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21화 (21/441)

# 21

힐통령 021화

11장. 글렌데일(1)

“보인다!”

점심 무렵이 지나서야 도착한 봉우리 아래로는 회색의 성벽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세련된 성벽은 척 보기에도 문명의 느낌을 주고 있었다.

‘저곳이 글렌데일.’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겨우 억누른 카이는 곧장 산을 내려가 성문 앞으로 다가갔다.

역시 도시인지라 입장하려는 사람들이 붐볐기에 카이는 줄을 서야 했다.

‘대부분은 NPC인데, 역시 플레이어의 숫자도 적지는 않네.’

그만큼 50레벨을 넘긴 플레이어의 수가 많다는 뜻이리라.

카이는 자신의 차례가 오자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성문 경비병에게 다가갔다.

“이름.”

“카이입니다.”

“음, 통과.”

“…….”

그야말로 안 하느니만 못한 검문!

허무할 정도로 시시한 검문이 끝났고, 카이는 다소 맥이 빠진 표정으로 성내로 들어왔다.

하지만 도시의 거리로 들어온 순간, 죽어 있던 카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오오…….”

현대의 아스팔트 도로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잘 조각된 돌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촘촘히 박혀있는 길거리에는 하수 시설까지 완벽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비가 좀 많이 온다 싶으면 바닥이 흙탕물이 되어 무조건 장화를 신어야 했던 프리카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 이것이 도시의 문명…….”

현실에서는 서울에서 살고 있는 카이지만 게임에서만큼은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촌놈!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카이는 도로를 가득 메운 인파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우선 아르센 남작을 만나봐야 하는데.’

분터는 자신의 추천장을 사용하면 그와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카이는 그 사실 하나만을 믿고 며칠 동안 글렌데일을 향해 걸어왔다.

이제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차례였다.

“영주의 저택이 분명…….”

도시의 안내판을 보고 지도를 갱신한 카이가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길을 걷자니 길거리의 노점상에서 풍겨오는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했다.

무엇에 홀린 듯 노점상으로 다가간 카이는 음식을 구매해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맛있어…….”

프리카에서는 맛볼 수 없던 기가 막힌 닭꼬치나 설탕에 절인 파인애플!

특히 파이어 마법으로 즉석에서 구워주는 돼지고기 수육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크으, 역시 미드 온라인이다. 세계적으로 비만 비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는데, 그 말이 사실일지도.”

게임에서는 값싼 가격에 이렇게 실컷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

그야말로 혀가 행복해서 춤을 춘다는 기분.

한바탕 포식을 마친 카이는 아르센 남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었다.

언덕을 올라오느라 가빠진 숨을 정리한 카이는 슬쩍 뒤를 쳐다봤다.

정갈하면서도 깔끔한 건물들이 특징인 글렌데일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멋있는 도시야.”

그런 도시를 다스리는 자가 위치한 저택의 모습도 예사롭지는 않았다.

2층 높이의 백색 저택은 마치 미국의 백악관을 떠올리게 했다.

‘건물을 보고 위압감이라는 걸 느끼게 될 줄이야.’

현대의 초고층 빌딩들이 주는 거대함과는 느낌이 또 달랐다.

예술적이면서도 화려한 저택은 마치 그림 동화에나 나올 법했다.

저택이 놓인 정원 밖으로는 2미터 높이의 울타리가 쳐져 있었는데, 그곳의 정문에는 두 명의 병사가 경비를 서고 있었다.

카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채앵!

“정지. 소속과 정체를 밝혀라.”

“정지. 소속과 정체를 밝혀라.”

두 병사가 카이를 막아섰다.

그들이 뱉어내는 목소리에는 자신의 힘에 대한 자신감과 소속에 대한 자긍심이 듬뿍 묻어 나왔다.

“아르센 남작님을 뵈러 왔습니다.”

“흐음?”

병사 하나가 카이의 전신을 훑으며 대꾸했다.

“모험가인가?”

“예.”

“남작님은 바쁘신 분이다. 뵙고 싶다고 아무나 만나주시는 분이 아니지.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라.”

