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마음의 안식처
“소가주님. 외출하십니까?”
그놈의 소가주 소리가 계속 들려와 시몬의 심기를 자극했다.
물론 드비안느처럼 공자, 혹은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기사단 소속은 여지없이 소가주라고 불렀다.
암묵적인 후계자와 대륙 전역에 공표된 후계자는 그 무게감부터 다르다.
그래서 기사단은 충성심을 경쟁하려는 듯 소가주 칭호를 사용했다.
하지만 시몬에게는 비아냥처럼 들렸다.
승계전 결승에서 멋지게 패해 깨끗하게 낙향하려던 꿈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으니까.
“너, 이름과 소속이 어디지?”
시몬은 기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기사가 차려 자세를 하더니 빠릿하게 대답했다.
“옛! 제2기사단 소속! 기사 아돌프입니다!”
“아이 씨, 귀청 떨어질 뻔했네. 뭘 그리 소리를 지르고 있어?”
“죄, 죄송합니다.”
“제2기사단이라면 한스 경의 부하로군. 음, 기억났다. 아돌프라면 이번 오크 전쟁에서 공을 세운 그 친구인가? 첫 회전에서 오크 전사 열 마리를 베었다던.”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소가주님!”
당연히 시몬은 그를 칭찬하기 위해 기억한 게 아니다.
다시금 소가주 이야기가 나오자 표정에 그림자가 깔렸다. 기뻐하던 아돌프도 긴장했다.
“내가 지금 당장 한스 경을 불러서 지시하고 싶은데 바빠서 말이지. 가서 전해라. 앞으로 나를 소가주라고 부르는 기사와 병사들을 모조리 처벌할 거라고.”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앞으로 소가주라는 호칭은 금지라는 말이다. 시간 되면 제1기사단에 가서도 전해.”
“……예?”
“두 번도 부족해서 세 번이나 다시 말하게 할 생각인가?”
시몬은 넋이 나간 아돌프를 지나쳤다.
때마침 라니에리가 준비한 마차가 시몬을 태우기 위해 다가왔다.
“소, 소가주님!”
아돌프가 달려왔다. 시몬이 인상을 팍 쓰며 돌아서자, 아돌프는 아차 하며 걸음을 멈췄다.
“저, 외출하시려는 것이라면 호위를 붙이겠습니다. 실은, 주군께서 앞으로 소가…… 아니, 죄송합니다. 공자님의 호위에 더욱 신경을 쓰라 명하셨습니다.”
“그럴 거 없다. 멀리 나가려는 건 아니니까. 마을을 좀 둘러보고 올 생각이다.”
“하지만, 가주께서…….”
“아돌프 경.”
시몬이 다가와 아돌프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아돌프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마치 포식자와 마주친 사슴처럼.
“앞으로 우리 가문에서 오래도록 기사로 일하면서 명성을 날리고 싶지?”
“그, 그, 그렇습니다.”
“그럼 잘 생각해 봐. 네가 앞으로 아버지를 오래 모실까, 아니면 나를 오래 모실까? 전사하지 않고 오래도록 산다면 말이야.”
“……공자님이십니다.”
“그래도 눈치는 있는 모양이네. 잘하자.”
“예, 옛!”
“호위를 강화하라고 아버지께서 명령을 내리셨다고 했지? 가서 보고해. 그 명은 받들지 못하겠다고. 사령관님의 생각은 좀 다르시다고 전해라.”
시몬의 뒤끝이 엉뚱한 데로 튀었다.
그 엄청난 말을 가주에게 전할 수 있는 기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시몬이 알 바는 아니었다.
“구시가지로.”
마부가 능숙하게 말을 몰기 시작했다.
저택을 빠져나가자 피부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기운이 사방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살기까지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충직하게 시몬을 사방에서 호위하려는 네 명의 든든한 기운이 느껴졌다.
‘일로스테 녀석.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일로스테가 첩보단을 맡자마자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은 오히려 좋았다.
일을 제대로 하겠다는 증거였으니까.
저택 내부에 심어진 첩자도 문제였지만, 외부에서 시몬을 감시하려는 자들도 제거 대상이었다.
‘곧 정리되겠어. 진이 부하들을 제대로 키워 놓았으니까.’
