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조건부 승인 (1)
오늘도 아침부터 전쟁이 예고되었다. 아무리 불러도 시몬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큰 공자가 게으르다는 것에 대해 뒷말이 나올 법도 한 일.
그러나 이제는 소가주가 되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무어라 하지 못했다. 오히려 과한 업무에 몸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라니에리는 이마를 짚거나 뒷목을 잡아야 했다.
“공자님.”
시몬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보고해야 할 일도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어젯밤에 루아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한번 듣고 싶었다.
시몬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다시 사는 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문의 명예가 아니라 루아와 잘되는 것이라고.
물론, 회귀론을 믿게 된 드뇌브 후작과는 달리 아직 라니에리는 시몬의 회귀론을 믿어 주지 않았다.
그저 계시와 비슷한 긴 꿈을 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시몬의 진심을 외면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루아와 잘되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협력하고 싶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라니에리는 시몬을 덮고 있는 이불을 확 걷어 버렸다.
“……?”
이불을 들던 라니에리가 흠칫 놀랐다.
놀랍게도 시몬은 자고 있지 않았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눈을 뜨고 있었다.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잠시간의 정적이 찾아왔다.
“안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안 자도 안 졸려. 안 먹어도 배불러.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싶군. 세상을 다 가져 본 적은 없지만, 다 가진 기분을 알 것 같다.”
“잘되신 모양이군요.”
“완벽하지.”
시몬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한쪽에는 전속 하녀 제니가 준비한 세숫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시몬은 우아한 손짓을 강조하며 얼굴을 씻었다.
물기가 묻은 손을 조신하게 툭툭 털더니, 잘 말린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이대로라면 혼자 오페라를 공연할 것 같았다. 헛기침을 한 라니에리가 물었다.
“완벽하다고 하셨는데, 연인이 되신 겁니까?”
“그래.”
“감축드립니다. 공자님. 그런데 진도는 어디까지 빼신 겁니까?”
수건을 휙 던진 시몬이 돌아섰다. 음흉한 표정을 짓더니 라니에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삿대질하면서.
“너 같은 바람둥이들은 그게 문제야. 손은 잡아 봤냐, 키스는 했냐, 하룻밤을 보냈냐 하는 그런 육체적인 관계만 중요시하지.”
“손도 못 잡으셨군요.”
라니에리의 일침에 시몬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손을 안 잡아 본 것은 아니다. 예전 마이너 마을에서 밤길을 거닐 때 손을 잡아 보긴 했었다.
안경을 검지로 슥 밀어 올린 라니에리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공자님은 루아 아가씨를 지극히도 아끼시죠. 너무 조심하는 그 태도가 문제입니다. 어제야말로 관계의 극적인 전환을 노릴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이죠.”
“장소가 마땅치 않았어. 어머님이 언제 들어오실지도 몰랐고.”
“좋은 핑계군요. 몸을 누일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는 게 남녀 사이이고, 사랑이죠.”
“철학가 납셨네. 소설을 써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다.”
시몬은 손뼉을 쳐 제니를 불렀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니는 시몬의 명을 받아 다과를 준비했다.
그런데 제니는 머뭇거리며 돌아가지 않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저, 공자님.”
“왜?”
“말씀드리기 죄송합니다만, 드비안느 아가씨께서 도련님이 일어나시면 알려 달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시몬은 제니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보고가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제니는 현실 감각이 뛰어난 하녀라 줄을 설 줄 알았다.
“아직 주무시고 계신다고 전해라. 참, 부모님은 잘 지내고 계시지?”
“공자님 덕분에 이제 건강하세요. 가게도 잘되고 있구요.”
꾸벅 인사한 제니가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시몬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제 먹었던 칠면조 요리의 맛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시몬은 루아와 나눴던 이야기를 모두 라니에리에게 말해 주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라니에리는 이 내용을 전부 알고 있어야 한다.
단순히 조언자여서가 아니고, 서로 신분을 감추고 있는 공범이니까 말이다.
“그렇군요. 음, 잘하셨습니다. 평생 권모술수만 연마하신 공자님치고는 대응이 괜찮았군요.”
“권모술수하고는 좀 거리가 멀어지지 않았냐?”
“최근은 그렇지요. 하지만 열병을 앓기 전까지는 권모술수의 정점에 계셨던 분입니다. 케나드 공자님을 못살게 굴었던 것 잊으셨습니까?”
케나드 이야기만 나오면 할 말이 없어진다. 시몬은 혀를 찼다.
“아무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앞으로 루아를 더 신경 써야 한다. 너라면 알아서 잘하겠지만, 부탁하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두 분이 연인 사이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루아 양은 표정을 잘 감추지 못하는, 아주 순진한 분이시니까요.”
“그렇지. 순진한 사람이지. 너 사람 좀 볼 줄 아는구나?”
“문제는 연인이 되는 게 아닙니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라니에리는 지극히도 현실적인 문제를 말했다.
“어떻게 하면 아크튜러스 저택으로 들일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겠지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헤라 마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라니에리가 짚었다.
드뇌브 후작을 설득할 자신은 있었다. 미온 부인이라는 아주 좋은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헤라 부인은 다르다. 헤라는 미온 부인을 싫어했다. 출생 신분이 아크튜러스 가문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음, 내가 생각한 방법이 하나 있는데.”
“경청하겠습니다.”
