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전초전 (1)
“세 마리밖에 없었나? 생각보다 수가 적은데.”
“정확히는 두 명입니다. 하나는 외부에서 접선을 시도하던 놈인데 현장에서 함께 붙잡게 되었지요.”
“그렇군.”
아크튜러스 가문 내부에서 일하는 사용인은 수백에 달한다. 배후가 황태자라면 열 명 이상은 심겨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시몬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현장에서 붙잡았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내통의 증거가 남았을 테니까.
“이것이 내통의 증좌입니다.”
일로스테가 검붉은 피로 물든 종이를 시몬에게 건넸다.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이상한 언어로 적혀 있었다.
시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생의 경험으로도 해독할 수 없는 언어였다.
“암호화된 건가?”
“네. 많이들 쓰는 방식입니다. 전서를 분실한다고 해도 큰 문제가 없도록 설계하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그것 자체가 신분 노출을 꺼린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암호화는 은근히 유지에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는 일이다. 주기적으로 기호를 바꿔 줘야 하고, 그것을 첩자들과 공유해야 하니까.
정체를 누구에게도 들키면 안 된다는 노력의 결과물인 것이다.
“한번 볼래?”
시몬이 암호화된 전서를 라니에리에게 건넸다. 잠시 내려다보던 라니에리도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모르겠군요. 굉장히 다양한 기호들이 쓰인 것 같습니다.”
“역시 이런 쪽의 전문가가 나서야 하나?”
“사본을 진 경에게 보냈으니 곧 소식이 있을 겁니다.”
“잘했다.”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보였다.
“블랙레이븐이 창설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 그래도 가능하면 이런 일을 다른 쪽에 부탁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명심하겠습니다. 주인님.”
“뭐라 하는 건 아니고, 좀 더 노력하라는 말이니 오해는 말고.”
“예.”
시몬은 암호화된 전서를 일로스테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면서 물었다.
“잡아들인 놈들 소속은?”
“하녀 한 명, 그리고 요리사 한 명입니다. 두 사람 모두 최근에 충원된 자들입니다.”
일로스테는 신입 요리사와 하녀가 납품된 식자재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외부 첩자와 내통하는 것을 감지하고 현장을 덮쳤다고 설명했다.
“재료를 납품하는 과정이라면 아크튜러스 상단 쪽에도 첩자들이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맞습니다. 추가로 조사 중이니 조만간 몇 놈 더 잡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추가로 일로스테는 놈들의 입을 열기가 매우 힘들다고 덧붙였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독약을 먹고 자결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으음, 사실 첩자를 잡아들이는 것보다 그 배후를 명확하게 밝히는 게 더 중요한데. 지금 어디에 있어?”
“조사를 위해 지하 감옥에 가둬 둔 상태입니다.”
가문의 지하 감옥은 본성에 있다. 전시에만 쓰이는 곳으로, 기사와 병사들만 있는 아주 살벌한 곳이다.
“어떻게 생긴 놈들인지 한번 구경하러 가야겠군. 이따 밤에 찾아가겠다. 내가 직접 심문할 테니 준비하도록.”
“예. 주인님.”
일로스테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시몬은 다리를 꼬며 턱을 괴었다.
‘안 봐도 알퐁스 쪽 첩자일 텐데 어떻게 하면 좋으려나.’
진짜 배후는 황태자겠지만, 표면적으로 그들이 개입했다는 증거를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시몬은 알퐁스 백작가에서 대신 첩자를 파견해, 그 정보를 황실과 공유하는 거라고 확신했다.
책사인 라니에리도 그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라니에리. 전에 알퐁스 백작가로 가는 길에 네가 했던 말 기억해? 놈들을 지도에서 지워 버리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
“기억합니다.”
“알데바란과 항구적인 동맹을 맺고 압박하자고 했던 거, 아직도 유효해?”
“그 이상의 방법은 없습니다. 영지전을 걸 명분도 없지 않습니까?”