귀족을 한 번 만나보고자 했던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이와 같은 상황을 겪어봤을 것이다.

‘보통은 여기서 포기를 하겠지.’

하지만 카이는 달랐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추천장을 꺼내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병사가 그에 대해 관심을 표했다.

“이게 뭐지?”

“프리카 마을의 촌장께서 주신 추천장입니다. 이것이라면 아르센 남작님을 뵐 수 있다고 하시던데요?”

물론 카이도 확신은 없었다.

어쩌면 아르센 남작은 분터 촌장을 까맣게 잊어버렸을 수도 있으니까.

추천장을 자세히 살펴보던 병사들이 대화를 나눴다.

“흠. 프리카 마을이라면 분명 닷새거리에 있는 마을인데…….”

“집사님에게 한 번 여쭤봐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다녀오지.”

5분 정도가 흐르자, 병사가 집사 복을 입고 있는 노신사 한 명과 함께 돌아왔다.

“이 모험가입니다, 집사님.”

“흐음. 분터 촌장의 추천이라. 그가 누군가를 추천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잠시 턱수염을 어루만지던 노신사는 카이를 훑어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잠깐, 칠흑의 방어구를 입은 모험가라면…… 혹시 일전에 프리카 마을의 위험이라 불린 웜 리자드를 혼자서 해치운 모험가 카이 님 아니십니까?”

“호오, 웜 리자드를 혼자서요?”

“그럼 프리카 마을의 영웅이라 불리던 모험가가…….”

카이를 바라보는 병사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어중이떠중이인 줄 알았던 모험가가 생각보다 대단한 탓이었다.

물론 카이가 웜 리자드를 혼자서 처치한 것은 운이 좋아서였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전 세계 5억 명이 넘는 플레이어 중에서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니까.

“천운이 따라서 웜 리자드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겸손하기까지 하군요! 우선 안쪽으로 들어오시지요.”

자신의 인상이 어떠한지에 대한 판단은 결국 듣는 이가 하는 법!

카이의 말을 겸손으로 받아들인 집사는 카이를 저택 내부로 안내했다.

끼이이익.

집사와 함께 들어선 저택의 내부는 카이의 기대대로 고급스러웠다.

하나같이 값비싸 보이는 예술품과 그림들이 복도를 장식하고 있었고, 바닥에 깔린 융단은 구름을 밟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남작은 귀족 중에서도 제일 낮은 위치 아니었나?’

카이는 적잖게 당황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귀족이란 이들의 위치는 그저 영지를 가진 NPC.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생각을 좀 수정해야겠는데.’

귀족 중에서 가장 품계가 낮은 남작의 저택이 상상 이상으로 화려하다.

때문에 카이는 기존에 생각하던 귀족의 가치를 조금 더 상향 조정했다.

‘이래서 NPC와의 친분이 중요하다는 거구나.’

미드 온라인에 대한 공략이 올라오는 커뮤니티에는 게시판만 수백 개가 넘는다.

게시판 별로 올라오는 공략 글의 방향과 방법은 제각각이다.

하지만 단 하나, 공략 글을 쓰는 모든 이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NPC들과 친하게 지내라는 것!

‘이유가 있었어.’

만약 분터가 자신에게 말을 걸 때, 그를 무시하고 사냥을 떠났다면?

웜 리자드 퇴치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글렌데일의 영주와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건…… 그래. 마치 나비효과 같아.’

나비의 자그마한 날갯짓 한 번이 지구 반대편에선 폭풍을 일으킨다는 미신.

NPC들과의 친분은 마치 나비효과 같았다.

자그마한 일이 끊임없는 연쇄작용을 일으키며 더 큰 보상과 퀘스트가 되어 돌아온다.

그 사실을 피부로 느낀 카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집사의 뒤를 따랐다.

응접실로 안내된 카이는 잠시 기다리라는 집사의 말에 소파에 앉았다.

‘우선 정리를 좀 해보자.’

아르센 남작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얻어내야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퀘스트였다.

그것도 일반 유저들은 쉽게 획득할 수 없는, 아르센 남작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 진귀한 퀘스트다.

