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잊을 수 없는 밤 (1)
찻집에서 나온 시몬은 다시 저택으로 복귀했다.
그가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수많은 사용인과 기사들이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진도를 빼라고?’
실로 의미심장한 한마디였다.
일 좀 하라며 잔소리하러 달려온 줄 알았는데 그런 조언을 할 줄이야. 시몬은 빈틈을 찔린 느낌이었다.
‘하긴, 애매한 관계가 좀 오래되기도 했지.’
승계전에서 최종 승리한 이후,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었다.
그전엔 대 오크 전쟁을 치르느라 연락을 하지 못했었다. 앞으로도 바쁜 일이 생기면 얼굴을 보지 못할 가능성이 커졌다.
모든 대륙의 사람들이 시몬을 아크튜러스의 적법한 후계자라고 알게 되었으니까.
황도로 불려 갈 수도 있고, 어느 왕국의 초대를 받아 먼 길을 떠날 수도 있는 상황.
편지를 보내는 건 의심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친모인 헤라가 여전히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라니에리는 관련 정보를 입수해서 시몬에게 알려 주기도 했다.
설령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편지를 주고받는다 해도,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비할 수는 없다.
‘라니에리의 말은 시의적절한 조언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시몬이 문을 열려고 했는데, 열려 있던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마법 장치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안에서 정리를 마친 드비안느가 퇴근을 위해 나오려던 참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마주쳤다.
“뭐예요?”
시몬은 잠시 고민했다. 방을 잘못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내 방 들어가겠다는데 허락이 필요한가?”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늦게 오실 분이 갑자기 오셔서 놀랐잖아요.”
“뭐예요라고 당당히 묻기에 내가 방을 잘못 찾은 줄 알았다.”
“어머, 실례.”
“네가 쓸데없이 입을 놀리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렇게 돌아올 일도 없었겠지.”
“잡혀 오셨군요?”
드비안느는 생글생글 웃었다. 너무나도 얄미워서 해고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권한이 아니었다.
한숨을 내쉰 시몬은 드비안느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를 보니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후계자의 무게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내 방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거야? 바로 퇴근한다고 하지 않았나?”
“정리 좀 했어요. 도련님 나가시고 나서도 서류가 계속 왔거든요. 나으리들하고 인사도 좀 하고, 서류 받는 김에 보기 좋게 정리해 놓았죠.”
“으음.”
확실히 분야별로 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재정, 군사, 행정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드비안느는 아카데미에 진학하지 않았지만 그에 준하는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아버지인 퀘벡이 가정 교사 노릇을 오래 했기 때문이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우리 도련님 일하시는 데 방해하면 안 되니까.”
“잠깐.”
돌아서려던 드비안느가 멈칫했다. 그리곤 얌전히 손을 모으고 시몬 앞에 섰다.
“네, 도련님.”
“…….”
“하실 말씀 있어서 부르신 거 아녜요? 왜 이렇게 뜸을 들이실까. 예전에도 이런 패턴이 있었던 것 같아요. 도련님이 사고를 쳤을 때였던 것 같은데.”
시몬은 이 질문을 해야 하나 고민하면서도, 딱히 털어놓을 곳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가문에서 라니에리만큼 입이 무거운 사람은 드비안느뿐이었으니까.
게다가 상담 대상은 여성이어야 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사교계에 흥미가 없다. 황녀를 제외하곤 딱히 연애해 본 상대도 없고.”
“그렇죠. 도련님은 권력에만 관심이 많으셨으니까요. 지금은 좀 이야기가 달라진 것 같지만.”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멘트가 뭐가 있지? 가령, 연인 사이가 될 때 하는 말 같은 것.”
드비안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드디어 도련님의 마음을 훔친 아가씨가 나타난 거군요?”
“아니. 그냥 심심해서 연애 소설을 좀 써 볼까 한다. 캐릭터 설정이 꽤 힘들더군.”
“도련님이 소설을 쓰신다고요? 와아, 이건 마치 라니에리 경이 검술 수련을 하겠다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처럼 들리네요.”
말이나 못 하면.
실로 완벽한 비유에 시몬은 할 말을 잃었다.
“도련님. 제가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도련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편이 좋아요. 얼굴에 다 티가 나거든요. 뭐, 저 정도 되는 사람이어야 알긴 하겠지만 말예요.”
시몬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물어보지 말걸, 하면서.
“어떤 사람이에요? 궁금하네요.”
“가상의 존재다. 대륙을 구하는 운명을 타고난 용사의 여인이지.”
“소설 아닌 거 다 안다니까요. 안 그래도 마님께서 의심하고 계셨는데 정말이었군요. 으음…… 이를 어쩐다.”
“지금 협박하는 거냐?”
“에이, 설마요. 제가 어떻게 도련님을 협박해요? 그래도 어린 시절 같이 보낸 친구잖아요.”
시몬은 문득 이질감을 느꼈다. ‘친구’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어릴 적에는 서로 친구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곤 했다. 하지만 그녀가 가문의 시녀로 들어온 이후,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쓴 적이 없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에서 친구라는 말이 나왔다.
왜 그 단어에서 이질감이 들었는지, 인생 2회 차인 시몬도 알지 못했다.
짝사랑하는 여인의 미묘한 감정을 알기엔 너무나 무던한 성격이었기에.
“솔직하게 말해 보세요. 그래야 제가 조언을 드리죠. 마님께는 이야기 안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시몬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루아에 대해 말했다. 이름과 출신, 거처는 알리지 않고 존재에 대해서만. 평민이라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드비안느의 눈이 반짝거렸다.
“역시 마음에 두신 분이 계셨군요? 엄청 아름다우신가 봐요. 황녀님과 파혼할 정도라면 그보다 아름다운 분이라는 건데…….”