첩자를 심어 놨다는 것이 밝혀지더라도 그것 자체로 전쟁을 벌일 수는 없다. 황실에서 개입할 것이 분명하고, 우리 쪽 피해도 생각해야 하니까.
바로 그때, 그럴듯한 계책 하나가 시몬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전쟁이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인지요.”
라니에리는 물론 케나드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대 오크 전쟁에서의 피해를 복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반면 시몬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여유를 보였다.
“우리가 하는 전쟁이 아니라 대리전을 하자는 거지. 황태자는 알퐁스 백작가를 대신하고, 우리는 알데바란을 대신해서 말이야.”
“둘 사이를 이간질하자는 말씀이시군요.”
“보통이라면 어렵겠지만 우리에겐 진 경이 있잖아? 선동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그럴듯한 사건만 하나 기획하면 그만이겠지.”
라니에리도 생각에 잠겼다. 시몬은 그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좋은 계책입니다. 가주님을 설득할 자신이 있습니다.”
“오,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대리전 양상이라면 일이 잘못되었을 때 우리의 피해가 그리 크진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게다가 킬스톤을 유랑하는 오크들을 이용하면 구실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와 생각이 비슷하군. 바로 작전에 돌입하도록.”
“예.”
그때 문이 열리고 이올린이 안으로 들어왔다. 견학이 재미있었는지 표정이 밝다.
“이올린. 어땠어? 견학 소감은.”
“아주 좋았어요. 이곳에서 며칠 머물렀으면 좋겠어요. 보고 싶은 책들도 많고요.”
“절대 안 돼.”
시몬은 뒤늦게 자신이 너무 칼같이 말했다는 것을 깨닫곤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라니에리 경이 많이 바쁘단다. 우리 가문을 위해 일해 주고 있는데 방해하면 곤란하겠지.”
“으응, 알았어요.”
“아가씨. 정원엔 나가 보셨습니까?”
“아니요?”
“정원이 있었어?”
시몬은 정말 몰라서 물었다. 라니에리는 주먹을 말아쥐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작게 텃밭처럼 가꾸는 곳이 있습니다. 마침 예쁘게 핀 꽃을 하나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 같이 나가실까요?”
“네에!”
“자, 이쪽으로. 공자님들도 같이 가시지요. 오늘 테마는 같이 재미있게 노는 것이니까요.”
친오빠들보다 더 가까이 붙어서 복도를 걷는 이올린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것이 여동생이 있는 오라버니들의 숙명인 건가?
라니에리가 분명히 선을 그었지만 남녀관계라는 것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건 시몬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좀 있으면 녀석도 사춘기가 올 텐데 걱정이네. 삐뚤어지지는 않을지…….”
“괜찮을 겁니다. 이올린은 착한 아이니까요. 그런데 정말 라니에리 경과 이어 주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저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런 바람둥이를 남편으로 둬 봐. 매일 밤 눈물을 훔치느라 세월 다 갈걸? 하아, 그 이야기는 됐고. 앞으로 네가 좀 신경 써 줘라.”
시몬은 케나드의 어깨를 다독이며 바람둥이 선생과 어린 제자의 뒤를 따랐다.
* * *
그날 밤, 시몬은 약속대로 본성의 지하 감옥을 찾았다.
본성의 경계는 삼엄했다.
곳곳에 커다란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투구로 얼굴을 가린 기사와 병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서 있었다.
사실 성 내부엔 아무것도 없다. 귀한 보물들은 대부분 저택에 보관되어 있으니까.
이들이 지키고 있는 것은 아크튜러스 가문의 명예와 전통이었다. 그래서 경계를 서는 기사들은 그 누구의 침입도 허락하지 않았다.
“소가주님을 뵙습니다. 근무 중 이상 무!”
“수고가 많군.”
기사들은 이미 시몬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곧 지하 감옥으로 이어지는 통로의 문이 열렸다.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지옥 같은 곳이군요. 달빛 하나 들어오지 않다니.”
