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나만 당할 순 없지 (2)
하지만 시몬에 손에 쥐어진 카드는 남아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라니에리가 칼림에게 업무를 넘겨받고 있다는 사실이 컸다. 그가 자리를 비울 일이 많으니 누군가는 그 공백을 메워야 했다.
헤라는 평소 드비안느를 좋게 보고 있었다.
시몬과 라니에리와 어릴 적 같이 놀며 자란 사이라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서로 잘 아는 사이라면 수습 기간도 필요 없이 즉시 투입할 수 있으니까.
“거봐요. 제가 입맛 떨어질 거라고 했죠?”
드비안느는 의기양양했다. 꼴 보기 싫었다. 시몬은 오기로라도 포크와 나이프를 다시 쥐려고 했으나, 그만두었다.
“절망적이군.”
“어쩔 수 없죠 뭐. 팔자려니 생각하셔야지. 이게 다 도련님이 승계전에서 우승한 탓이랍니다? 가문을 잇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정말 놀랐었는데 역시 정의는 승리하는 법이네요!”
드비안느는 너무나 신났는지 소리 내어 웃었다. 시몬은 마른세수를 했다.
정말로 얄미웠다. 한숨을 내쉬며 와인을 마셨다.
오늘따라 술이 쓰다.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안 알려 줘.”
“그럼 도련님만 더 힘들어지실 텐데요? 잘 생각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많은 뜻이 함축된 한마디였다.
문득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일찍 일어나지 않아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깨웠던 그때의 기억이.
소름이 돋는다.
물론, 라니에리가 시몬을 깨우거나 하는 일은 별로 없다.
하지만 드비안느가 시녀로 배정된다면 전담 하녀인 제니와 업무를 어느 정도 공유할 가능성이 크다.
드비안느는 제니를 동생처럼 아꼈으니까. 아크튜러스의 대공자를 침대에서 일어나게 하는 고된 일을 대신할 가능성이 크다.
어려서부터 시몬을 괴롭히는 남다른 취미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뭔데?”
“앞으로 어떻게 하실지 생각해 보셨어요?”
“어떻게 하긴. 저녁 먹고 저택으로 가서 잠이나 잘 생각인데.”
“영지 운영이요. 영주님이 되시면 하고 싶은 거라든지?”
먹지 않으면 본인 손해다. 정신을 번뜩 차린 시몬은 간신히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칼질을 시작했다.
“딱히 하고 싶은 건 없다.”
“그렇게 말씀하시기엔 너무 이것저것 많이 하시는 거 같던데요? 기사단도 새로 만들어지는 것 같고요. 기사들 사이에서 정말 말이 많더라구요.”
그것은 시몬도 예상하던 일이다.
드뇌브 후작이 통치하는 동안 기사단은 딱 두 개만 운영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가 더 생기는 것이다.
그것도 시몬의 명만 따르는 특별한 조직.
기존 기사단원들의 견제와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유는 간단해. 지금보다 힘을 더 길러야 하거든. 황실에서 어떤 트집을 잡을지 모르니까 대비를 해 놓는 게 좋다.”
“설마 전쟁이라도 일어나려는 거예요?”
드비안느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아버지와 ‘오러 브레이커’의 해약을 만들면서 피부로 느꼈다. 황실에서 시몬과 아크튜러스 가문을 핍박하려 한다는 것을.
자고로 계략이란 은밀하면 은밀할수록 교묘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황태자의 술수는 매우 교묘했다.
황태자와 황녀가 아크튜러스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승계전에 참가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드비안느는 황도 진출의 꿈을 접었다.
생각보다 무서운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곳에서 시녀 일을 한다는 것은 음모의 수렁에 빠져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목이 졸려질지 알 수 없는 곳이라는 선입견이 생겼다.
승계전이 끝나고 세 친구는 그 주제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 시몬은 딱히 드비안느의 선입견을 바로잡지 않았다.
황도는 정말 무서운 곳이니까.
“전쟁은 불가능해. 아무리 황군이 강하다고 해도 명분 없는 전쟁은 제 살 깎아 먹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오히려 자근자근 괴롭히면서 우리 가문을 갉아먹을 만한 일을 만들 거야.”