“존슨 씨에게 작위를 주는 건 어때? 그냥 주는 건 좀 그렇고, 명장 제도를 도입하는 거야. 영지에 부를 가져다주고, 가문의 위상을 드높인 사람에게 포상 격으로 준남작위를 주는 거지.”
“신분 세탁을 하자는 말씀이군요.”
“세탁까진 아니잖아. 존슨 씨의 빵은 영지에서도 유명해지고 있으니.”
라니에리는 잠시 고민했다. 말도 안 되는 방법이라고 한다면 고민할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눈가림에 불과할 것 같군요. 가문과 가문이 맺어지는 것은 그 정통성에 기인합니다. 헤라 마님 입장에서는 존슨 씨의 가문을 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준남작이라는 인식도 그렇고 말이죠.”
“역시 그런가.”
“별개의 이야기지만 명장 제도는 한번 시행해 봐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대우해 준다면, 많은 기술자들이 우리 영지로 유입될 가능성이 큽니다. 세수는 물론이고, 자연스럽게 인구가 늘어나게 되겠지요.”
시몬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손을 휘휘 저으며 알아서 하라고 지시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서기관과 함께 의논해 보겠습니다. 소가주님께서 적극 추진하시려는 정책이라고 소개하면서 말이죠.”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상단에도 좀 이야기해 둬. 분점을 동시다발적으로 내서 명장 조건에 맞추게끔 하는 게 좋겠군.”
“알겠습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아크튜러스 가문에서 시몬의 거처를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단 두 명뿐이다. 바로 가주인 드뇌브 후작과 라니에리.
역시나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드뇌브 후작이었다. 로빈도 함께였다.
“이 시간에 일어나 있다니 놀랍군.”
“어서 오십시오. 아버지.”
시몬이 일어나 정중히 인사했다. 라니에리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보기 좋으냐? 아침부터 책사와 함께 국정을 논한다는 것이 말이다. 이제야 소가주다운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서 좋군.”
드뇌브 후작은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몬은 그 오해를 바로잡아 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일이 많아서 어쩔 수가 없군요. 그보다 선발 시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 막 끝내고 오는 길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300명을 뽑았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로빈이 300명의 인적 사항을 정리한 서류를 넘겼다. 아주 두꺼워서 하루 종일 봐야 할 것 같았다.
“원래는 네 청대로 선발만 하고 그만두려고 했지만, 궁금하더군. 앞으로 제3기사단을 어떻게 운영할 생각이더냐?”
“시리우스라고 불러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조직처럼 운영할 생각이로군.”
드뇌브 후작은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앞으로 가문을 이을 사람이 새로운 무력 조직을 만드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시몬이 나쁜 마음을 품고 역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실제로 대륙의 많은 귀족 가문에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보통은 가주가 죽어야 그 작위를 이어 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 세월을 기다리지 못해 부모에게 칼을 들이미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하지만 시몬은 다르다.
그는 한결같이 후계자가 되기를 싫어했다. 그래서 승계전까지 열렸다.
소가주로 책봉된 이후로도 시몬은 여러 방식으로 불만을 표하고 있다.
그래서 드뇌브 후작은 마음이 편했다.
“일단 300명을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3서클 오러 유저로 만들 생각입니다.”
“비약을 모조리 시리우스 쪽에 사용할 생각인 게냐?”
비약 생산량을 점차 늘린다는 이야기는 했었지만, 그것을 시리우스에서 먼저 사용하겠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1기사단과 2기사단은 이미 오러 유저들이 많습니다. 또한 그것 이상의 실전 경험을 갖추고 있지요. 이제 막 시작하는 시리우스는 다릅니다. 훈련은 많이 했지만 실전 경험은 부족하지요. 그것을 메우기 위한 일입니다.”
“으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만약 비약을 제1기사단과 2기사단에 먼저 사용하게 되면, 제3기사단격인 시리우스의 성장 속도는 그만큼 느려지게 된다.
전력을 빠르게 확장시키려면 시몬이 말한 대로 하는 게 맞다.
“좋다. 허락하지.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최소 3년은 잡아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생각보다 빠르군.”
3서클 오러 유저로 만들기 위해서는 비약이 최소 다섯 개가 필요하다. 투약 대상이 300명이라면, 최소 1500개의 비약이 필요한 셈.
시몬은 3년 내로 비약 1500개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보다 더 시간을 단축하는 게 목표입니다. 황실에서 어떤 전갈이 날아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내 생각도 너와 같구나. 알겠다. 앞으로 시리우스에 필요한 지원은 모두 하도록 하지.”
“한 가지 청이 더 있습니다. 아버지. 승계전에서 케나드가 사용한 검식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저는 지금보다 진보한 검식을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정리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쉽게 결정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기존의 검술을 대체할 만한 것을 보급하려면 준비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래서?”
“케나드를 시리우스의 교관으로 삼고 싶습니다. 시리우스 기사들에게 새로운 아크튜러스 검식의 격검 단계를 전수할 겁니다. 비약으로 오러를 늘리면서 새로운 검식을 익히게 하는 것이죠.”
드뇌브 후작은 새로운 검식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가주였다.
강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문 전체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도 그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 의견은 조건부 승인하지.”
“어떤 조건입니까?”
“새로운 검법을 새 기사단에만 전수한다면 기존 구성원들의 반발이 심할 거다. 케나드를 교관으로 삼는 것은 좋다. 대신 네가 제1기사단과 제2기사단에 새로운 검식을 전수하거라.”
과연 드뇌브 후작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