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이올린의 소원 (1)
“이거 저희가 먹어도 되는 거예요?”
“안 될 게 뭐 있어?”
드비안느는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퀘벡 남작도 마찬가지.
드비안느는 아버지가 이 비약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안다.
재료도 귀한 것들이 들어갔다. 그래서 오히려 로이드 가문 사람들은 맛도 보지 못했다.
“먹으라니까?”
시몬은 어서 가져가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가주님이나 마님들께 먼저 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먹어.”
더는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드비안느와 퀘벡 남작은 단약을 집어 입에 넣었다. 싸르르한 향이 입 안과 목을 자극하며 배 안으로 사라졌다.
“어우, 쓰다.”
“몸에 좋은 건 원래 쓴 법이라며?”
시몬은 언젠가 드비안느가 잔소리처럼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드비안느는 귀엽게 혀를 내밀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이건 써도 너무 쓴데요?”
“아주 좋은 비약이다. 작정하고 만든 독은 막기 어렵겠지만, 웬만한 독은 이제 통하지 않을 거다. 면역이 생긴 셈이지.”
“와아. 이 약이 그렇게나 효과가 좋은 건가요?”
“너희 아버지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설마요.”
말은 그렇게 해도 드비안느는 시몬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가진 사람들이 더한다는 말이 있다.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권력을 쥔 사람도 마찬가지. 정점에 오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한때 시몬도 그런 사람이었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저돌적인 사람.
그런데 열병을 앓은 이후 그가 변하고 있었다. 자신이 보기엔 너무나도 긍정적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드비안느는 한때 마음에 품었던 이 남자가 더욱 멋있게 성장했으면 하고 바랐다.
소꿉친구의 마음으로.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퀘백 경.”
“오, 라니에리.”
라니에리가 정중히 인사했다. 퀘벡은 무척 반가운 표정으로 그의 팔을 다독였다.
“요즘 많이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공자님께 드릴 게 좀 있었네. 비약을 좀 만들었지.”
“그렇습니까.”
옆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시몬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씁쓸한 향이 나는 단약을 슥 내밀었다.
“먹어라. 로빈! 너도 들어와서 하나 먹어라.”
“예!”
라니에리와 로빈은 이게 대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단약을 삼켜야 했다.
“읍?”
정말 썼다.
모래를 씹어 삼키는 것보다 괴로웠다. 진한 녹물을 사발째 들이켜는 느낌이었다.
시시각각 표정이 굳어 가는 라니에리를 보며, 두 친구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사교계의 레이디들이 이 장면을 봤어야 하는데 말이지. 로빈을 보고 좀 배워라. 눈 하나 깜짝 안 하잖아?”
로빈은 사냥꾼의 후예답게 잘 참아 냈고, 단약을 삼키는 것에 성공했다.
라니에리는 테이블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래도 쓴맛이 가시지 않았다.
“대체 이 엄청나게 맛없는 약은 뭡니까?”
“독 저항력을 올려 주는 비약이다. 웬만한 독은 이제 너에게 영향을 주지 못할 거다.”
“혹시 전에 말씀하신 그 약입니까?”
“그래.”
단둘이 있을 때, 시몬은 지나가듯 말했다. 조만간 로이드 가문에서 그럴듯한 비약을 하나 만들어 올 거라고.
“이 귀한 걸 저희가 먹어도 되는지 모르겠군요.”
“이미 먹어 놓고 그런 말을 하면 쓰나?”
“가주님께 진상할 것은 남아 있습니까?”
시몬은 상자를 기울여 남은 비약을 보여 주었다. 딱 다섯 개가 남았다.
“부모님과 케나드, 그리고 이올린까지 먹이면 딱 맞지.”
“신선할 때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녀오마.”
시몬은 그길로 드뇌브 후작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런데 시종이 부재중이라는 말을 전했다.
“어디에 가셨지?”
“지하 연무장에서 수련 중이신 걸로 압니다.”
미온의 거처로 갔다고 했으면 가서 잔소리를 퍼부을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다.
시몬은 지하 연무장으로 들어가 한창 검을 휘두르고 있는 아버지 앞에 섰다.
