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공자는 쉬고 싶다-105화 (105/120)

105화: 결승전 (2)

아크튜러스의 두 적자가 무대 위에 섰다.

드뇌브 후작과 헤라를 비롯한 모든 아크튜러스 가문의 일원들이 뿌듯함을 느꼈다.

그 어떤 보물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두 아들들이었다.

특히나 공식적으로 열린 승계전에서 모든 방계 공자들을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아크튜러스의 진짜 혈통은 언제나 강하다.

마치 이 문구를 그들의 머릿속에 새겨 넣는 행사처럼 보일 정도였다.

“결국 첫째와 둘째의 싸움인가…… 뭔가 묘한 기분이군. 내심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말이지.”

그렇게 운을 뗀 황태자는 술병을 들었다.

황녀와 저택에서 쉬고 나온 이후, 그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어울리지 않게 인자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사람 흉내까지 냈다.

그를 바라보며 시몬은 내심 이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약에 절어 있는 건 황녀만이 아닐 수도 있겠군.’

약의 유혹을 떨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특히나 그것을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자리에 있다면 말이다.

황실의 국고는 무궁무진하고, 권력은 그보다 더욱 대단하다.

멀쩡한 상태라고 보기엔 황태자는 너무나 유순해 보였다.

‘찬란했던 태양이 저물어 가고 있는 것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서는 황제가 마약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황제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인이었던 메르세데스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황실과 얽힌 일이라면 가능한 피하려고 했었으니까.

‘내가 만든 변수가 황태자를 폭주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지. 메르세데스 황녀가 일로스테 남작을 죽이려 했던 것처럼.’

남부의 지배권을 획책하려는 음모는 교묘하게 틀어막히고 있었다.

심지어는 제국의 보물까지 보란 듯 빼앗겼다. 무수히 많은 아티팩트 중 하나이나, 누구보다도 강한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기엔 충분했다.

곧 황제가 될 그의 운명을 바꿀 만한 동인은 이미 충분히 마련되고 있었다.

‘만약 제국이 몰락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다면?’

혼란의 시대가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시몬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가문을 이을 생각은 없지만, 아크튜러스가 위기에 빠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진 않을 거니까.

강력해진 기사단이 적군을 막을 것이고, 누구도 알지 못하는 미래 지식으로 우위를 점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더 재미있어지겠지.’

돌연 시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사이 황태자의 축사도 말미에 접어들었다.

“……이것으로 만천하에 알리게 되었군. 아크튜러스를 이을 사람은 그대들뿐이라는 것을. 시몬, 그리고 케나드. 행운의 여신이 그대들을 향해 미소 짓기를 바라지.”

황태자가 따른 술이 두 사람에게 전해졌다. 시몬과 케나드가 동시에 마셨다.

두 사람은 굳이 오러 브레이커가 섞인 술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인 것도 있고, 오러 없이 난투를 벌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러가 없다면 진짜 실력이 드러날 테니까.

“어떠냐?”

“괜찮습니다.”

술에는 오러 브레이커가 섞이지 않았다. 맛이 좋은 술이었다.

“모든 게 형님 뜻대로 되었군요. 무척 기쁩니다.”

“나도 그렇다.”

“이렇게 많은 관객을 모시고 형님과 대련하는 건 처음이네요.”

“흔한 일은 아니지.”

형제간에 오갈 수 있는, 다소 심심한 느낌의 대화가 이어졌다.

케나드가 웃었다.

“형님이 말씀하셨죠. 북방으로 가서 평생 이민족과 싸우다 불쌍하게 죽었다고 말이죠.”

관중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케나드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제가 경험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마음의 짐이 있으시면, 이 자리에서 푸셨으면 합니다.”

“너는 너무 착한 게 탈이야.”

이번엔 시몬도 웃었다. 다시금 과거의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웃음에 약간의 씁쓸함이 섞였다.

“이 승부에 후회를 남기지 말거라.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다.”

“갑니다. 형님.”

스릉!

검이 동시에 뽑혔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이 검세를 취했다.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 그러나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완벽한 검세.

