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제자가 된 아버지 (1)
오늘도 시몬은 서류 더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최근 라니에리에게 괜한 말을 한 대가는 컸다. ‘명장 제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서기관 칼림은 손뼉을 칠 정도로 감탄했다.
실로 가문을 빛낼 아이디어라며 시몬을 극찬하기에 이르렀다.
내심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시몬에겐 피할 방법이 없었다.
‘망할 늙은이 같으니.’
결국 ‘명장 제도’는 아크튜러스에서 이름 있는 행정가들 손으로 넘어갔다. 곧 그들이 잘 정리된 행정안을 들고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몬에게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명장 제도’를 통해 가장 먼저 수혜를 볼 사람이 바로 루아의 가족들이니까.
‘루아는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시몬은 잠시 펜을 멈추고 창가로 걸어갔다.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여니 시원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정원 너머 펼쳐진 연무장엔 오늘도 많은 기사들이 나와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시몬은 매일 봐 왔던 지루한 장면이었다.
‘그러고 보니 연인이 된 후로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군.’
조바심이 날 법도 하다.
하지만 시몬은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언제든 기다릴 수 있다는 사랑스러운 한마디가.
그래도 시몬은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징표라도 하나 나눠 가지면 좋겠는데.’
그의 명석한 두뇌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전생에서 아크튜러스의 가주로 평생을 살았다. 지금 보물 창고에 어떤 아티팩트가 보관되어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일전에 라니에리에게 백룡의 브로치를 달아 준 적이 있다.
딱 한 번이긴 하지만 치명적인 공격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줄 것이다.
‘그것과 비슷한 능력이 있는 거라면 좋을 것 같은데. 뭔가 서로 연결된 느낌이 들면서 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휴대하기 편해야 한다.
저절로 장신구로 범위가 좁혀졌다.
잠시 후 시몬은 적당한 아티팩트를 떠올려 냈다.
‘켈리서스의 인장.’
켈리서스의 인장은 과거 유명한 마법사였던 켈리서스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아티팩트다.
한 쌍으로 구성된 반지인데, 보석 하나 없이 은으로 만들어진 소박한 외양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 숨겨진 힘은 외양과는 달리 대단했다.
기본적으로 반지를 나눠 낀 상대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거기에 상대가 위기에 처하면 알려 주는 기능까지 들어 있다.
소중한 사람과 나눠 끼기에 이보다 적합한 물건은 없었다.
‘실제로 대마법사 켈리서스도 자신의 약혼자를 위해 그 반지를 만들었었지.’
시몬은 업무를 빨리 끝내고 아버지에게 보물 창고의 열쇠를 청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앞으로 그냥 열쇠는 내가 보관하겠다고 해 버릴까? 어차피 후계자니까 상관없겠지.’
지루하게 사방을 훑던 시몬의 시야가 한 구역에서 멈췄다.
바로 시리우스 소속 기사들이 훈련하는 곳이었다. 아직 애송이 티를 벗지 못한 젊은 기사들이 열심히 연무장을 구르고 있었다.
교관으로 나선 것은 케나드였다.
젊은 기사들은 시리우스에 들어온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했으나 교관 운까진 좋지 못했다.
케나드는 조금도 봐주는 것 없이 열심히 기사들을 굴렸다.
그것도 검을 휘두르는 거라면 그나마 나았을 거다.
힘들긴 해도 성취감이 느껴졌을 테니까.
하지만 그들에겐 목검을 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땡볕에서 연무장을 뛰고 구르는 것을 반복할 뿐이다.
양성소를 수료하고 드디어 기사가 되었다는 부푼 기대도 잠시, 그들은 지옥의 참맛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그래. 훈련은 저렇게 해야 제맛이지. 탈진해서 쓰러지는 재미도 있고 말이야.’
시몬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걸렸다. 어차피 나만 아니면 된다는 편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가하신가 보군요.”
라니에리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 두툼한 서류철이 들려 있는 것을 보곤 한숨부터 나왔다.
그런데 들려 있는 건 서류만이 아니었다.
정체불명의 종이봉투도 함께였다.
“한가하긴. 잠시 쉬고 있었다.”
“제가 드린 서류는 얼마나 처리하셨습니까?”
시몬이 저 자식 안 되겠네,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때는 더운 날씨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공자님. 쉬엄쉬엄하십시오. 건강이 나빠질까 염려되는군요. 라고 하는 거야. 넌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못 배웠냐? 황실 아카데미 수석도 별거 없군. 가서 드비안느에게 기초 교육부터 다시 받고 와.”
“저라서 이 정도로 끝나는 거지, 드비안느 양이라면 더한 말이 나오지 않을까요?”
“……그런가?”
묘하게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제가 아카데미 시절에 아주 인상 깊었던 수업이 하나 있었습니다. 오브리 교수님 수업이었는데,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직접 눈으로 관찰하지 않은 가설은 믿지 말라고요. 한번 불러서 확인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더워 죽겠는데 괜히 바쁜 사람 오라 가라 하지 마.”
“말씀이 많으신 걸 보니까 좀 찔리시나 봅니다. 확인 좀 하겠습니다.”
“이제 아예 대놓고 무시하는군.”
책상으로 돌아온 시몬은 마치 가정 교사에게 숙제를 검사받듯 결재한 서류를 라니에리에게 보여 주었다.
아카데미 수석의 냉철한 시선이 서류를 훑었다.
마치 세무 조사를 나온 고위 관료 같은 느낌이었다.
“솔직히 이 정도면 열심히 한 거 아닌가?”
“음, 그렇군요. 양을 보니 절반 정도 하셨군요. 거기에 재무 자료까지 검토하셨다니. 훌륭합니다. B학점을 드리죠.”