경청하던 라니에리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가장 가능성이 큰 건 북부다.”
“북부라면…….”
드비안느는 차가운 얼음땅을 떠올렸다.
시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귀족 출신의 교양 있는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전문직이다.
그래서 드비안느는 제국 북부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안다.
북부 방벽.
그리고 그곳을 지키는 팬드래건 백작가.
팬드래건 백작가는 북방 이민족으로부터 제국을 수호하는 가문이다. 변경백이라고 불리는 그들은 제국 내에서 아크튜러스와 비슷한 위치에 있다.
그 명성은 비슷하나, 북방으로 갈수록 팬드래건 백작가의 위세가 더욱 커진다.
아크튜러스 가문은 비옥한 영토 위에 세워졌지만, 팬드래건 가문은 춥고 척박한 땅 위에 세워진 가문이기 때문에.
‘진짜 전사는 팬드래건에만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북부엔 이민족이 있다. 뿔 달린 투구를 쓴 야만인들이지. 오크들처럼 용맹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다. 팬드래건 가문이 그들을 막고 있는데, 제국의 안위를 위해 병력을 차출하라는 명이 떨어질 수도 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과거에도 토벌이라는 명분으로 원정대가 꾸려지기도 했지요. 공자님이 보시기에 언제쯤 움직이게 될 것 같습니까?”
시몬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북방 이민족이 준동하게 된 것은 대 오크 전쟁이 끝난 한참 뒤였다.
‘5년. 정확히 5년 후의 일이다.’
그때 아크튜러스 가문에서는 케나드를 북방으로 보냈다. 그리고 케나드는 그곳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원래의 이야기라면 지금부터 5년 뒤의 일어나는 일이다. 이민족들이 대규모 남하를 강행하지.”
“도련님 꿈은 용하니까 그쯤이라고 생각해야겠네요.”
두 친구는 시몬의 전생 경험을 여전히 꿈이라고 치부하고 있었다.
과거와 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신통한 꿈이 되었다는 것 정도.
라니에리는 그보다 조금 더 나았다. 그는 일종의 ‘계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닐 수도 있다.”
“꿈에서 본 것과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변수가 생겼거든.”
전생에서는 황태자와 대립하지도 않았고 승계전이 열리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황녀와의 관계도 틀어지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모든 것이 전생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시몬의 눈엔 이러한 변수가 5년이라는 시간을 뭉개 버리기엔 충분해 보였다.
갑자기 시몬이 불한당처럼 웃으며 드비안느를 바라보았다.
“응?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
“하나 있지.”
“뭔데요?”
“식사 중에 이야기하면 입맛이 떨어질 테니 이따 티타임 때 이야기해 주도록 하마.”
시몬은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유치하시네요.”
하지만 궁금한 건 참을 수 없었다. 드비안느도 시몬과 비슷한 과였다.
“해 보세요. 입맛 안 떨어진다고 보장하죠. 내기하셔도 좋아요.”
“괜찮겠어?”
“그럼요. 아크튜러스의 영예로운 시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답니다?”
“앞에서 말한 문제 때문에 비약 생산량을 늘려야 할 것 같다. 한 달에 20개로 말이야.”
드비안느는 잠시 멍해졌다.
“20개요? 제가 잘못 들은 건가요?”
“아니. 제대로 들었어.”
“지금 열 개 만드는 것도 아슬아슬한데 어떻게 두 배로 늘려요?”
드비안느는 어느새 자신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소드 비기너 단계를 졸업하려면 기사 한 명당 다섯 개의 비약이 필요해. 실수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한 달에 네 명밖에 못 만든다는 이야기다. 1년이면 48명. 3년이면 144명이지. 그걸로는 어디에도 써먹지 못해. 그러니까 생산량을 점점 늘려야지.”
사실 3서클 소드 비기너 144명만 있어도 엄청난 무력이 나온다. 중소규모 가문의 기사단을 보면 소드 비기너급 기사가 열 명 남짓 있고, 단장급이 익스퍼트 정도니까.
중형 가문은 되어야 비기너급 기사들이 백 명이 넘어간다. 익스퍼트급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시몬이 목표로 삼은 것은 대형 가문이다.
‘3서클 비기너를 300명까지 만든다. 그 이후에 실전 경험을 쌓게 해야지.’
