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빌어먹을 회귀 (1)
“왜?”
시몬이 중얼거렸다.
승부는 마지막 순간에 갈렸다. 서로의 급소를 노리려던 검은 한 번 더 부딪혔고, 이번엔 찌르기로 상대의 목을 노리려던 상황이었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위험하기도 했다.
두 형제는 서로의 목숨을 취해서는 안 됐으니까. 목숨을 취하지 않으면서도 상대의 예기를 꺾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왜 끝까지 검을 뻗지 않았지?”
시몬이 재차 물었다.
검을 떨어트린 쪽은 케나드였다.
비등하게, 아니 오히려 시몬보다 더욱 빠르게 검을 내질렀던 쪽은 케나드였다.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면 시몬보다 더욱 먼저 급소를 점거할 수 있었을 터.
하지만 케나드는 그러지 않았다.
“왜 검을 중간에 멈췄냐고 물었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회귀한 이후, 시몬이 처음으로 케나드에게 화를 냈다.
체념하듯 웃은 케나드가 고개를 들었다.
시몬은 살짝 놀랐다.
동생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게 빛나고 있었다.
“형님이 혹시나 다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형님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거야?”
문득, 아버지가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케나드가 자신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한 말이.
“그 상황에서 계속 검을 내질렀다면 멈추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물론 형님이 피하셨을 수도 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검이 멈춰 있었습니다.”
“…….”
시몬은 방심했다.
너무나도 나태했다. 부지런히 살펴보고 돌봐 줘야 할 동생이었는데, 정작 속마음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우러러보고 따르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자신이 케나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후작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이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되었다.
‘명백한 내 실책이다.’
화가 치밀었으나, 케나드의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물을 끼얹은 듯 사라졌다.
이윽고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자신을 향한 존경심과 애정이 만들어 낸 결과를 놓고 화를 낸다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기에.
무엇보다도 전생에서 북부로 쫓아내듯이 내보낸 동생의 결정이었다.
존중해 줄 수밖에 없었다.
“결승전의 승자는 시몬 아크튜러스! 시몬 공자가 승리하였소!”
“오오오오!”
귀족들이 환호성과 박수를 보내왔다. 드뇌브 후작 내외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일어나 손뼉을 치고 있다.
한편, 황실에서 온 손님들은 결코 웃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후원하던 방계의 공자들이 모조리 패하고 말았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황태자와 황녀가 마지막까지 기대했던 것은 케나드 공자가 이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카펠라 공작가를 압박해 혼담을 깨고 황녀를 그 자리에 꽂아 넣을 생각이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부의 신망을 잃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서부는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전체적인 세수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생긴다.
하지만 황태자는 남부의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었다.
황실기사단에 필적할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아크튜러스 기사단. 그리고 그 가문의 무력. 그것이 탐났다.
그래서 이렇게 무리하면서까지 승계전에 참관하게 된 것이었다. 황실의 보물까지 빼 오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것마저 힘들게 되었다.
‘망할. 빌어 처먹을! 황실기사단을 끌고 와 모조리 찢어발기고 싶구나!’
황태자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얼마나 꽉 쥐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을 뚫어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상황이었다.
이미 황도와 대륙 전역의 사교계에서는 시몬과 메르세데스 황녀가 결국 파혼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소문은 말보다 빠르고 강철보다 단단해 군대를 동원한다 한들 막을 수 없는 법.
거기에 아크튜러스 가문과 황실에서도 딱히 부정하지 않았기에 그것은 사실로 굳어지고 말았다.
서로 공언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파혼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여기에 세레스 가문의 진이 큰 역할을 해냈다.
대륙 남부는 물론, 북부와 동서부까지 절묘한 소문을 퍼트린 것이다.
그 와중에 황실에서는 로버츠와 카펙에게 황실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개량된 ‘오러 브레이커’라는 독약이 쓰였고, ‘템페스트’라는 아티팩트까지 동원되었다.
이 상황에서 다시 시몬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황실의 명예를 더럽히는 짓과 다를 게 없었다.
무엇보다도, 황태자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쨌든, 황태자는 황실기사단을 동원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직 태자의 신분이지, 황제가 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저 속으로 분노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형님. 이제 우리 가문을 잇는 것은 형님이십니다. 그 누구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황실에서도 증인이 되었으니까요.”
“지금 나 놀리는 거냐?”
“그럴 리가요.”
케나드도 시몬이 가문을 잇지 않으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전생의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시몬이 고려하지 못한 것은, 케나드는 경험하지 못한 전생이라는 점이었다. 지금의 케나드는 북방으로 가 본 적도 없다.
그래서 오히려 홀가분했다. 약간 어그러졌던 가문의 상황이 제대로 맞춰진 것 같아서.
“일어나라.”
시몬은 케나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케나드가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사이 귀빈석에 있던 아크튜러스의 주인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나는 오늘처럼 이렇게 뿌듯한 적이 없었다. 둘 다 정말 잘 싸웠다. 멋진 승부였다.”
드뇌브 후작은 정말로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기뻐했다. 이제는 다 자란 두 아들의 어깨를 다독였다.
마음 같아서는 같이 포옹해 주고 싶었지만,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크튜러스의 엄격함을 지킬 필요가 있었다.
돌아선 드뇌브 후작이 목소리에 오러를 실어 엄숙히 선언했다.
“이것으로 우리 가문의 적법한 후계자는 시몬으로 정해졌음을 공표하는 바이오. 여기에 그 누구도 이견을 달아서는 안 되며, 이 모든 것은 태자 전하께서 보증해 주실 것이오!”
시몬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허탈감이 들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열심히 뛰어왔던가?
“빌어먹을 회귀.”
그 한마디를 조용히 뇌까린 시몬.