‘두 번째는 역시 던전이겠지.’

던전.

RPG 게임의 꽃은 레이드와 던전이라는 말이 있다.

카이는 놀의 무덤을 공략하면서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레이드는 아직 경험을 못 해봐서 뭐라고 말은 못 하겠지만…….’

놀의 무덤을 클리어하고 얻은 경험치와 골드, 아이템이 떠올랐다.

‘왜 던전에 대한 정보가 비싼 값에 거래되는지 알 수 있었지.’

던전의 자세한 위치가 표시된 지도는 부르는 것이 값이었고, 던전의 위치에 대한 힌트조차 돈으로 거래가 되는 세상이다.

‘그러니 던전에 대한 정보는 조그마한 것이라도 건질 수 있으면 대박이야.’

직접 공략을 할 수도 있고,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아도 비싼 값에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집사가 다시 나타났다.

“남작님이 부르십니다.”

그를 따라 복도와 계단을 걸어 4층으로 올라갔다.

복도의 끝에 있는 방에 다다르자, 무장한 기사 두 명이 입구를 굳게 지키고 있었다.

저택의 입구를 지키던 이들과는 존재감부터가 남다른 기사들!

그들을 마주한 카이는 본능적으로 방문을 쳐다봤다.

‘이곳이다.’

이곳이 바로 글렌데일을 통치하고 있는 영주, 아르센의 집무실이다.

그 사실이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똑똑.

“영주님. 말씀드린 모험가입니다.”

“들여보내게.”

집사가 문을 열어주자, 카이는 짤막한 눈인사를 남기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기품 있는 목재 가구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집무실.

그곳의 책상에는 한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생각보다 평범하게 생기셨네.’

보통 귀족의 이미지라고 하면 차갑고 근엄한 사람 아니면 살 찐 돼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아르센 남작은 귀족보다는 상인으로 느껴질 만큼 푸근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가 카이인가?”

“예, 예!”

카이가 훈련병마냥 바짝 기합이 들어 있자, 아르센 남작이 허허 웃으며 다가왔다.

“너무 얼어 있군. 긴장하지 말게나. 비록 내가 다스리는 마을은 아니지만, 프리카 마을을 도와준 영웅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뭘, 오히려 내가 더 고맙다네. 그렇지 않아도 프리카 마을에 대한 문제는 일찌감치 들었네. 웜 리자드 때문에 분터 촌장이 골머리를 썩고 있다고 하더군.”

“예, 아무래도 뛰어난 모험가들이 거주하는 마을은 아니니까요.”

“안타깝지만 사실이네. 사실 분터 촌장과는 어릴 적부터 안면이 있어서 도와주고 싶었지만…… 프리카 마을은 바덴 백작님의 영토에 소속된 땅이지. 함부로 사병을 파견하기에는 아무래도 눈치가 보여.”

“아, 그런 문제가 있었군요.”

“가슴이 답답하던 차에 모험가 한 명이 웜 리자드를 처치했다는 소식을 들었네. 개인적으로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었는데…….”

말끝을 흐린 아르센 남작이 카이를 쳐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하니 분터 촌장이 추천장을 써줬을 줄이야. 깜짝 선물이라도 받은 기분이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손님을 너무 세워뒀어. 우선 앉게.”

그는 마치 동네 아저씨처럼 허물없이 카이에게 소파를 권했다.

‘원래 귀족들이 이런가?’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 아르센 남작의 태도가 크게 다르자,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기색이 얼굴에도 드러난 것인지, 아르센 남작이 미소를 지었다.

“내 태도가 귀족스럽지 않다고 느껴지나 보군.”

“그, 그런 건 아닙니다만.”

뜨끔한 카이가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으나, 아르센 남작은 도리어 껄껄 웃었다.

“하하! 자네 반응이 재미있군. 신경쓰지 말게, 사실이 그런 것을 어쩌겠는가.”

“하하…….”

카이가 멋쩍게 웃으며 덩달아 미소를 짓자, 아르센 남작이 편한 자세로 소파에 등을 묻었다.

“자, 그럼 피차 인사말은 나눈 것 같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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