다행스럽게도 오크 대전사들이 교관으로 훈련을 돕고 있다. 훈련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좋은 상황.
부족한 실전 경험은 오지로 원정을 나가 몬스터를 토벌하거나 던전을 공략하는 것으로 채우면 된다.
거기에 케나드라는 검술의 천재가 동생이다.
동생에게 원정대를 맡기면 침대에 누워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즐길 수 있다.
‘주적은 북방 이민족이 아니라 황실이다. 황실을 견제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을 갖춰야 해.’
그래서 다소 욕심을 부리기로 한 것이다.
물론, 시몬은 군사력을 키워 대륙을 일통하려는 생각으로 이런 계획을 짠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표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전쟁억지력.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강한 무력을 갖춰야 한다.
가문을 잇는 것을 피할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말년이 매우 피곤해진다는 것을 전생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이다.
“도련님.”
뒤늦게 포크와 나이프를 다시 손에 쥔 드비안느가 물었다.
“이거, 아버지한테도 말씀하신 건가요?”
“아니. 처음 이야기하는 건데? 하하하. 표정 봐라. 가관이군. 입맛은 어때?”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벌써 입에서 단내가 나는 것 같네요.”
얼마 전까지 약초를 캐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고군분투했던 그녀였다.
침묵이 길어졌다.
“걱정하지 마라. 이번엔 상단에서 지원해 줄 거니까. 이미 영지 전역에서 솜씨 좋은 약초꾼들을 모으고 있다. 매달 10개씩 늘려 가는 걸로 정리했으면 하는데.”
“우와…… 병 주고 약 주는 데 선수시네요.”
“내기에서 이겼는데 뭐 없나?”
“시녀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딱 한 번은 늦잠 자게 해 드릴게요.”
드비안느는 매우 분한 표정이었다. 시몬은 그 표정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늦잠 허락권은 못 참았다.
“앞으로 내기를 자주 해야겠군.”
시몬은 와인이 든 잔을 들어 보이더니 얄밉게 목을 축였다.
* * *
소꿉친구들과 오랜만에 늦게까지 술을 마신 시몬은 다음 날 늦잠을 잤다.
덕분에 전담 하녀인 제니는 하녀장에게 꾸중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억울하면 출세하는 수밖에.
“손님이 왔었나?”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일어난 시몬이 물었다. 제니는 고개를 조아리며 보고했다.
“라니에리 님이 다녀가셨고, 로빈 님께서 밖에서 기다리고 계셔요.”
“로빈 경이? 들어오라고 해.”
“예.”
하녀가 문을 열고 로빈을 안으로 들였다. 경갑을 걸친 로빈은 이제 아크튜러스 가문의 기사가 다 됐다.
“소가주님을 뵙습니다.”
“음.”
역린을 건드리는 표현이 나왔다.
하지만 시몬은 참아야 했다. 기사단원들에겐 소가주라는 명칭을 허용했으니까.
“오래 기다렸나?”
“아닙니다. 오히려 숙면을 방해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역시 경은 크게 될 사람이야. 어디의 누구는 날 깨우는 걸 자랑스러워하고 있는데 말이지. 따박따박 말대꾸하면서.”
로빈은 그게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서류를 시몬에게 넘겼다.
“시리우스에 어울릴 만한 후보생들을 뽑아 왔습니다. 모두 아크튜러스 기사양성소 출신이며 총 500명입니다.”
“고생했군.”
“허락해 주시면 바로 선발 시험을 보려고 합니다.”
“누가 가르쳐 줬어?”
“예?”
“아니, 너무 자연스럽잖아. 기사단 생활도 거의 안 해 본 녀석이 이렇게 서류를 들고 와서 시험 어쩌구 하니까.”
“라니에리 경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역시.”
로빈은 평민 출신인데다 다른 기사들처럼 거칠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똑 부러지게 한다는 건, 그만큼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
“시험관은?”
“소가주님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좀 바쁜데.”
돌연 시몬의 입가에 불길한 미소가 맺혔다.
“아아. 잠깐 기다려라. 아주 훌륭한 시험관을 섭외해 올 테니.”
시몬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드뇌브 후작의 집무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