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빌어먹을 회귀 (2)
황실에서 온 손님들은 별다른 소란 없이 조용히 황도로 돌아갔다.
돌아가기 전 황태자는 드뇌브 후작과 시몬에게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겼다.
“조만간 또 보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오늘의 아쉬움은 그때 풀도록 하지.”
고도로 정제된 악의가 섞인 한마디라고, 시몬은 생각했다.
시몬은 그것이 자신을 향한 선전포고라 이해했다. 이제 아크튜러스 가문을 이어받게 되는 건 자신이었으니까.
“저도 또 뵙게 되는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태자 전하.”
시몬은 인생 2회 차였다.
보란 듯이 전리품으로 얻은 ‘템페스트’를 허리춤에 차고 나오는 여유를 보였다. 대담하게도, 시몬은 웃으며 황태자를 전송했다.
“몸조심하시고 종종 연락드리겠습니다. 제국에 무궁한 영광을.”
“…….”
시몬을 잠시 노려본 황태자가 망토를 휘날리며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엄청난 규모의 기사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분간은 시끄러울 일이 없겠군.’
그럼에도 개운한 마음이 들지 않은 것은 승계전에서 이겼기 때문이었다.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게 싫었다.
한편으로는 가정의 평화가 찾아왔다. 헤라의 분노는 진정되었고, 드뇌브 후작은 친아들이 명분까지 얻은 것에 무척 흡족해했다.
시몬이 계획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되었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잘못된 일이 바로잡힌 것이나 다를 게 없었다.
“드뇌브 경.”
“예. 각하.”
황실의 행렬이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 카펠라 가문의 밀튼 공작이 드뇌브 후작에게 넌지시 말했다.
“슬슬 혼례 날짜를 잡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대는 어찌 생각하나?”
“오, 실로 반가운 말씀이군요. 좋은 날을 한번 잡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좋네.”
비록 케나드가 우승하진 못했지만 카펠라 공작가에서도 예비 사위의 잠재력을 매우 높게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승계전을 기념하는 연회가 열렸다.
시몬은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귀족들의 축하를 받았다. 사람들은 즐거워했지만, 시몬은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오라버니. 어디 아프세요?”
귀여운 이올린이 걱정해 주었다. 시몬은 씁쓸히 웃으며 이올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늘 좀 많이 움직였더니 힘들어서 그래. 걱정하지 마라.”
“오라버니, 너무 멋있었어요.”
“케나드 오라버니가 더 멋있지 않았니?”
시몬을 빤히 바라보던 이올린은 제법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가 최고예요!”
“……고맙구나.”
시몬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이젠 케나드가 더 낫지 않냐는 프레임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주점에서 술을 얻어먹으며 소문을 퍼트리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어서 빨리 방으로 가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빌어먹을 회귀.”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시몬이 아크튜러스 가문의 적법한 후계자가 되었다는 소식이 온 대륙에 퍼져 나갔다.
사방에서 축하 사절이 속속 도착했다.
때맞춰 황실에서도 중요한 소식을 하나 발표했다. 구두로 약속되었던 아크튜러스 가문과의 혼담이 취소되었다고 말이다.
물론, 영악한 황태자는 그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저 제국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다는 촌평만 남겼을 뿐.
그것만으로도 황도의 사교계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끊임없이 뒷말을 쏟아 냈다.
그중엔 황실과 아크튜러스 가문의 사이가 나빠진 것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금방 부정되었다.
황태자와 황녀가 승계전에 참관했던 것도 있고, 황실은 파혼 발표에 덧붙여 아크튜러스 가문에 포상을 내렸기 때문이다.
승계전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과 대 오크 전쟁에서 세운 공을 치하하기 위해서.
그래서 사교계를 주름잡는 사람들은 황실이 좀 더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혼처를 알아보는 게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히려 버림받은 것은 아크튜러스 가문일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빠르게 퍼졌다.
“이상 보고드린 대로 제국의 여론은 나쁘지 않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크튜러스 가문과 소가주님을 동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지요.”
파혼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시몬은 조금도 개운함을 느낄 수 없었다. 승계전에서 이겼기 때문에.
“네 작품이냐?”
“정확히는 진 경과 합작한 겁니다. 거기에 가주께서도 비용을 아끼지 않고 지원해 주셨죠. 그래서 소문을 좀 더 유리한 쪽으로 끌고 갈 수 있었습니다.”
“너를 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참 불쌍할 거야. 그치?”
“칭찬 감사합니다. 소가주님.”
“그놈의 소가주 소리 좀 안 하면 안 되냐?”
“그건 곤란합니다. 이제 정식으로 책봉되셨으니 공자님이라고 부를 순 없습니다.”
“그래? 그럼 소가주로서 명한다. 지금부터 소가주의 소 자라도 꺼내면 즉시 파면이다! 끝장이라고!”
안경을 고쳐 쓴 라니에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승계전에서 승리한 이후로, 시몬의 몰골은 피폐해지고 있었다.
스트레스가 그만큼 쌓였던 것도 있지만, 음식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그래서 살이 좀 빠졌다.
그럴 만도 했다.
승계전이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보다 더 많은 일들을 넘겨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뇌브 후작은 마치 조기 은퇴하려는 듯 본인의 일을 부담 없이 시몬에게 모조리 위임하고 있었다.
거기에 서기관 칼림까지 와서 조언을 하고 있으니 돌아 버릴 수밖에.
“갑작스레 많은 일들을 맡게 되셔서 힘든 건 저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가문의 일은 결코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조언을 드리고 싶군요.”
“가볍게 생각을 못 하니까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어차피 한 번 해 보셨던 일이니 잘해 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생에서는 우리 가문을 공작가로 승작시켰다고 하셨으니, 이번에는 그 이상을 노려 봐도 나쁘지 않겠죠.”
