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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자는 쉬고 싶다-119화 (119/120)

119화: 이올린의 소원 (2)

잠시 생각을 정리한 시몬은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잠깐. 이올린.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지금 라니에리의 집으로 가자고 한 거니?”

“네에. 라니에리 경의 저택, 한번 가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이올린.

그것은 분명 동경하는 사람에게 보이는 일종의 호감 같은 것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접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잘난 전생의 기억도 무용지물이었다.

시몬이 다시 말을 잇지 못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케나드가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요즘 이올린이 라니에리 경과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친해진 것 같네요.”

“무슨 공부?”

“못 들으셨습니까? 라니에리 경이 이올린에게 문학을 가르친다고 하던데요.”

듣지 못한 일이다.

자식에게 어떤 가정 교사를 붙일 것인지는 가주가 결정한다.

드뇌브 후작이 이야기하지 않은 건 그렇다 치는데, 라니에리가 말하지 않은 건 좀 충격이었다. 약간의 배신감도 들었다.

“아마 형님께서 너무 바쁘셔서 사소한 것들은 말씀하지 않으신 것 같네요. 라니에리 경도 요즘 많이 바빠 보였습니다.”

“괜히 무리해서 편들어 줄 것 없다.”

한숨을 내쉰 시몬이 옆에 있던 집사에게 손짓했다. 집사가 재빨리 달려왔다.

“라니에리는 퇴근했나?”

“예. 아까 저택으로 돌아가신다고 했습니다. 이따 저녁에 다시 나오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알았다.”

손을 휘휘 저은 시몬은 일단 마차에 올라탔다.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이상 라니에리의 저택에 가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소가주님. 어디로 모실까요?”

“베텔게우스 가문의 저택으로.”

“예. 편히 모시겠습니다.”

곧 아크튜러스의 자제들을 태운 마차가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시몬은 이올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이올린은 벌써부터 볼이 붉어져 있었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것 같은 표정.

이올린을 올해로 여덟 살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를 수는 있어도,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것엔 문제가 없는 나이였다.

시몬은 쑤셔 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이올린을 불렀다.

“오라버니가 하나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다. 왜 갑자기 라니에리의 집으로 가자고 한 거야?”

“그게요, 라니에리 경의 집에는 책이 엄청 많다고 들었어요.”

“아아.”

저택이 허름하고 좁긴 해도, 공간마다 책장이 비치되어 있고 책이 가득 꽂혀 있었다. 틈이 모자라 선반 위에 쌓인 책들도 많았다.

“그래도 그 정도의 책이라면 우리 저택에도 있지 않나?”

“어…….”

순진한 어린아이의 논리는 가볍게 막히고 말았다. 이올린이 머뭇머뭇하자, 시몬의 입에서 다시금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올린. 혹시 라니에리 경이 마음에 든 거냐?”

“……!”

두 손으로 입을 가릴 정도로 놀랐다. 딱히 부정하지는 않은 걸 보니 제대로 본 모양이다.

케나드는 이제야 상황을 이해한 것 같다.

환하게 웃는 걸 보니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

일반적인 경우라면 나쁘지 않다.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열 살 정도 차이가 나긴 해도, 그 정도의 나이 차는 주변에서 흉을 볼 정도의 차이는 아니었다. 특히 귀족가의 결혼이라면.

거기에 베텔게우스 가문은 아크튜러스의 오른팔과 다를 게 없으니 혼담이 오간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이올린은 아직 어리고, 아크튜러스 가문 내에서의 영향력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하지만 시몬은 절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베텔게우스 가문은 지금껏 아크튜러스 가문에 충성을 바쳐 온 곳이다. 역대 가주들은 모두 뛰어났고, 우리 가문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명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올린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격하게 공감했다. 어린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 다시금 증명되었다.

“하지만 라니에리 그놈은 나쁘다.”

“나, 나쁘지 않아요!”

이올린이 눈에 힘을 주며 외쳤다.

처음으로 오라버니에게 반항하는 순간이었다. 시몬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사춘기가 오기에는 아직 이르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며 시몬이 조금 경직되었던 어투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이올린. 사람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란다. 나쁜 남자라는 의미지.”

“나쁜 남자요? 뭐가 다른가요?”

“라니에리가 사교계에서 어떻게 불리는지 들어 본 적이 있니?”

“들어 본 적 없어요.”

“그럼 이 오라버니가 오늘 제대로 알려 주지. 라니에리의 별명은 밤의 제왕이다.”

“밤의…… 제왕?”

여덟 살, 순진한 어린 소녀에게는 도통 이해되지 않는 함축적인 말이었다. 시몬은 이걸 어떻게 풀어서 전달해야 할지 고민했다.

“밤마다 데이트 상대를 바꾼다는 이야기다. 수많은 여인의 마음을 홀리고 정작 자기는 마음을 주지 않는 아주 나쁜 남자지. 사람은 좋지만 남자로서는 나쁘다는 말이다.”

“아…….”

아이가 받아들이기엔 조금 과한 말이었다. 하지만 시몬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시몬은 이올린이 실망하며 시무룩해할 줄 알았다.

그래야 했다.

그런데, 이올린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건데?”

“오라버니의 가장 친한 친구니까요.”

문득 시몬은 지금까지 이올린을 너무 어리게만 생각한 게 아닌가 싶었다.

여덟 살.

어리다면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이올린은 지금껏 눈치를 보며 살아왔다. 헤라 부인과 열병을 앓기 전의 자신에게 말이다.

지식과 지혜도 충분했다. 얼핏 듣기로는 황립 아카데미에 진학해도 문제없는 수준이라고 했다.

‘흘러가는 봄바람 같은 마음은 아니라는 건가.’

시몬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는 케나드의 허리를 쿡 찌르고 싶었다.

