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나만 당할 순 없지 (1)
며칠 후, 해가 저물 무렵 아크튜러스 상단의 총수가 시몬을 찾아왔다.
“소가주님을 뵙습니다.”
“…….”
시몬이 듣기 싫은 단어가 나왔다. 그래도 표정만 좀 일그러졌을 뿐, 총관에게 뭐라 잔소리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 호칭 사용을 금지할 순 없었다. 아크튜러스 가문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특히 상단 쪽은 가문과 좀 거리가 있는 단체였다.
그래서 시몬은 저택의 사용인들과 기사단에 한정하여 ‘소가주’ 명칭을 금지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드뇌브 후작은 껄껄 웃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몬이 후계를 잇게 되었으니 이제 여한이 없었다.
“웬일이야?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고. 요즘 이런저런 일로 많이 바쁠 텐데.”
“전에 말씀해 주신 인피면구를 구해 왔습니다. 하여, 이렇게 급하게 찾아뵈었습니다.”
“벌써 구했다고?”
시몬이 그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드뇌브 후작이 찾아오지 않는 한 시몬은 침대에 누운 채로 손님을 맞았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아주 놀랐다는 의미였다.
한 달 정도는 걸릴 줄 알았다.
인피면구 정도 되는 아티팩트를 구하려면 던전을 공략하거나 경매장에 참석해야 한다.
“마침 플로란 쪽 지부장이 매입해 둔 물건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로 받았고, 이렇게 가지고 왔습니다.”
총관이 나무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엔 투명한 얇은 막이 놓여 있었다.
투명 막은 부드러운 솜털 위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딱 성인 남성의 얼굴을 가릴 수 있는 크기였다.
시몬은 면구를 꺼내 보았다. 아주 가벼워서 솜털을 쥔 느낌이었다.
“꽤 괜찮은 물건이군.”
시몬은 전생에서 면구를 사용해 본 적이 꽤 있었다. 그래서 총관이 구해 온 물건이 보통 이상의 물건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총관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단, 오러 유저만 이용할 수 있는 면구라고 하더군요.”
“좋은 것들은 오러 주입이 필요하지. 원하는 대로 모양을 바꾸려면 그만한 에너지가 필요하거든.”
“잘 알고 계시는군요.”
“구하는 데 얼마나 들었어?”
“10억 실링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생각보다는 저렴하네. 플로란 지부장이 구해 온 거니까 본사에서 10억 실링을 그쪽으로 보내도록 해라.”
“저, 소가주님. 외람된 말씀이오나 플로란 지부장은 이걸 진상품으로 올리겠다고 전했습니다.”
“그래?”
한마디로 시몬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의미였다. 뇌물이라고 보아도 좋았다.
“그 충심은 잘 기억하겠다고 전해라.”
“그리 전하겠습니다. 소가주님. 참, 그 면구는 오러를 주입해야 하기 때문에, 오러를 감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 들킬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알고 있어. 걱정하지 마라. 수상한 목적으로 쓰려는 건 아니니까.”
면구가 필요한 대상은 루아와 그녀의 가족들뿐이다. 어딘가에 침투할 일이 없다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보중하십시오.”
“아, 총관.”
“예?”
“기왕 구한 김에 일반인이 쓸 수 있는 면구 하나 더 구해 줄 수 있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최대한 빨리 구해 대령하겠습니다.”
“잘 부탁한다.”
총관이 나가고, 시몬은 즉시 인피면구를 얼굴에 착용했다.
착!
매끈하게 달라붙는 소리와 함께 얼굴 피부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온도가 자동으로 조절되어 덥지 않게 되었다.
시몬은 면구에 오러를 살짝 주입했다.
곧이어 면구는 시몬이 떠올린 이미지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주 찰나의 시간, 면구는 시몬이 평소 변장하던 모습을 표현해 냈다.
큰 거울 앞에 선 시몬은 얼굴을 돌려 가며 자세히 관찰했다.
‘아주 좋군.’
생각보다 성능이 좋았다. 땀이 차지 않도록 온도까지 조절해 주는 물건은 그리 많지 않다.
그때, 노크가 들렸다.
“들어와.”
라니에리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시몬이 그를 돌아보니 라니에리가 흠칫 놀랐다.
“외출 준비 중이셨습니까?”
“아니, 좋은 물건을 구했다. 인피면구. 전에 말한 거 있잖아. 그거다.”