킬스톤에서의 임무가 시작되기 전, 시몬은 진이 키운 부하들을 직접 만나 볼 기회가 있었다.
하나같이 살인 병기라 칭해도 될 만한 자들이었다.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것은 물론, 몸 전체를 무기처럼 쓸 수 있었다.
첩보단을 만들 궁리는 그때 처음으로 하게 됐다.
이렇게 잘 훈련된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으니까.
지금은 황실의 감시망이 느슨해진 상황이라 따로 미행이 붙거나 하진 않았으나 미리 대비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딸칵.
시몬은 마차 내부에 있는 서랍을 열어 변장 도구를 꺼냈다.
‘이것도 좀 개선할 필요가 있겠어. 여간 불편한 게 아니군.’
매번 루아를 만나러 갈 때마다 변장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게으르고 귀찮은 것을 사랑하는 시몬에게는 더더욱 번거로웠다.
변장을 하지 않는 방법은 단 하나.
루아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이르지. 승계전에서 졌다면 모를까.’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전생의 시몬이었다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이 기회를 이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 2회 차를 맞은 그는 예전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천천히 가자. 아무도 다치지 않게. 어차피 시간은 많아. 충분해.’
하지만 시몬의 게으른 본능이 음습한 곳에서 계속 꿈틀거렸다.
뭔가 방법을 찾으라고.
더 이상 손을 움직이는 건 너무 힘들다고.
‘돈을 좀 써 볼까?’
시몬이 떠올린 것은 재활용이 가능한 원터치 변장 도구였다.
바로 마법이 깃든 물건.
아티팩트 중에는 외형을 자유롭게 변형시킬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인피면구’라고 불리는 것들이었다.
‘아크튜러스 상단의 운영권을 받았으니 상단의 돈 좀 쓴다고 해서 뭐라 하진 못하시겠지. 이제 상단의 주인은 나니까.’
상단의 자본과 유통망을 이용한다면 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시몬은 뭐든 지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루아에게 전속 하녀를 붙여 주고, 쉐프도 고용해 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맛있는 걸 먹이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거기에 전속 디자이너까지 고용해 더욱 아름다움을 뽐내게 하고 싶었다.
또한 거처도 근사한 저택으로 옮기게 하고, 기사들의 호위를 받는 귀족 부인이 되어 함께 정원을 산책하는 상상을 펼쳤다.
‘후후후. 뭐, 조만간 그렇게 되겠지. 시간 문제야.’
음흉하게 웃으며 변장을 마친 시몬은 서랍에 도구를 넣고 탁 닫았다.
어느새 마차가 구시가지에 도착했다.
“기다릴 필요 없다. 내가 알아서 돌아갈 테니 바로 저택으로 복귀하도록.”
“예. 공자님.”
마차가 사라지고, 시몬은 즉시 빵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 빵이 나오는 시간이었는지 구수한 냄새가 솔솔 풍겨 오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장면이 펼쳐졌다.
루아의 빵집을 중심으로 긴 줄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빵이 나오는 시간에 맞춰 사람들이 줄을 선 것이다.
‘좋아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시몬은 빵집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얌전히 뒤로 가 줄을 섰다.
그는 아크튜러스 상단의 관계자였다. 줄을 설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그는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한참 후, 시몬의 차례가 왔다.
“오랜만입니다. 루아 양.”
“사이먼 님?”
루아는 정말 깜짝 놀랐다. 예쁜 눈이 커다래졌다.
“하하하. 너무 갑작스레 찾아왔나요? 음, 일단 주문부터 좀 하겠습니다.”
“앗, 네! 어떤 걸로 드릴까요?”
시몬은 종류별로 하나씩 빵을 주문했다. 루아는 정성스레 빵을 담아 시몬에게 건넸다.
시몬이 뒤를 힐끗 바라보았다. 여전히 줄이 길게 서 있었다.
“좀 바쁘신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찾아오지요.”
“저기…….”
루아가 아쉽다는 듯 손을 든 바로 그때.
“어머, 사이먼 님 아니세요?”
루아의 어머니가 시몬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이제 막 구운 빵을 채워 넣으려던 모양이었다.
“빵 사러 오신 거예요?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그러셨구나. 루아. 뭐 하고 있니? 어서 사이먼 님을 모셔야지. 여기는 내가 맡을 테니 들어가 보렴.”