쉬쉭! 쉭!
마치 검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드뇌브 후작은 새로운 검식의 살검 단계까지 마스터했다. 이제 그 너머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온 힘을 다해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아버지.”
시몬이 불렀으나, 드뇌브 후작은 검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이 순간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폭우가 퍼붓는 것처럼 공격을 쏘아 냈다.
지켜보던 시몬은 감탄했다.
‘무아지경인가. 아버지가 심검의 경지에 들어서는 건 시간문제겠군.’
예전 케나드는 오크와의 전쟁에서 우연히 그 경지에 들어섰다.
그리고 비약적인 성취를 거뒀다.
그런데 놀랍게도 드뇌브 후작은 무아지경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수련의 효율은 극대화될 것이다.
“……후우.”
그제야 드뇌브 후작이 시몬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 감시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간식을 좀 가져왔습니다.”
“간식?”
시몬이 정갈한 그릇에 담긴 단약을 내밀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드뇌브 후작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비약이군.”
“로이드 가문에서 진상한 것입니다. 만독불침까지는 아니지만 천독불침이라 할 만한 물건이지요.”
“천독불침이라.”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온 드뇌브 후작은 비약을 집어 단번에 입 안에 넣었다.
만약 평범한 귀족가였다면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터.
아들이 아버지를 독살하는 것은 너무나 흔한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드뇌브 후작은 시몬을 믿었다.
또한 그 누구보다도 아버지의 장수를 빌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으음. 제법 효과가 좋구나.”
드뇌브 후작은 고수답게 오러 연공으로 약효를 빠르게 흡수시켰다. 보통 약이 아니라는 것을 그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퀘벡 경이 뛰어나다는 건 나도 알고 있지만, 이 정도의 물건을 바로 만드는 건 불가능했을 텐데?”
“조금 힌트를 주었습니다.”
“기왕 알려 줄 거면 다 알려 주지 뭐 하러 간을 보느냐?”
“결과만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훌륭한 영주라면 과정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해야 하는 법이다.
“온 김에 대련이나 한판 하자꾸나. 새로운 검로를 익혔는데, 네놈이 그걸 잘 막아 낼 수 있나 한번 보고 싶군.”
“죄송합니다만 공무가 바쁘군요. 다음에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한가하게 돌아다니면서 뭐가 그리 바쁘다고?”
“아직 비약이 좀 남아서요. 대련 상대가 필요하시다면 케나드를 부르겠습니다.”
시몬이 철벽을 치자 드뇌브 후작은 혀를 찰 뿐 더는 몰아치지 못했다.
저러다가 후계자를 또 관두겠다고 하면 정말 골치 아파지는 거니까.
“다음엔 피하지 말거라.”
“아버지의 명예를 좀 더 지켜 드리고 싶군요.”
“건방진 놈!”
다시 저택으로 올라온 시몬은 헤라 부인과 미온 부인을 찾아 비약을 먹였다.
두 사람은 어떻게든 먹일 수 있었는데, 문제는 이올린이었다.
이올린은 약을 싫어했다.
“안 먹으면 안 돼요?”
아른아른한 눈으로 올려다보니 시몬은 마음이 급격히 약해졌다.
이올린이 약을 싫어하는 이유는 먹기 힘든 것도 있지만 친모인 미온 부인 때문이었다.
늘 약과 함께 살아야 했던 사람이었으니까.
딸의 입장에서 약은 어머니를 괴롭히는 아주 나쁜 존재였을 것이다.
“이건 나쁜 약이 아니야. 앞으로 이올린이 아프지 않게 해 주는 좋은 약이란다. 그러니까 잘 씹어 먹어야 한다.”
“으으…… 안 먹을래요!”
평소라면 오라버니의 말을 철석같이 따랐던 이올린이었으나 오늘따라 저항이 심하다.
어쩔 수 없이 시몬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타일렀다.
“아크튜러스의 소가주로서 약속하지. 이 약을 먹으면 네 소원을 하나 들어주마.”
“소원이요?”
“그래.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가만히 시몬을 올려다보던 이올린이 드디어 손을 내밀었다. 시몬은 나무 상자에서 단약을 꺼내 이올린의 손바닥에 내려놓았다.