이제는 아예 대놓고 전생이라는 말을 꺼냈다.
드뇌브 후작과는 달리 라니에리는 시몬이 회귀했다는 것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다. 나름 교양 있게 비꼬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몬은 더 화났다.
하지만 화를 낼 사이도 없이 노크가 들려왔다. 정확히 열다섯 번째 손님이 찾아왔다.
“주인님. 일로스테입니다.”
“들어와.”
다른 사람이었다면 다음에 보자고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막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일로스테가 돌아왔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시몬은 친히 침대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살이 좀 탔네? 제법 고생 좀 한 모양이군.”
“모든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보다 축하드립니다. 소가주님.”
“쯧, 소식 들었어?”
“오면서 들었습니다. 가능한 빨리 오려고 했는데 뒷정리가 좀 늦게 끝났습니다.”
“증거는 모조리 없앴지?”
“문제없게 잘 마무리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황실과 알퐁스 백작가는 빼앗긴 마약을 되찾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 막심한 손해까지 입을 것이고, 밀수 경로를 바꾸든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시몬이 물었다. 일로스테는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는지 즉시 대답했다.
“이것으로 제 복수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 배가 고픕니다.”
“그렇겠지.”
“허락해 주신다면 진 경과 함께 합을 더 맞춰 보고 싶습니다만.”
“비리비리했던 사람이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다니 놀랍네.”
비꼬는 게 아니었다. 처음 일로스테 남작을 보았을 땐 사교계에서 이성이나 유혹하는 한량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바싹 독이 오른 독사를 보는 듯했다.
“안 그래도 가문의 조직을 좀 개편할 생각이다. 개편이라기보다는 사조직을 만든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가주님께 허가받으신 것입니까?”
“관련 업무를 모두 위임하셨으니 내 마음대로 할 거다.”
라니에리는 이마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조만간 드비안느를 찾아가 효과 좋은 진통제를 구해야 할 것 같다.
“우선, 지금 일로스테 네가 거느린 조직을 공식 첩보 조직으로 승격시킬 생각이다. 그대로 네가 지휘하도록.”
“영광입니다. 주인님!”
“이름은 생각해 봤어?”
“데저트스톰이라는 가명을 쓰긴 했습니다만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주인님께서 지어 주신다면 모두가 기뻐할 것입니다.”
“블랙레이븐.”
검은 까마귀라는 의미였다. 첩보 조직에 아주 잘 어울리는 명칭이라고 생각했다.
라니에리도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명을 따릅니다.”
“블랙레이븐의 첫 번째 임무를 주지. 지금 우리 저택에 숨어들어 온 첩자들을 모조리 색출해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미 시몬과 라니에리는 아크튜러스 저택 내에 황태자가 심어 놓은 첩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기세를 한번 꺾었으니, 순차적으로 첩자들도 몰아내리라 결심한 것이다.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가문과 관계된 일이니 라니에리와 협력하도록. 매우 은밀히 진행되어야 한다.”
“예.”
가슴을 쳐 군례를 취한 일로스테가 밖으로 나갔다. 라니에리가 은근히 웃었다.
“역시 잘 어울리십니다. 멋진 가주가 되시겠군요.”
“적당히 해라 진짜.”
한숨을 내쉰 시몬은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다음 계획을 라니에리에게 전했다.
“제3기사단격의 사조직도 만들 생각이야. 단장으로 로빈을 앉히려고 하는데 어때?”
“음, 그건 좀 지나치지 않을까요? 로빈 경은 서임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반대가 심한 거야 문제가 되지 않더라도 내부에서 견제를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나이가 어린 것이 조금 걱정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시몬의 생각은 달랐다.
“견제 정도는 괜찮아. 실력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니까. 조만간 익스퍼트에 진입하면 보는 눈이 달라질걸?”
“그렇다면 큰 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물론 라니에리가 반대한다고 해도 강행할 생각이었다.
그럴 거면 후계자 왜 시켰냐고 툴툴거리면서 말이다.
시몬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이름을 붙여 주면 좋을까 하고.
“시리우스. 새로운 기사단의 이름이다.”
“좋군요.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찬란히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편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차출하실 것인지, 아니면 새로 선발하실지.”
“당연히 새로 뽑아야지.”
“후보생 리스트를 올리라 전하겠습니다.”
아크튜러스엔 기사 양성소가 따로 있었다. 지금도 기사의 길을 걷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땀을 쏟고 있다.
“시리우스는 오로지 내 명령에만 복종하는 기사단이 될 것이다. 비약을 먹일 첫 대상이 될 터이니 충성스러운 자들을 선별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켈로그 좀 불러. 신선놀음 그만하고 와서 병사들에게 활 쏘는 것 좀 가르치라고 해.”
“바로 사람 보내겠습니다.”
라니에리는 책사로서 짜릿함을 느꼈다.
시몬이 본격적으로 ‘농사’에 들어갔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군사력을 키우려 하고 있었다. 강력한 군대는 새로운 국가의 초석이 될 것이다.
“이제 대강 할 일은 다 끝났지?”
“더 보고드릴 것은 없습니다. 손님이 계속 찾아오시긴 하겠지만 말이죠.”
“잠시 마을에 좀 다녀오마.”
그 말에 라니에리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천으로 된 주머니었는데, 달달한 향이 기분 좋게 풍겼다.
고급 향낭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러 가시는데 선물이라도 하나 가져가십시오. 동방에서 온 상인에게 구입한 향낭입니다.”
“음, 향기 좋은데?”
“비싼 겁니다. 공자님께서 요즘 여러모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시는 것 같아 드리는 것이니 유용하게 쓰십시오.”
“역시 프로는 다르군.”
시몬은 오랜만에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향낭 값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