이올린이 말을 이었다.

“제가 책에서 읽었는데요. 사람의 취향은 바뀔 수 있는데, 그 근본은 바뀔 수 없다고 했어요. 라니에리 경은 올바르고 성실한 사람이에요. 오라버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음…… 그렇긴 하지.”

“그럼 됐어요.”

뭔가 말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몬은 마차가 베텔게우스 가문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소가주님!”

마차를 제일 먼저 맞은 것은 아크튜러스의 정예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로빈 대신 라니에리를 호위하는 중이었다.

“수고가 많군.”

“어쩐 일이십니까?”

혼자 왔다면 모를까, 케나드와 이올린까지 함께였다. 좀처럼 보기 힘든 조합임에는 분명하다.

“우리 귀여운 막내가 견학을 오고 싶다고 해서 말이지. 자네들도 알지 않나? 베텔게우스 가문의 서고는 세상의 모든 지식이 담겨 있는 곳이라는 소문 말이야.”

“알다마다요. 라니에리 님은 정말 현명한 분이시죠.”

“내가 왔다고 알려라.”

기사들이 분주히 움직였고, 잠시 후 노쇠한 집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몬이 알기로 베텔게우스 가문의 몇 안 되는 사용인 중 하나였다.

“공자님을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오랜만이군. 찰스.”

반가운 얼굴이었다.

베텔게우스 사람들은 모두가 보통이 아니다. 지혜가 풍부했고, 집사 찰스도 지혜로운 자에 속했다.

“가주께서는 연구를 위해 좀 멀리 나가셨습니다. 환대하지 못한 점 용서해 주십시오.”

“기별도 없이 찾아온 내 잘못이지. 라니에리는 안에 있는가?”

“누추한 곳입니다만,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단출한 저택이라 오래 걸을 것까진 없었다. 걸을 때마다 바닥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복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벽 곳곳에서 갈라진 틈이 보였다. 비가 새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 같아서는 싹 다 허물고 새것으로 지어 주고 싶었다.

“도련님. 시몬 공자님께서 오셨습니다. 오늘은 케나드 공자님과 이올린 아가씨도 함께 오셨군요.”

“음?”

책으로 가득한 서재에서 두꺼운 책을 읽고 있던 라니에리가 안경을 고쳐 쓰며 일어났다.

“아니, 어쩐 일로 다 같이 오셨습니까?”

“그러게 말이다.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인데.”

“예?”

라니에리는 당황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케나드와 이올린이 같이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뒤늦게 실례했다는 것을 깨달은 라니에리는 찰스에게 다과를 준비하라 명했다.

“오늘 이올린이 착한 일을 했거든. 그래서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로 했는데, 그 소원이 여기에 오는 거더라고.”

“저희 저택에요? 굳이 왜…….”

“그러게. 그것도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인데.”

시몬의 말에 묘하게 가시가 돋쳐 있는 것을 깨달은 라니에리는 당혹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원망스러운 눈빛은 덤이었다.

잠시 후 찰스가 다과를 내오자, 시몬이 그에게 청했다.

“이올린에게 저택 구경 좀 시켜 줄 수 있겠나? 유서 깊은 저택이니 내 동생에게 좋은 견학이 될 것 같은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가씨,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이올린이 나가자 시몬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너, 대체 내 동생에게 뭘 가르치고 있는 거냐?”

“교양 문학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고위 귀족이라면 알고 있어야 할 고전 명작들을 위주로 교습하고 있습니다.”

“왜 말 안 했어?”

“들은 체도 안 하시던데요?”

시몬은 속으로 움찔했다. 침대에서 딴생각을 하며 뒹굴 때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불리할 땐 화제를 전환해야 한다.

“쓸데없는 걸 읽히는 건 아니겠지?”

“그럴 시간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가주께서 부탁하신 일이라 거절하기가 좀 그랬습니다. 저도 일이 많아서 말이죠.”

설마 아버지가 나선 일인가?

시몬은 강한 의혹에 사로잡혔다. 그래도 해야 할 말은 했다.

“넌 똑똑한 놈이니까 대충 돌아가는 사정을 알았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동생은 절대 너에게 시집보낼 생각 없으니까 알아서 처신 잘해라.”

“이런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만.”

“조심스러우면 하지 마! 아끼는 친구의 목을 베고 싶진 않으니까.”

“……저는 외동입니다.”

그렇게 운을 뗀 라니에리의 표정은 정말 억울해 보였다.

“그리고 공자님과는 어려서부터 친구처럼 지냈죠. 그래서 이올린 아가씨는 제 친동생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 그렇게 대하고 있고 말이죠.”

“그래서?”

“그 이상의 감정은 절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사실 라니에리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혹시라도 아버지나 어머니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시려거든 알아서 거절해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제 머릿속에 있는 유일한 연애 문제는 공자님의 경우뿐입니다.”

“그걸 왜 지금 말하고 그래?”

마침 케나드가 옆에 있었다. 시몬은 동생에게 눈치를 주며 못 들은 척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보다 이렇게 모두 같이 나오시니 보기 좋군요. 앞으로도 종종 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전에 이 저택 좀 어떻게 안 돼? 내가 하나 근사하게 지어 준다니까.”

“제가 나고 자란 곳입니다. 솔직히 공자님의 저택보다 저는 여기가 훨씬 좋습니다.”

“취향 참 특이하네.”

바로 그때, 밖에서 기사가 조심스레 고했다.

“소가주님. 일로스테 경이 뵙기를 청합니다.”

“들어오라고 해.”

조용히 들어온 일로스테가 고개를 숙이며 뜻밖의 말을 전했다.

“가문 저택에 숨어 있던 첩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였습니다. 주인님. 쥐새끼가 세 마리나 숨어 있더군요.”

시몬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드디어 사냥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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