누군지 도통 생각나지 않았다.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알려진 것은 메르세데스 황녀였으니까.
외딴 왕국의 귀족일까?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고 아프지?’
드비안느는 죄어 오는 감정을 억누르며 다른 생각에 골몰했다. 그래야 마음이 덜 아플 것 같았다.
“아무튼, 그건 중요한 건 아니고. 이제 슬슬 관계를 진척시켜 볼까 하는데 좋은 멘트 없나?”
“그 전에 하나 여쭤봐도 돼요?”
“뭔데.”
“라니에리 경에겐 물어보지 않으신 거예요? 멘트 쪽이면 걔가 전문일 텐데요. 굳이 저에게 물어보시는 건 리스크가 좀 있었을 것 같아서요.”
“사정이 있다.”
세련된 도시 남자. 라니에리는 은근히 뒤끝이 굉장했다. 진도를 빼라고 조언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고는 하지 않았다.
입 밖으로 꺼낸 말은 아니지만, 후계자로서 부지런히 영지 일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조언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라는 표정이었다.
그 부분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2회 차 인생이지만, 여인의 마음을 이렇게 능동적으로 얻기 위해 노력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젊은 시절엔 황녀와 어울렸고, 나이가 무르익었을 땐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여인들이 마음을 주었으니까.
그래서 적어도 루아의 일만큼은 처음 경험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놓칠 수 없는 인연이었기에 더욱 신중할 수밖에.
“음, 무슨 사정인지 대강 알 것 같네요. 라니에리 녀석도 참 그래요. 알려 주면 다 알려 줄 것이지, 꼭 그렇게 속 좁은 티를 낸다니까?”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이야기나 해 봐.”
“그분은 도련님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글쎄. 뭐라고 해야 하나. 서로 떨어져 있을 때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가끔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마음은 확실히 있는 것 같아.”
그리움.
그것은 드비안느가 품고 있는 마음과 닮아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매일 볼 수 있지만 그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기에.
지금은 그 마음의 색이 다소 바랬지만, 아직 모양은 남아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면 그 모양까지도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었으니까.
그저 추억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얼마 전 아버지가 한 말이 그 빛바랜 감정에 생명을 불어넣고 말았다.
― 아직도 그 마음이 남아 있더냐? 시몬 공자님을 좋아하던 그 마음 말이다.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어차피 이루어지기 어려운 관계였기 때문이다.
“……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냥 서로 바라만 봐도 좋은 거잖아요? 그냥 마주 보고 두 손을 꼭 잡아 주세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면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겠죠. 그럼 모든 게 잘될 거예요. 꿈이 이루어졌으니까.”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던 시몬은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드비안느가 자신의 두 손을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뭐 하냐?”
“왜요?”
“나한테 손 내밀고 있잖아.”
“헐.”
깜짝 놀란 드비안느가 두 손을 뒤로 감췄다.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한 결과였다.
“죄송해요. 한때 오페라 배우가 꿈이어서요. 저도 모르게 연기해 버렸네요.”
“오페라 배우가 꿈이었다고? 처음 듣는데.”
“시녀의 기본 소양이죠. 노래도 잘 부르고 연기도 잘해야 한다고요. 귀한 도련님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시녀만의 고충이랍니다?”
“그런가.”
그건 맞는 말이었다.
진짜 죽었다 깨어났는데도 드비안느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니까.
시몬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손을 휘휘 저었다. 나가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드비안느는 나가지 않고 버텼다.
“저, 도련님.”
“왜?”
시몬은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기 전까지 이 모든 서류를 처리할 생각을 하니 조급해졌다. 약속에 늦을 순 없었다.
“다음에는 저도 같이 나가서 차 한잔하면 안 될까요?”
드비안느답지 않게 차분한 목소리였다.
시몬은 그 미묘한 표정을 보지 못했다. 시선은 여전히 서류에 머물러 있었기에.
“갑자기 무슨 차 타령이야. 사람 바쁜 거 뻔히 알면서.”
그러면 그렇지.
드비안느는 쓰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늘 라니에리 경하고만 찻집 간 거잖아요. 그러니까 공평하게 저도 데려가 달라는 거죠. 거기 디저트 엄청 맛있는데.”
“후우, 알았으니까 이제 좀 퇴근해라. 대신 결재해 줄 거 아니면.”
“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근사하게 예를 올린 드비안느가 방을 나섰다.
달칵.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방문 앞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드비안느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늦어서 죄송합니다.”
시몬은 결국 약속 시각에 늦고 말았다. 마차를 타고 오는 도중에 마부를 세 번이나 닦달한 것은 비밀이었다.
그래도 서류를 모두 처리했으니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루아와 그녀의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시몬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사이먼 님.”
“아이고. 전에는 제대로 인사 못 드려서 죄송해요. 자, 앉으세요.”
식탁은 이미 음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의 메인은 칠면조 요리였다. 잘 익은 칠면조가 식탁 가운데에 먹기 좋게 누워 있었다.
시몬이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어머님께서 만드신 요리입니까? 정말 먹기 좋게 구워졌군요.”
“맛있게 보이죠? 루아가 했지요.”
“오, 그렇습니까?”
“얘 아빠가 요리를 못하게 해서 그렇지, 솜씨는 제법이랍니다? 어느 처자들과도 비교할 수 없지요.”
어머니는 딸을 적극 어필했다.
시몬이 루아를 바라보자 루아는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시장하실 텐데 어서 드세요.”
루아가 칠면조 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 시몬에게 덜어 주었다.
문득 처음 식사한 날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때는 시몬이 닭고기를 직접 잘라 주었었다.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연습했고, 소소하게 보답한 것이다.
루아는 그런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