편안한 귀농 라이프가 아른거리다 사라지고, 눈앞이 점점 캄캄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 * *
그날 오후, 시몬은 방에 틀어박힌 채 외출하지 않았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승리를 거머쥐고 가문의 승계권을 적법히 획득한 날이었다.
전담 하녀 제니는 왜 첫째 도련님의 심기가 불편한지 알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왠지 승계전을 기념하는 만찬 파티에 참석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저…… 공자님?”
시몬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뒤척일 뿐이다.
자고 있지 않다는 건 확실히 알겠는데, 대답을 하지 않으니 계속 말을 걸기가 좀 그랬다.
제니는 얌전히 문 쪽에서 대기했다.
바로 그때.
“공자님. 라니에리입니다.”
“자매품도 같이 왔어요!”
라니에리와 드비안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 있던 제니는 순간 인생 최대의 갈등에 직면했다.
‘어, 어쩌지?’
라니에리는 사실 따로 보고하지 않아도 들어올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시몬이 내린 특권이었다.
굳이 두 사람이 밖에서 찾아왔다는 것을 알린 이유는, 시몬의 심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불편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제니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 공자님. 라니에리 님과 드비안느 님께서 찾아오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
시몬은 대답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제니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라니에리 님, 드비안느 님. 지금 공자님께서 좀 심기가 불편하셔서 면회가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심기가 불편하시다고?”
드비안느가 그렇게 되물었다. 제니는 그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일 뿐이다.
“그럼 오히려 잘됐지~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를 날려 버릴 순 없으니까. 그치? 라니?”
“오랜만에 제법 현명한 말을 하는군.”
“가자구?”
두 친구가 당당히 거처 안으로 들어섰다. 시몬은 몸을 돌리며 이불을 더욱 머리끝까지 잡아당겼다.
“아크튜러스의 적.법.하.신 대공자님, 아니. 이제 소가주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시몬 소가주님을 뵈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드비안느의 표정은 사악했다. 이 순간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것 같은 느낌으로.
반면 라니에리는 좀 걱정이 되었는지 시몬의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
“그렇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해도 승계전의 결과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건 공자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역시 라니에리도 한패였다.
“하아.”
한숨을 내쉰 시몬이 이불을 홱 걷었다. 그리곤 라니에리와 드비안느를 번갈아 가며 노려보았다.
“불난 집에 기름 뿌리려고 온 거냐? 자고 있는 거 안 보여?”
“안 주무신 거 다 압니다.”
“하아아.”
시몬은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정식으로 소가주가 되신 것을 축하하기 위해 왔습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아지실 겁니다. 시종도 몇 명 붙여 드릴 생각이지요. 그래서 차 한잔하면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눠…….”
스륵!
시몬은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크튜러스의 대공자답지 않은 귀여운 모습에 드비안느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뒤에서 지켜보던 제니도 황급히 입을 가리며 돌아섰다.
하지만 라니에리는, 마치 엄격한 가정 교사처럼 헛기침을 했다.
“소가주의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공자님.”
라니에리가 제니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방 안에 소꿉친구들만 남게 됐다.
“어쨌든 잘되지 않았습니까? 이로써 황녀님과의 혼약이 완벽히 깨졌고, 공자님이 원하시는 분과 맺어질 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병 주고 약 주냐?”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솔직히 지금 상황처럼 좋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입니다만.”
결국 시몬이 백기를 들었다.
세 사람이 테이블에 둘러앉았고, 시몬이 물었다.
“케나드는 뭐 하고 있어?”
“연무장에서 열심히 수련하고 계십니다. 굳이 왜 그러시냐 여쭤봤는데, 손에 남은 그 처절했던 감각이 없어지기 전에 다시 복기해 보신다고 하네요.”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케나드는 오크와의 전쟁이 끝난 그날 밤에도 혼자 수련을 했었다.
“내일 중으로 대륙 전역에 아크튜러스의 소가주가 책봉되었다는 사절을 보낼 예정입니다.”
“그냥 조용히 넘어가도 되잖아. 예산 낭비라고.”
“그것이 가문의 합당한 절차라는 것을 공자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허례허식이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계속 부정하신다고 현실이 변하진 않습니다. 담담히 받아들이십시오.”
배알이 뒤틀리는 느낌이다. 시몬은 의자 뒤로 넘어갈 듯 고개를 젖혔다.
“빌어먹을 세상. 빌어먹을 회귀…….”
“주군께서 공자님께 아크튜러스 상단의 운영권을 전부 위임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상단 관리에도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또한 아크튜러스 사령관직은 유지됩니다. 신임 기사들과 수련생들의 훈련을 잘해 달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매주 한 번씩 재무관과 영지 운영에 관한 회의를 열게 되었습니다. 우리 영지의 회계 업무도 슬슬 하셔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또, 외교권도 일부 위임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제국의 귀족들과만 친분을 이어 갔지만, 앞으로는 변방에 있는 왕국과도 소통해 달라는 주문을 하셨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시몬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성큼성큼 창문으로 가 창문을 열었다.
“기다려. 잠시 뛰어내리고 올 테니까.”
“왜요?”
“죽으면 다시 회귀할 수 있지 않을까?”
라니에리와 드비안느는 정색했다. 특히 라니에리는 고개까지 저었다.
“농담 그만하시고 와서 앉으십시오. 보고해야 할 사항이 많으니까요. 공자님께서 소가주가 되신 덕에 저도 바빠졌습니다. 시간을 허비하기 어렵습니다.”
“…….”
“어서요.”
오크 연합의 12족장이 일렬로 서 있던 그때보다, 테이블 한쪽을 차지하고 앉은 라니에리가 훨씬 무서워 보였다.
시몬은 조용히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렇게 라니에리의 조언은 해가 떨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