거기에, 같지만 다른 검세가 펼쳐졌다.

시몬이 다소 수비적이라면 케나드는 다분히 공격적인 검세를 취했다.

“뭐지? 검세가 다른데?”

“마치 다른 가문의 공자끼리 상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군!”

같은 아크튜러스의 적자들이 서로 다른 검세를 취했다는 것은, 무예에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보기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애초에 두 사람이 조금은 다른 스타일로 싸운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다 서로 검을 마주하며 서 있으니 그 차이가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 것.

“둘 다 처음 보는 검세야. 내가 아크튜러스 검식은 조금 아는데, 저것과는 좀 달라. 기세도 그렇고.”

“다른 가문의 검식을 가져온 거라는 말이오? 아크튜러스 검식은 대륙 전체를 놓고 보아도 최상급의 검술일 텐데?”

“그건 아닙니다. 조금 변형된 것 같은데…….”

“소문에 케나드 공자가 새로운 아크튜러스 검식을 익혔다는 이야기가 있었소.”

“검식을 개량한 거군.”

“그렇다면 신구의 대결인가?”

“루머일 뿐이요. 검식을 새롭게 바꾼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가주께서 허락하시지 않았을 거야.”

“대체 누구의 말이 맞는 거요!”

귀족들은 당장이라도 드뇌브 후작에게 달려가 이 상황을 설명해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귀빈석엔 그 누구도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묵직한 침묵이 깔리고 있었다.

그만큼 그곳에 있는 모두가 승부에 집중하고 있었다.

“역시, 그랬던 거냐.”

침묵을 지키던 드뇌브 후작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얄밉게도 황태자가 놓치지 않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아아, 그냥 생각나는 게 있어서 말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니 심려치 마시길.”

평소라면 계속 추궁했겠지만, 나른함을 견디기 힘들었던 황태자는 고개를 돌렸다.

아크튜러스 검식을 마스터한 드뇌브 후작만이 이 상황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시몬 녀석, 케나드에게 신식 검술을 전수한 거군.’

시몬은 과거에서 회귀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후작도 그것을 어느 정도 인정한 상황.

‘하긴, 미래 경험이 있다면 새로운 검술을 익히고 있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 그런데 정작 본인은 구식 검술로 대응하겠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속았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방 먹었다에 가까웠다.

‘머리를 좀 썼구나. 시몬.’

구식 검식의 ‘심검’을 택했다는 것은 일부러 지기 위한 편법이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케나드가 익힌 신식 검술이 더 나은 검식이라고 해도, 구식 검식의 ‘심검’이라는 경지는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완성도에서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짧은 전수 시간을 고려한다면, 신식 검술을 대성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충분하지.’

완벽하게 검증된 현행 검술로 싸우느냐, 아직 검증되지 않은 신식 검술을 적당히 익혀 싸우느냐의 차이였다.

무학의 정점에 다다르고 있는 드뇌브 후작조차도 승패를 가리기 힘들었다.

‘이건 싸워 봐야 안다.’

만약 시몬이 적당한 술수를 부려 싸움에서 지려고 했다면 당장 경기를 중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잔머리라면, 충분히 관전해 줄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시몬. 너는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너와 피를 나눈 동생에 대해서 말이다.’

콰앙!

검과 검이, 아니. 오러와 오러가 격돌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선공은 케나드가 전개했다.

패도적인 신식 검술을 활용한 일격이었다. 그러나 구식 검술은 완연히 무르익은 것처럼 가볍게 공격을 막아 내었다.

“뭐지? 대체 뭐가 일어난 거야?”

“움직임을 놓쳤어!”

무예에 그리 뛰어나지 않은 자들은 케나드와 시몬의 검격을 놓치고 말았다,

그만큼 빨랐으며, 격정적이었다.

잠시 살짝 물러난 케나드는 방패를 버렸다. 그것은 시몬이 생각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이 녀석, 제대로 할 생각이군.’

케나드는 지금까지 수비적인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늘 방패를 드는 것을 고집했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간단히 방패를 버렸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온다.’

