가 입소문을 탔는지, 광장에는 토벌대에 참가하려는 유저들로 붐볐다.
물론 카이는 광장에서 토벌대 가입 신청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오오, 어서 오게나!”
아르센 남작의 저택으로 향하자, 그는 지난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반갑게 카이를 맞이했다.
“허허허. 우리 글렌데일의 성자께서 직접 방문을 해주니 영광이로군.”
“그, 그렇게 부르시면 부끄럽습니다만…….”
“자네를 놀리고 있는 건데, 몰랐나?”
껄껄 웃는 아르센 남작은 카이를 귀빈처럼 취급해 줬다.
그의 눈빛에서는 카이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는 감정이 연신 흘러나왔다.
왜 안 그렇겠는가, 카이는 자신이 다스리는 도시의 실종된 주민들을 되찾아 왔을 뿐만 아니라, 근처에 도사리던 위험한 보스 몬스터까지 처치해준 사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딸이라도 소개시켜 주고 싶은 기분이야. 아쉽게도 딸이 없어서 문제네. 껄껄.”
“저도 아쉽네요. 훤칠한 남작님을 닮으셨다면 따님도 분명 아름다우셨을 텐데!”
“크흐흠! 맞네. 사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내가 젊어서부터 인기가 좀 많긴 했네.”
외모, 능력, 그리고 가족 칭찬!
사람이 절대 싫어하지 않는 세 가지였다.
적당히 분위기를 띄운 카이가 슬쩍 말을 꺼냈다.
“오면서 보니 도시가 아주 떠들썩하던데요.”
“토벌대 모집을 하고 있으니 말일세. 자네 같은 모험가가 많이 지원해야 하는데 말이야.”
“저 같은 사람은 찾기 힘드실 텐데요.”
“뭐라고? 하하하! 이 친구, 농담도 할 줄 아는군!”
[아르센 남작의 호감도가 3 상승했습니다.]
카이가 진한 미소를 지었다.
NPC를 상대할 때는 재깍재깍 대답하는 것은 물론이요, 아부와 함께 가끔씩 이렇게 농담도 던져줘야 좋아하는 법!
‘후후. 양로원 어르신들을 상대하는 기분이네.’
어려서부터 여러 봉사 활동에 참여했던 카이!
그 때문인지 그는 화술은 물론, 상대방에게 점수를 따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줄 선물이 있었네.”
“……선물이라뇨?”
카이가 눈을 깜빡였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에 나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아르센 남작은 오히려 당연하지 않냐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 남의 일에는 그렇게 관심이 많으면서 자신의 일은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자네는 이미 영지민들에게 성자로 추앙받는 판국일세. 그런 인물을 섭섭하게 대하면 내가 욕을 먹지.”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인 남작은 서랍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