“A가 아니라 B라고?”
“저였으면 이미 모든 결재를 끝내고 여유롭게 홍차 한잔하고 있었을 겁니다.”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그래도 숙제는 열심히 하셨으니 상을 드리겠습니다.”
라니에리가 손에 든 종이 봉투를 건넸다. 시몬은 별 기대 안 하고 받았는데, 안에 빵이 들어 있었다.
“뭐야, 존슨 씨네 빵집에 다녀왔었어?”
“그 근처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잠깐 인사 좀 드리고 왔지요.”
시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루아는?”
“많이 바빠 보이셨습니다. 곧 직원을 한 명 더 뽑는다고 하더군요. 그건 아가씨께서 드리라고 전해 주신 겁니다. 직접 만드신 빵이라고 하더군요.”
시몬은 냉큼 빵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라니에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시몬은 대꾸도 하지 않고 빵을 음미했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크, 하는 탄성이 나왔다.
“점점 실력이 좋아지는군.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정도야.”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실 텐데요.”
“아아, 뭐 편지나 쪽지 같은 건 없었나?”
“말씀을 받아 전해드리겠다고 하니 이런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굳이 전할 건 없다고. 말이 필요 없는 사이라더군요.”
“오오.”
시몬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마터면 라니에리를 껴안을 뻔했다.
정신을 차린 시몬이 벌렸던 팔을 급히 회수했다.
잠시간의 정적.
벌레 보듯 눈을 게슴츠레 뜬 라니에리가 헛기침을 하곤 말을 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모른 척 물었더니, 당황하시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연인 사이가 되셨다고요. 그래서 축하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보면 볼수록 정말 괜찮은 분 같더군요. 순수하시기도 하고 말이죠.”
“뭐? 괜찮은 분? 감히 남작 따위가 대공자님의 부인이 될 분을 넘보는 거냐?”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취향은 아닙니다.”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시몬은 곧장 치유되었다. 루아가 보낸 빵을 씹으면서 말이다.
“아무튼, 공자님보다는 제가 밖으로 나갈 일이 자주 있을 테니 종종 안부 여쭙겠습니다.”
“지금부터 잘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중에 후작 부인이 되실 분인데.”
“그보다 드비안느에겐 언제 이야기하실 겁니까?”
시몬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릴 적 친구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말하는 쪽이 좋다. 이성 친구는 드비안느 하나뿐이었으니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헤라 부인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칫 말실수라도 해서 루아와의 관계가 헤라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파국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좀 나중으로 미루지. 어차피 중요한 일은 아니잖아?”
“알겠습니다. 저도 좀 조심하도록 하지요.”
“부탁한다.”
라니에리가 나가고, 시종이 들어왔다.
“가주님께서 준비가 끝났다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망할. 곧 가겠다고 전해 드려라.”
“예.”
잠시 서류를 덮은 시몬은 한옆에 걸린 ‘템페스트’를 꺼내 허리춤에 걸었다.
그러고는 저택 지하에 있는 비밀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한참을 내려가니 봉인된 문이 보였다.
아주 단단한 문이었다. 외부에서 충격을 줘도 부서질 것 같지 않았다.
시몬은 손을 뻗어 구체에 손을 올리고 오러를 주입했다.
쿠구구궁!
아크튜러스의 혈통이라는 것이 입증되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동굴 같은 공간 너머로 아주 넓은 연무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아크튜러스 가문의 가주, 드뇌브 후작이 서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선생 한번 모시기 힘들군.”
오늘은 드뇌브 후작이 아들에게 신식 검술을 전수받는 날이다.
그래서 직계 혈통만 사용할 수 있는 비밀 연무장에 오랜만에 내려온 것.
신식 검술 자체는 비밀로 할 필요는 없으나 아들에게 검을 배우는 것 자체가 남이 보기에 좀 그런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드뇌브 후작은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을 놓치고 말았다.
바로 배워야 하는 상대가 ‘시몬’이라는 것.
“준비는 좀 되셨습니까?”
“우습군. 네가 회귀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나는 아크튜러스의 가주다. 또 무엇을 준비한다는 말이냐?”
시몬은 씩 웃었다.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십니다.”
“무슨 자세?”
“배울 자세 말이죠. 아크튜러스의 새로운 검식은 아버지께서 익혔던 검술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케나드도 그래서 빨리 습득할 수 있었죠.”
“…….”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몬은 팔짱을 끼더니 거만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아직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셨군요. 시작하기 전에 확실히 하겠습니다. 지금부터는 부자 관계가 아닙니다. 저를 스승으로 대하십시오. 새로운 경지를 엿보고 싶으시다면 말입니다.”
“뭐라?”
“다시 말씀드려야 합니까? 지금부터는 저를 스승으로 대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검식 몇 번 보여 주고 심득을 알려 주면 되는 것을, 시몬은 배움의 자세부터 지적하고 들어왔다.
그제야 후작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차!’
시몬은 한결같이 가문을 잇지 않겠다고 말해 왔다. 하지만 소원을 이루지 못했고,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짜증을 부리는 일이 잦아 밑에 사람들이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하지만 그 대상에 자신이 들어가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오늘 제대로 걸렸구나!’
시몬은 이 기회에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악랄한 표정을 지을 리가 없다.
“우선 새로운 검술을 제대로 익힐 수 있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지요. 검술의 기본은 상체의 근력입니다. 일단 팔굽혀펴기 100회 실시합니다. 오러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뭐라? 뭘 하라고?”
“잘 보십시오.”
시몬은 직접 팔굽혀펴기를 해 보였다.
아주 모범적인 자세였다.
가뿐히 일어난 그는 바닥을 향해 손을 가리켰다.
“100회, 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