“잘 씹어서 한 번에 삼켜야 한다?”
“……네!”
이올린이 용감하게 단약을 입에 넣었다.
싸르르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결국 닭똥 같은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그래도 뭔가 바라는 것이 있었는지, 약을 꾸역꾸역 씹어 목으로 넘겼다.
“흐아아아…….”
“잘했다.”
문득 육아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몬은 미리 준비한 주스를 이올린에게 먹였다. 이제야 쓴맛이 한결 가시는 느낌이었다.
“소원 말해도 돼요?”
시몬은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올린의 작은 손이 옷깃을 붙잡았다.
“말해 봐라.”
“저, 오라버니랑 놀러 가고 싶어요.”
시몬은 이게 뭔 소린가 싶었다.
“그게 소원이야?”
“네!”
“그건 아무 때나…….”
시몬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이올린과 놀았던 적이 언제인지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너무 무심했군.’
정말 잠들 새도 없이 바빴다면 모를까. 솔직히 침대에서 늦장을 부릴 시간 정도는 있었다.
그 시간에 잠깐이라도 놀아 줬다면 어땠을까?
시몬은 엉거주춤 앉아 이올린과 눈을 맞췄다.
“좋아. 이 오라버니가 제대로 놀아 주마. 단둘이 노는 것보다 케나드 오라버니도 같이 노는 게 더 좋지?”
“네!”
“잠깐 기다리고 있어.”
시몬은 나가면서 하녀에게 외출 준비를 지시했다. 곧 저택 앞에 근사한 마차가 준비되었다.
시몬은 시리우스 기사들이 훈련 중인 연무장을 찾았다.
케나드가 매의 눈으로 기사들을 감시하며 자세를 지도하고 있었다. 여전히 기사들은 검을 들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온몸에 흙먼지가 달라붙어 있어 기사인지 병사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다.
“케나드.”
케나드는 즉시 훈련 중지를 선언했다. 그리고 주먹으로 심장을 치더니 선창했다.
“소가주님께 충성을!”
“충!”
300명이나 되는 기사들이 고함을 질렀다. 시몬은 저 뜨거운 시선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다.
“이거 먹어라. 몸에 좋은 거야.”
“오, 감사합니다.”
케나드는 아무런 의문도 없이 비약을 입에 넣었다. 약간 인상이 찌푸려지긴 했지만, 이내 활짝 웃었다.
“정말 맛있군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맛있다고?”
“예. 좀 쌉쌀하긴 한데, 끝맛이 일품이군요!”
시몬은, 아끼는 동생이 더운 날 너무 무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좀 쉬엄쉬엄해라. 기사들도 좀 지쳐 보이는데. 더운데 무리하면 병난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아크튜러스의 기사들이라면 마땅히 견뎌 내야지요.”
“오늘 훈련 계획은?”
“해가 떨어질 때까지 기초 체력 훈련이 진행됩니다. 그 이후에 잠시 휴식하고, 바로 야간 훈련에 들어갑니다.”
“밥도 안 먹고?”
“특별 훈련 기간이라 배식은 철저히 제한됩니다.”
엄청난 훈련량이었다. 시몬은 자신이 저 안에 있지 않은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훈련은 좀 일찍 끝내는 게 어떠냐? 오랜만에 이올린을 데리고 외출할 생각인데, 너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명을 따릅니다.”
“내 명령이 아니다. 굳이 정정하자면 이올린의 명령이라고 할까.”
케나드는 보통이 아니었다.
즉시 로빈을 부르더니 훈련을 부탁했다. 잠시나마 희망을 품었던 시리우스 기사들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잠시 후, 시몬과 케나드, 그리고 이올린이 마차 앞에 섰다.
이올린은 벌써 신나 보였다.
“이올린. 어디 가고 싶어? 말만 해. 어디든 가 주마.”
“으응…….”
고민이 길어졌다.
시몬은 별생각 없었다. 그래 봐야 사람이 많고 신기한 것들이 많은 도심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이란 으레 그러니까.
“라니에리 경의 집!”
시몬은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어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