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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자는 쉬고 싶다-111화 (111/120)

111화: 나만 당할 순 없지 (3)

로빈이 시험관 이야기를 할 때, 얼마 전 창밖에서 본 장면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었다.

어떤 특별한 장면을 본 것은 아니다.

드뇌브 후작이 미온 부인과 한가로이 정원을 거니는 모습이었다.

당시 시몬은 혀를 찼다.

아들을 ‘후계자’ 혹은 ‘소가주’라는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것도 모자라 저렇게 한가롭게 여유를 즐기다니.

이러다가 아버지가 말년의 행복을 위해 가주직을 내려놓고 조기 은퇴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을 벌여야 했다.

그래서 시몬이 지금 드뇌브 후작의 집무실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소가주님을 뵙습니다.”

“아버지 계시지?”

“예. 그런데 송구합니다만 미온 마님께서 들어가 계십니다.”

“그래서?”

시몬이 날카롭게 되묻자 집사가 흠칫 놀랐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의 시선도 이쪽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을 뵙겠다는데 아뢰지 못한다는 거야 뭐야?”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소가주님. 오해이십니다. 저는 그저…….”

“알았으니까 어서 고해.”

시종이 시몬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렸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고 들어오라는, 드뇌브 후작의 불평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시몬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드뇌브 후작은 편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미온은 시몬이 들어오기 전 자리를 맞은편으로 바꾼 상황이었다.

두 사람의 좋은 시간을 방해한 것 같은 느낌이 물씬 들었지만 시몬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꼴 보기 싫었다.

자신의 행복한 은퇴 라이프를 방해한 사람이 저렇게 즐기고 있다니!

“가주님을 뵙습니다.”

“무슨 일이냐?”

가주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니 공무 때문에 온 것임을 직감했다. 드뇌브 후작은 표정을 풀었다.

“상의드릴 일이 하나 있습니다. 시리우스 건에 대해서는 들으셨지요?”

“들었다. 기사단을 하나 만든다고 하지 않았더냐?”

“후보생 500명을 추렸습니다. 모두 아크튜러스 기사양성소에서 훈련 중인 자들입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드뇌브 후작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음. 그런데 그 일은 네가 알아서 하면 되는 거 아니었나? 로빈 경을 단장으로 삼을 정도면 기사단을 네 수족처럼 부리겠다는 의미 같던데 말이지.”

“시험관이 필요합니다. 고귀하신 아크튜러스의 가주이시자 소드 마스터를 눈앞에 두고 계신 가주님이 선발 시험을 관장해 주신다면 참여하는 모두가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

드뇌브 후작의 눈매가 좁아졌다.

시몬이 나름 금칠을 했으나, 그것은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아버지였다.

“왜 네가 하지 않고 나에게 부탁하는 게냐?”

“공무 때문에 바쁩니다.”

“바쁘다고?”

어처구니가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시몬이 왜 이렇게 나오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원하지 않는 후계자 노릇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방계까지 모조리 불러들여 승계전을 벌였는데 이겨 버렸으니 허탈감도 클 터.

그때 뜻하지 않은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각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남의 부탁이에요. 들어주시는 게 어떠실까요?”

“부인.”

“시몬은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왔답니다. 제 병을 고쳐 주기도 했고, 가문의 여러 일을 맡고 있다고 들었어요. 이럴 때 힘을 실어 주면 가문 사람들은 물론,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귀감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아주 조심스러우면서도 핵심을 짚은 청이었다.

시몬은 마음 같아서는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렇게 지원을 받을 줄 몰랐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고 봐야 한다니까.’

두 소꿉친구가 들으면 정색할 만한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시몬이었다.

“좋다. 너의 청이니 이번 한 번은 들어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기사 선발이 끝나면 예전에 계획했던 가족 여행을 떠날까 한다. 마이너 마을 저택이 좋겠군. 선발전이 모두 끝나면 내려갈 터이니 준비하도록.”

마이너 마을 이야기가 나오니 기분이 좋아진다. 절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문득 다가오는 일요일이 기대되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로이드 가문에 비약 납품 수량을 점차 늘리라고 지시했습니다. 20개를 시작으로 수량이 점점 늘어날 겁니다.”

“늘릴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그랬나?”

“그때는 상단 운영권이 저에게 없었습니다.”

시몬은 상단의 자본을 투입해 비약 제조량을 늘렸다는 걸 암시했다.

필요한 일이었다.

황궁으로 돌아간 황태자가 어떤 술수를 벌일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황도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면 군대를 키울 수밖에 없다.

카인 태자가 아직은 황제가 되지 않았지만,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최근 현 황제의 건강이 날로 악화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기도 했다.

“너도 나름 준비를 하는 게로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든 일이 잘 풀릴 겁니다. 설령 어긋나는 일이 있어도 제가 바로잡을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주 든든하군.”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드뇌브 후작은 후계자를 아주 잘 뽑았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어쨌든 목표는 달성했다.

한숨을 내쉰 시몬은 예를 취한 뒤 밖으로 나갔다.

* * *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시몬의 방으로 들어온 드비안느는 흠칫 놀랐다. 마치 세상에 없는 것을 목격하기라도 한 듯,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크게 떴다.

“도, 도련님?”

놀랍게도 시몬이 일어나 있었다.

그것도 세안을 마치고 외출 준비까지 하고 있다. 이미 하녀가 붙어 환복을 돕고 있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에요? 지금 아침 7시 반이라고요?”

“그래서?”

드비안느는 잠시 생각이 멈췄다.

시계가 고장 난 걸까?

아니면 사람이 고장 난 걸까?