“네!”
루아가 시몬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사실 얼굴만 보고 가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적당한 타이밍에 루아의 어머니가 나서 주니 너무나도 고마웠다.
안으로 들어간 시몬은, 테이블이 놓인 작은 거실에서 루아와 단둘이 마주 보고 앉았다.
“집이 아담하고 좋군요. 잘 꾸며진 것 같습니다.”
시몬은 집을 둘러보았다.
시골의 느낌이 나는 정겨운 소품들이 많았다. 마이너 마을에서 가져온 모양이다.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드렸네요. 감사해요. 아버지께 얘기 들었어요. 사이먼 님께서 집이랑 가게 구하는 데 신경 써 주셨다고요.”
“별거 아닙니다. 당연히 신경 써 드려야죠.”
“그런데 얼굴이 좀 야위신 것 같아요. 어디 편찮으셨나요?”
루아가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몬은 두 손을 내저었다.
“전혀요. 좀 바빴습니다. 저 멀리 로데론 섬 무역로도 점검해야 했고, 최근에 아크튜러스 가문에서 승계전이 열리는 바람에 이곳저곳 바쁘게 뛰어다녔죠. 뭐 먹을 시간도 없이 말입니다.”
“그러셨구나…… 그런데 로데론이라는 곳은 어떤 곳인가요? 처음 들어요.”
“알데바란 남쪽에 있는 섬입니다. 해적섬으로도 유명한 곳이지요.”
“해적이요? 위험한 곳이네요.”
그러면서도 루아는 눈을 반짝였다. 전생에도 그랬다. 그녀는 모험 이야기를 좋아했다. 마을 밖으로 나갈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시몬은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때까지 정말 전설적인 업적을 세웠으니까.
“바쁜 건 좀 괜찮아지신 거죠?”
“이제 좀 숨이 트였습니다. 며칠 휴가를 받기도 했고요. 그보다 이 빵, 정말 그리웠습니다.”
시몬은 자연스레 빵을 하나 꺼내 입에 넣었다.
“이야, 더 맛있어진 것 같은 느낌이군요. 수도 사람들이 줄을 서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빵은 어머니께서 직접 만드십니까?”
“아직은요. 저는 배우면서 도와드리고 있어요. 앗, 잠시만요!”
뭔가를 떠올린 루아는 한옆으로 달려가 우유를 따라 왔다.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더 좋은 걸 준비했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존슨 씨의 빵은 우유와 먹어야 제격입니다. 그 이상의 것은 필요하지 않아요.”
시몬은 정말 맛있게 빵을 먹었다. 반가운 마음도 있지만 실제로 맛있기도 했다.
“슬슬 가 봐야겠군요.”
“벌써 가시게요?”
루아는 스스로 물어 놓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았다. 실례라고 생각한 것.
당연히 시몬의 입장에서는 기쁜 반응이었다.
“바깥에 아직 줄이 깁니다. 어머니께서 바쁘실 테니 도와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아…….”
세상에 이렇게 마음이 넓은 사람이 또 있을까.
“일요일 저녁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땐 가게 쉬는 거 맞지요?”
“아, 네!”
루아는 벌써부터 일요일 저녁 메뉴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식사를 하실 거냐고 묻지도 않고 말이다.
“괜찮으시다면.”
“사이먼 님.”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화들짝 놀란 루아가 얼굴을 붉혔다.
“먼저 말씀하세요!”
“아닙니다. 루아 양의 말씀을 먼저 듣고 싶군요.”
“아니에요. 저는 그냥…….”
시몬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어쩔 수 없이 루아가 먼저 말해야 했다.
“그…… 저 괜찮으시면 그날 저녁 드시고 가지 않으시겠어요?”
“놀랐네요. 저도 그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괜찮으시면 저녁 얻어먹을 수 있을까 싶어서.”
“마음이 통했네요.”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몬은 품에 넣어 둔 향낭을 꺼내 루아에게 건넸다.
“선물입니다. 왠지 루아 양이 생각나는 향기라서 사 봤습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군요.”
향낭은 평민들은 구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이다. 루아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감사해요. 사이먼 님.”
“그럼 일요일 밤에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시몬은 집을 나섰다.
품에 향낭을 안고, 루아는 한참이나 시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쁜 미소를 지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