라니에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곳이다. 갇히게 되면 평생 하늘을 볼 수 없게 된다.
거기에 퀴퀴한 냄새까지 코를 찔렀다. 위생적으로도 좋지 않은 곳이었다.
“조심해라. 괜히 끌려오지 않도록.”
“제가 여기에 갇힐 일이 있습니까?”
“혹시 모르지. 어딘가의 귀한 막내딸을 넘보다가 걸려서 잡혀 들어올지.”
“아니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냥 조심하라는 말이야.”
맨 끝 방에 위치한 고문실의 문이 열렸다. 역한 냄새가 풍겨 왔다. 세 명의 사람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 매달려 있었다.
일로스테가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어때, 좀 알아낸 건 있어?”
“전혀 입을 열지 않습니다. 훈련이 잘된 놈들 같습니다.”
“하긴, 우리 가문에 숨어들어 왔다면 시체가 되는 것 정도는 각오하고 왔겠지.”
시몬은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묶인 놈들이 잘 들을 수 있게.
그리고 한쪽에 놓인 장갑을 손에 끼었다.
테이블 위에는 각종 고문 도구가 마련되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것들이라, 라니에리는 슬쩍 보고는 눈을 돌려 버렸다.
시몬이 선택한 것은 장검이었다.
허공에 몇 번 휘둘러 본 그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첩자들 앞에 섰다.
“만나서 반갑군. 겁도 없이 우리 가문의 정보를 빼돌렸다면서?”
세 첩자들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전생에서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많이 봐 왔다. 입을 열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시몬은 좀 과격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라니에리. 잠시 나가 있어라.”
“지켜보겠습니다.”
“괜찮겠어? 피 좀 튀는 걸로 안 끝날 텐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씨익 웃은 시몬은 검을 빙글 휘둘렀다.
“보다시피 내가 좀 참을성이 없어서 말이지. 쪼잔하게 고문 도구로 너희들을 괴롭힐 생각은 없다. 짧고 굵게 갈 생각이니 선택 잘하도록.”
시몬이 뒤에 있던 일로스테를 검으로 가리켰다.
“우리 일로스테 경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지? 원래는 우리 가문을 엿 먹이려던 아주 나쁜 사람이었지.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그 공을 인정받아 요직을 꿰차고 있지. 나는 그런 사람이야. 죄를 지었더라도 한 번쯤은 회개할 기회를 준다고.”
시몬은 맨 오른쪽에 있는 남자에게 검을 겨눴다.
“내가 원하는 답을 하는 놈들은 살려 주겠다. 아크튜러스 가문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
검날이 목을 꿰뚫을 것 같이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시몬을 노려볼 뿐이다.
“누가 보냈나?”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린 공자의 치기 어린 발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대로 버티든, 밖에서의 도움을 기다리든 후일을 도모하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촤악!
검이 휘둘러지더니 목을 베었다. 분수처럼 피가 뿜어져 나오며 머리통이 바닥을 굴렀다.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남은 두 첩자들의 눈이 흔들렸다. 이대로는 시간을 끌 수 없다. 모조리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인생 참 허망하지? 평생을 고생하며 살았는데 이렇게 개죽음을 당하는 게 너무 순식간이니 말이야.”
발밑으로 굴러온 머리통을 한쪽으로 차 버린 시몬이 다음 첩자에게 검을 내밀었다. 이번엔 여자였다.
“누가 보냈나?”
같은 질문이 던져졌다.
처음과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눈빛을 읽은 시몬은 눈앞의 여자가 갈등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랬기에, 시몬은 검을 휘둘렀다.
서걱!
이번에도 여자의 머리가 잘려 바닥을 굴렀다. 피가 쏟아지며 여자의 몸이 허물어졌다.
마찬가지로 머리통을 툭 차 넣은 시몬이 마지막 남자에게 검을 내밀었다.
“누가 보냈나?”
마지막 질문이 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