시몬이 피부에 달라붙은 면구를 잡아떼었다. 그러자 쭈욱 하는 소리와 함께 투명한 막이 분리되었다.
“신기하네요. 말로만 듣던 물건입니다. 성능도 괜찮은 것 같군요.”
“일단 아티팩트니까. 너도 한번 써 볼래? 이건 오러 유저 용이긴 한데 일반인 용도 있거든.”
“하나 있으면 좋긴 할 것 같습니다.”
시몬은 그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매일 밤 얼굴을 바꿔 가며 사교계를 평정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아까 총관에게 하나 더 구해 오라고 했다. 오면 주도록 하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라니에리는 공과 사가 철저한 인물이었다. 온순했던 표정이 돌연 차갑게 변했다.
“사용인들과 기사단에 소가주 명칭을 쓰지 말라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왜 그러신 겁니까?”
“듣기 싫어서.”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대외적으로 공표된 일이기 때문에 마땅히 사용되어야 하는 명칭입니다. 특히 기사단에서는 소가주라는 명칭의 상징성이 큽니다. 명을 철회해 주십시오.”
시몬은 면구를 상자에 잘 내려 두고 침대에 다시 누웠다.
그러곤 웃었다.
“싫은데?”
“소가주님. 싫으시다고요?”
“…….”
라니에리가 너무 쉽게 선을 넘었다.
예전에 시몬이 흥분해서 한 말이 있었다. 한 번이라도 더 소가주라는 말을 썼다가는 파면시킬 거라고.
“소가주님. 정말 싫으신 겁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소가주님.”
“그만해라.”
“아무리 소가주님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감정을 표출하면 곤란합니다. 약속대로 파면해 주십시오. 저는 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냥 마음 편히 낙향하겠습니다.”
“하.”
갑을 관계가 뒤바뀌었다.
당연히 시몬의 입장에서는 라니에리를 파면시키지 못한다. 승계전에서 졌다면 모를까, 이제는 가문을 이어야 하니 브레인이 필요했다.
최대한 아무 일 없게, 평화롭고 한가로운 그런 정책을 펼치려면 남부의 현자라 불리는 그의 머리가 필요하다.
“그럼 뭐, 사용인들만 금지하는 걸로.”
“명을 받듭니다.”
“그 이야기 하려고 온 거냐? 또 듣기 싫은 이야기 잔뜩 가지고 왔을 것 같은데.”
시몬이 소가주가 된 이상, 라니에리는 차기 서기관으로 낙점되었다. 그래서 현직 서기관인 칼림도 업무를 라니에리에게 어느 정도 넘기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오늘은 좀 사적인 말씀을 드리려고 온 겁니다.”
“오, 뭔데?”
“드비안느 양과 함께 조촐한 저녁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공자님께서 후계자가 되셨는데 제대로 축하하지도 못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전생의 시몬이었다면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가로이 보낼 시간 없다고.
하지만 지금의 시몬은 다르다.
함께해야 할 사람들의 소중함을 어느 때보다도 크게 느끼고 있었다.
“그거 좋군. 식사 장소는?”
“로이드 가문의 저택입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가문의 저택은 손님을 맞기가 좀 곤란해서 말이죠.”
“너희 가문도 좀 큰 저택으로 옮기는 게 좋지 않아? 그래도 남작가인데.”
베텔게우스 가문의 저택은 무척 오래되고 허름하다. 크기도 작다. 누가 보면 준남작이나 기사들의 집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큰 저택은 관리하기 불편할 뿐이죠.”
“하긴, 너희 아버지도 아주 고집스러운 분이셨지. 그런 점에서 너는 아버지를 쏙 빼닮았군.”
“칭찬 감사합니다.”
조금도 대미지가 들어가지 않는 걸 보며 시몬은 혀를 찼다.
베텔게우스 가문은 전통적인 학자 가문이다.
중앙 정계로 진출하지 않고 아크튜러스의 비호를 받으며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서기관 출신만 10명 이상을 배출한 명가였다.
그러나 사리사욕이 조금도 없어서 재물을 축적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청백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가문이었다.
“그럼 슬슬 가실까요? 드비안느 양도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럴까. 아, 그리고 일요일에 스케줄 잡지 마라. 루아 양의 집에 가서 저녁 먹을 거다.”