케나드가 움직였다.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고, 그가 있던 자리가 텅 비고 나서야 그가 움직였다는 것을 알게 될 정도로 빨랐다.

그러나 시몬도 보통은 아니었다.

그 찰나의 기류, 찰나의 기세를 잡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이쪽.’

시몬이 검을 들었다.

놀랍게도 텅 비어 있던 공간에서 케나드의 오러 검격이 쏟아졌다.

쾅!

콰과과과광!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견고했던 경기장 바닥이 움푹 파였고, 빗나간 오러가 관중석을 날려 버리기까지 했다.

대기하고 있던 아크튜러스 기사들이 오러를 끌어 올려 관중석을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대형 사고가 날 뻔했다.

제1기사단장 파월과 제2기사단장 한스도 최대한의 오러를 끌어 올려 방어진을 형성했다.

여차하면 드뇌브 후작까지 나설 기세였다.

“형님은 저에게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갑자기 케나드의 검이 두 개로 보였다.

스슥!

아니, 네 개였다.

사방에서 찔러 들어오는 케나드의 장검. 그러나 시몬은 태연히 검을 휘두르며 한 바퀴 회전했다.

따다다당!

네 개의 검날이 튕겨 나갔고, 이윽고 하나의 검으로 합쳐졌다. 검을 든 채 다시 검세를 잡은 케나드의 모습이 보였다.

“가르쳐 주신 건 검술만이 아닙니다. 기사로서의 마음가짐, 신념, 그리고 아크튜러스의 일원이라면 가져야 할 긍지까지…….”

케나드의 말이 이어질수록 검이 더욱 빨라졌다.

무아지경.

기연이 닿아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무아지경의 경지. 케나드는 앞선 오크와의 전투에서 한번 그 경지를 밟아 본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승계전 결승 무대에서 다시금 그 영역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 상황에서도 너는 한 단계 더 성장하려는 것이냐?’

호재였다. 이제야 시몬도 마음 놓고 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냥 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너의 성장을 위해 나도 최선을 다하마. 호락호락하게 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꼬리를 무는 듯, 케나드의 검이 뱀처럼 휘감아 왔다. 정확히 급소를 노리는 공격에 시몬은 힘겹게 공격을 흘려 냈다.

팅!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초식이었다.

시몬도 재빨리 살초를 전개했다. 심장을 꿰뚫을 기세로 검을 뻗었다.

검으로 막기엔 늦었다.

대신 케나드는 모든 오러를 건틀릿으로 집중시켜 검 끝에 부딪혔다.

쩌저정!

오러가 깨지며 방어에 성공했으나, 오러의 소모가 너무나 심했다.

“큭.”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고, 케나드는 방패를 버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말았다.

그러나 싸움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아지경에 빠져든 그는 잡념을 버리고, 오로지 이 승부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다시 검을 두 손으로 꼭 쥐고 남은 오러를 모조리 쏟아 냈다.

한 마리의 야수가 되었다.

쉭! 쉬쉭!

시몬의 검로를 미리 읽고 움직이는 케나드의 돌진은 실로 위협적이었다. 시몬조차도 회귀한 이후로 처음 느껴 보는 위기였다.

‘내가 가르쳐 준 체술을 이렇게까지 능숙하게 활용할 줄이야!’

감탄은 오래 하지 못했다. 시몬의 오감이 위험을 알려 왔기에.

제대로 맞서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해진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

살기가 피부를 찢어발길 듯했다. 시몬은 끌어 올린 오러를, 직감이 가리키는 한 점을 향해 강하게 내질렀다.

채챙!

두 사람의 공격이 막혔다.

그러나 초근접 거리.

이제 남은 기회는 단 한 번. 오러는 필요 없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공격을 펼쳐야 했다.

두 형제는 서로의 목을 치기 위해 검을 움직였다.

챙!

스슥!

차가운 검날이 누군가의 목덜미에 닿았다. 살짝 찔려 피가 흘렀다.

한발 늦은 자는 손에서 검을 떨어트렸다.

승부가 갈렸다.

0