드비안느는 어쩌면 후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문을 잇지 않기 위해 시몬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님은 정오가 되어야 일어나시잖아요. 그것도 온갖 짜증을 부리면서요. 그런데 이렇게 일찍 일어나 계시니 놀랄 수밖에 없죠.”

“아아, 그렇군.”

드비안느는 또다시 위화감을 느꼈다.

“……뭐라고 하지 않으시네요?”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나. 우리 드비안느 선생께서 옳은 말씀을 하셨는데.”

대체 뭐지?

드비안느가 보기에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떠오르는 건 없었다.

“혹시 서클이 하나 더 늘어나셨나요?”

“아니.”

“그럼 어디에서 근사한 아가씨라도 만났어요? 라니에리가 소개해 줬나요?”

“전혀.”

“가주께서 용돈이라도 주신 거예요?”

“상단이 내 손에 있는데 용돈은 이제 의미가 없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있는데 뭐 하러 용돈을 타서 써?”

예상했던 것들이 모두 빗나갔다. 결국 드비안느는 생각을 포기했다.

루아와의 관계를 아는 것은 라니에리뿐이다.

제2기사단 한스도 마이너 마을을 오가며 대강 눈치를 채고 있었으나, 시몬의 함구령을 받고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어디 가시는데요? 약속은 저녁에 있으시다고 들었는데요.”

“그냥 나가서 차나 한잔할 생각이다.”

차 한잔.

시몬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차를요? 그것도 혼자서?”

“그럼 누가 나와 차를 마셔 주겠나? 라니에리는 바빠서 얼굴도 못 비추고 있고, 로빈은 선발 시험 중이고, 케나드는 훈련 중이고, 이올린은 가정 교사와 공부 중인데.”

“그럼 제가 같이 갈게요.”

어제부로 드비안느는 시몬의 정식 시녀로 배정되었다. 그래서 따라간다 한들 이상할 건 없었다.

거울을 보던 시몬이 고개를 돌렸다. 드비안느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었다.

“내가 왜?”

단칼에 거절당했다.

왜인지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며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드비안느는 잘 참아 내었다.

“그럼 오늘은 일찍 퇴근해도 될까요? 저녁 약속까지 돌아오지 않으실 거라면요.”

“마음대로 하십시오.”

뭔가 진 느낌이었다.

치마 양 끝단을 잡고 정중히 인사한 드비안느가 밖으로 나갔다.

준비를 모두 마친 시몬은 마차를 타고 중심가에 위치한 찻집으로 들어섰다.

“오, 공자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찻집 주인이 기품 있게 인사했다. 이곳은 귀족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저녁 식사 전까지 이곳에 있을 생각이다. 차와 먹을 것을 적당히 준비해 주도록.”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주인이 안내한 곳은 2층에 위치한 조용한 별실이었다. 창밖으로 탁 트인 시내의 전경이 보이는 명당이었다.

오늘 처리해야 하는 서류도 많고, 만나야 하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시몬은 모든 일정을 내일로 미뤘다. 오늘은 찻집에서 저녁이 될 때까지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라니에리의 엄중한 잔소리가 벌써부터 들려오는 듯했지만, 시몬은 긍정했다.

‘사람이 어떻게 일만 하고 사나? 이렇게 가끔 쉬면서 여유도 좀 부려야지.’

곧 향긋한 차와 달콤한 디저트가 나왔다.

시몬은 차를 마시며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감상했다. 가끔은 눈을 감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껴 보기도 했다.

똑똑.

노크가 들렸다. 시몬은 당연히 종업원이라고 생각해 대꾸하지 않았다.

“팔자 좋으시군요.”

라니에리였다.

깜짝 놀란 시몬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정말, 조금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뭐야,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소가주님의 충성스러운 시녀가 알려 주더군요. 공자님께서 가실 만한 찻집은 이곳밖에 없으니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충성은 개뿔.”

‘소가주’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몬은 뻔뻔했다.

“좀 쉬려고 왔는데 그새를 못 참고 잔소리하러 왔냐?”

“오늘 하셔야 하는 일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녁 전에 끝내 달라고 제가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하루 늦는다고 가문이 망하거나 하지 않아.”

“제 입장이 곤란해집니다.”

“그럴 때는 내 이름을 팔아도 좋다. 소가주께서 너무 게으른 탓에 일이 밀렸습니다, 하고 말이야.”

그런 뻔한 도발에 당할 라니에리가 아니었다.

“오늘 저녁 중요한 약속이 있으셔서 조언을 드리려고 했는데 아쉽군요. 그럼 방해하지 않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라니에리가 몸을 홱 돌려 나갔다.

저녁 약속? 조언?

‘설마 루아의 일인가?’

갑을관계가 뒤바뀌었다. 재빨리 달려 나간 시몬이 라니에리를 붙잡았다.

“어허, 왜 이렇게 성질이 급해? 온 김에 차나 한잔하고 가지.”

“저는 바쁩니다. 차 한잔할 시간 없습니다. 놓으십시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겠다고?”

팔을 뿌리친 라니에리가 안경을 슥 밀어 올리며 말했다.

“면담을 미루신 건 뭐 그렇다 치겠습니다. 하지만 서류 처리는 오늘까지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조언을 드리겠습니다.”

“……약속하지.”

적어도 시몬은 약속을 어기거나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별다른 보증 요구 없이, 라니에리는 자리에 앉았다.

“오늘 저녁에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저녁을 먹겠지. 그리고 차도 한잔할 거고. 그리고 뭐 돌아오지 않을까?”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

“애매한 관계가 오래 지속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공자님의 주변 정리가 모두 끝났으니 이제 슬슬 변화를 모색해야 합니다.”

“변화라면?”

돌연 라니에리의 눈이 북극성처럼 반짝, 빛났다.

“오늘 밤. 진도를 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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