“선물은 어떠셨습니까?”
“아주 좋아하더군.”
시몬은 그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아무래도 이런 쪽은 라니에리가 전문이었으니까.
이야기를 모두 들은 라니에리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셨습니다. 이 정도라면 공자님께서도 사교계에 진출하실 수 있겠군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군.”
“당연히 칭찬입니다.”
두 오랜 친구는 싱거운 잡담을 나누며 저택을 나섰다. 이윽고 마차가 로이드 가문의 저택으로 힘차게 달렸다.
* * *
“오셨어요?”
드비안느가 마중을 나왔다. 오늘따라 예쁜 드레스를 입고 있다. 옆에는 로이드 가문의 가주, 퀘백과 그의 아내도 함께였다.
“초대해 줘서 고맙군.”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가주님.”
“늦었지만 감축드려요.”
시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드비안느가 굳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솔직히 오실 줄은 몰랐어요. 라니가 스케줄은 꿰고 있어도 도련님이 귀찮아하실 것 같았거든요. 침대에서 먹는 밥을 제일 좋아하시니까.”
그러자 퀘백 남작과 부인이 화들짝 놀랐다. 엄청난 무례라고 생각한 것.
하지만 시몬은 여유롭게 웃었다.
“오랜 친구들과 함께하는 식사도 침대만큼 좋은 기분을 주지. 그 점을 고려하지 않았군.”
“어머나, 도련님. 성숙해지셨군요.”
드비안느의 찬사를 들으며 시몬은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만찬은 시몬을 포함해 세 사람만 참석하게 되었다. 시몬은 그러지 말라고 했으나 퀘백 남작 내외는 자리를 비켜 주었다.
식탁에 앉은 세 사람이 화이트와인이 든 잔을 들었다.
건배사는 드비안느가 맡았다.
“정식 후계자가 된 우리 도련님을 위하여!”
밥맛 떨어지는 건배사였다. 시몬은 와인으로 입을 축인 후, 나오는 음식에 집중했다.
제법 신경을 쓴 요리들이 나왔다.
로이드 가문은 최근 비약 사업을 같이 시작하면서 재정이 좋아졌다. 이 요리엔 도와줘서 감사하다는 의미도 들어 있었다.
고기를 크게 한 점 썰어 입에 넣었다.
“맛있군.”
“다행이네요. 우리 도련님 입맛 까다로우셔서 다들 긴장했거든요.”
“그 정도는 아니야.”
시몬은 내심 불안해졌다.
눈앞에서 생글생글 웃는 드비안느의 모습이 너무나 잘 보였기 때문이다.
뭔가 숨기고 있는 느낌.
“할 말 있냐?”
“어떻게 아셨어요?”
“하루 이틀 본 사이야? 딱 보면 답 나오지.”
시몬은 슬쩍 라니에리를 흘겨보았다. 그도 웃고 있는 것이, 뭔가 음모가 꾸며지는 것 같았다.
“식사 중에 말씀드리면 입맛이 떨어지실 테니 이따 티타임 때 말씀드릴게요.”
“내가 제일 혐오하는 사람들이 말하다 마는 사람들이야. 사람 궁금하게 해 놓고 그 반응을 즐기는 아주 질 나쁜 사람들이지.”
“흐응, 괜찮으시겠어요?”
“해 봐.”
시몬은 쿨하게 고기를 썰었다.
하지만 이어 들려오는 엄청난 말에 칼질이 멈추고 말았다.
“……뭐라고?”
“마님께서 저를 도련님께 배정하겠다고 하셨다고요. 이제 소가주님이 되셨으니 보좌해야 할 게 많을 거라면서요.”
시몬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놀랍게도 입맛이 싹 달아났다.
“그러니까, 네가 내 시녀가 된다는 말이야?”
“맞아요. 아직 결정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건 곧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 아니겠어요?”
“하…….”
승계전이 끝난 이후 찾아온 최대의 고비였다. 시몬은 어떻게든 이 난국을 헤쳐 나가야 했다.
하지만.
“마님께서 결정하신 일이니 물릴 수는 없을 겁니다. 저택 내의 모든 일은 마님께서 전담하시니까요. 가주께서도 손대지 못하십니다.”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책사도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화력 좋은 잔소리꾼이 하나 더 늘어나게 될 것 같다.
‘빌어먹을 회귀.’
어떻게든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